실험실의 진화
홍성욱 지음,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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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서 공간이 가지는 역할

홍성욱, 『실험실의 진화』를 읽고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인간은 주위의 도구나 공간이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행동, 생각 더 나아가 가치관마저 변화한다. 그만큼 ‘환경’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굳이 유년기나 청소년기 때의 환경이나 경험만이 인간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아니다. 성년이 되어서도 우리 주위의 도구와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사고와 생활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니체의 일화는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모종의 이유로 펜과 종이 대신 타자기를 사용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문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우리의 생각이 외부로 표출될 때, 필연적으로 일정한 변화를 겪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역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연구 방향이나 지식의 탐구가 변화하지 않을까. 많은 학자가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무수한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실험을 행하는 장소인 ‘실험실’의 구축과 변화는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홍성욱의 『실험실의 진화』는 이러한 점에서 실험실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실험실이 자연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제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소거하거나 불가피하게 새로운 조건을 생성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 이러한 활동을 수행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그렇기에 과학자들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생각대로 제어할 수 있는 ‘자연’을 실험실 내부에 조성하고 이를 토대로 여러 실험을 진행해 왔었다.

그러는 와중에 실험실의 형태 역시 시시각각 변화했다. 초기 실험실은 오늘날과 같이 연구소라는 간판이 박힌 고층 건물에 존재하지 않았다. 실험하고 싶은 사람들이 사비를 들여 집에 실험 관련 기구들을 들어놓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실험실’이었다. 오늘날 대학생들이 자신이 머무르는 곳에서 서적과 논문들을 보면서 컴퓨터로 레포트를 써 내려갔듯이, 당시 과학자들은 자신의 거처에서 개인적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정리하면서 여러 과학적 원리를 발견했다. 아이작 뉴턴이 대학을 떠나 고향에서도 빛에 대한 실험을 여럿 진행하고 광학이라는 학문을 구축한 것 역시 현대의 ‘실험실’이라는 개념이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험실이 현대와 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근대 과학과 교육 제도가 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국가나 학회, 대학, 기업 등 다양한 곳에서 학자들의 연구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실험실은 공적 장소로 나오기 시작했고, 대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실험실은 설립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기존에는 연금술사나 화학자의 실험장만이 ‘실험실(laboratory)’라고 불리었지만, 점차 물리학, 생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위한 실험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학자와 연구원들의 실험 성과를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들이 논의되기도 한다. 실험실이라는 장소가 학자들의 실험 성과에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 구조를 개방적으로 건설하거나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의 논의를 활발하게 유도해 창의적 발견의 등장을 촉진하거나, 실제 자연환경과 가까운 공간을 만드는 등 연구소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실험실이 변화는 학자들이 실험실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실험’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일반적으로 실험은 자연의 진리를 찾아내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정의에 의구심을 던지기 시작했다. 실험 속 결과는 어디까지나 몇몇 변수의 제어를 통해서 도출된 결과인데, 이것이 자연 속에서도 그대로 진행된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과학자들의 실험과 그들이 도출해낸 결과가 정말 사회문화적, 외부적 요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실험 결과를 토대로 구축된 과학이라는 학문이 정말 다른 학문과는 다르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저서는 루이 파스퇴르의 사례로 실험 역시 외부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계획된 실험이 사회에 큰 파장을 야기한다고 설명한다. 최근 학문의 권력화에 대해서 몇 개의 논문을 통해 접해보았는데 과학과 실험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은 내심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관련 저서들도 다수 소개하는데,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이 책들을 탐독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 문과로 진입하게 되면서 실험실에서 의미 있는 과학 실험을 해본 적은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실험실의 진화』라는 책을 읽으면서 한동안 동떨어져 있었던 실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직접 실험을 해볼 일은 손을 꼽을 것 같지만 실험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의미를 알게 된 이상 이에 대해 탐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방학 때는 이과 동창들과 함께 과학철학 관련 저서들을 한번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P.S. 책의 장정이 독특하게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책이 불량품인줄 알아서 교환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렇게 제작되어 있는 것이어서 조금 놀랐다. 책의 장정이 접착제 비스무리한 것으로 종이들을 붙인 것에서 끝났는데, 이 과정을 통해 책을 펼쳐서 내용을 보기 한결 쉬워지는 것 같았다. 걱정과는 다르게 튼튼해서 나중에 나오는 책들도 이렇게 나오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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