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편한 진실을 넘어, 생각하라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를 읽고 -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책의 내용과 논리가 짐작이 갔다. 아, 환경 보호에 관한 책이겠구나 싶었다. 솔직히 살면서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TV에서, 사회에서 잊을 때만 하면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환경 이야기이다. 많은 시민 단체들이 환경 보호에 대해 외치며, 각국 장관들은 기후 관련 국제 협약을 매해 작성한다. 이 책도 그러한 활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책에서는 다방면으로 환경이 오염되고 있으며, 인류 사회, 특히 선진국들이 나서서 고쳐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환경이 어느 정도로 파괴되고 있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사람들이 접하더라도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까. 환경 보호에 관련된 소식과 서적들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드는 생각이다. 이 책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줄 수 있을까?
환경 보호라는 구호는 무려 반세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원자력과 같은 새로운 힘을 알게 된 사람들은 과학 기술이 인류가 맞닥뜨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학계에서도 과학적 낙관주의가 자리잡았다. 과학 기술을 통해 인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유토피아의 길을 열 것이라는 상상을 모두가 하던 시기였다. 환경 문제는 그 상상을 깨트리고 하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하나의 파장이었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의미라는 현실을 말이다.
환경 운동가와 뜻이 있는 과학자들은 계속해서 세계에 – 특히 풍요로운 선진국 국민에게 –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위험성을 알렸다. 이 책의 저자인 호프 자런 씨가 말하듯이, 인간은 가지가지의 방법으로 환경을 파괴했다. 동식물을 죽이고, 바다를 더럽히고, 땅에 독극물을 부었다. 푸르렀던 하늘은 어느새 땅과 다름없는 색을 띠었다. 모든 것은 보다 인류가 안락해지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일부 인류였지만.
2020년이 다 되었지만, 딱히 나아진 것은 없었다. 소소한 성과라면 프레온 가스(CFC) 사용이 범세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을 협의한 정도일까. 그런데 이것도 최근에 개발도상국에서 사용되면서 무위로 돌아가는 추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산화탄소와 메테인은 제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요와 공급 원칙에 맞추어 탄소 배출권 제도 등 여러 제도가 마련되었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나 마찬가지였다. 탄소 배출권 제도는 어찌 보면 오히려 선진국이 합법적으로 온실 기체 배출량을 늘릴 수 있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러는 사이에 생태계가 파괴되는 속도는 가팔라지고 사람들의 소비량은 늘어나기만 했다. 대안으로 대두된 신재생 에너지 산업도 매년 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책에서 언급했듯이, 그것보다는 인류가 쓰고 버리는 에너지가 증가하는 게 더 빨랐다. 신재생 에너지에만 목을 매어서는 현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책의 내용은 이제까지 읽어본 환경 관련 서적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치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물을 학살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대기를 오염시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런 이야기. 내용과 논리가 더 치밀하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환경 관련 정보를 어떻게 분석해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관해서는 좋은 책이었다. 책 끝에는 이제까지의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에 대한 방법도 간략하게 붙여두기도 했다. 자원 고갈 문제를 다룰 때 셰일 가스 이야기까지 짚어주었다면 완벽했겠지만, 이것은 곁가지 문제이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본질 자체를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전달해 주고 있었으니까.
환경 문제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환경 문제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문제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게 핵심이다. 사실 인류의 소비는 너무나도 당연시되어서 소비를 줄이려고 해도 줄일 수가 없다. 현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하더라도 막대한 양의 자원이 들어간다. 세계화는 사회 구성원들이 더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했지만, 그것은 ‘인류 사회’에서의 효율성이었지 ‘지구 사회’에서의 효율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지구의 효율성보다는 그들 사이의 효율성이 더 중요하고 목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다들 애매한 태도만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태도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인류가 멸망해도 된다는 의연함을 지니고 지금처럼 살던가, - 의연함보다는 한심함 같지만 – 아니면 가치관을 바꾸거나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어느 쪽을 택하든 간에 환경 문제를 머릿속에 확실히 지녀야 한다.
개인적으로 인류가 환경 문제를 확실히 인지하고, 그로 인한 자신의 미래가 잿빛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현재를 유지한다면, 비난할 생각은 그다지 없다. 아직 그런 상태는 아니기에 비난을 멈추지는 않고 있다. 그래도 너무 냉소적인 걸까. 회의주의적 사고가 기저에 깔려서일지도 모른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을 읽고 인류도 다른 생명체와 별다를 게 없는 신세라는 점을 여실히 느꼈다. 그렇다, 지구계는 일종의 닫힌계이기 때문에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인류가 사용할 에너지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에 성공하더라도 인류가 언젠가 소멸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러한 생각이 무심코 드는 것을. 그래도 회의주의적인 생각은 결국 내가 지금 편안하기에 드는 생각에 불과하다. 자신이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환경에 있다면, 이러한 생각은 배부른 소리이다.
가끔은 환경 파시즘(Eco-Fascism)의 논리가 끌린다. 인류의 반을 절멸시키겠다는 영화 속 빌런, 타노스를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의견에는 공감이 어느 정도 갔다. 나 자신이 그러한 일을 실천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동조심이 들었던 이유는, 왜냐하면 이 상황이 계속되었다가는 어차피 결국 인류의 반이 죽어 나가기 때문이다. 반만 죽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기 온도가 상승하면 생태계 파괴는 가속화될 것이고 근미래의 인류는 모든 농작물을 온실 속에서 기를지도 모른다. 마치 화성에서 농사를 짓는 SF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상상이 가지 않는가. 살아가기 위한 필수 자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타노스가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인류 사회가 – 빈민층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제거해 나갈 것이다. 소위 말하는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다. 물론 그렇다고 환경 파시즘과 관련된 도덕적 쟁점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 파시즘 측의 주장에 솔깃하게 된다.
앞으로 환경 운동에 참가하든 참가하지 않든, 확실히 하고 싶은 점은 환경 문제가 더는 ‘불편한 진실’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편안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그것을 향유할 때 ‘환경’이라는 사고가 있어야만 한다.
혹자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환경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굳이 환경 문제로 심의 있는 토론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 사회는 세계적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스스로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관찰자가 가지는 한계에 불과하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회 구성원들은 여러 방안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얻고, 충돌하고, 절충해 왔다. 위기의 극복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과실이었다. 그리고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의견대로 사회를 끌고 나가지는 못해도, 사회가 많은 생각을 반추하게 하고, 어느 정도의 개혁을 불러온다.
사람들이 환경 보호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번에 읽은 호프 자런 씨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을 읽으면 - 그와 관련해서 더 깊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기에 - 더욱 좋겠지만, 다른 책들도 많다. 레이첼 카슨 씨의 『침묵의 봄』과 같은 책들 말이다.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고, 따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이 말이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자아 정체성이나 존재론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