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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말이 사라진 날 -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투쟁사
정재환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어학회를 재조명하다.
정재환, 『나라말이 사라진 날』
작년 초에 나왔던 영화 ‘말모이’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영화 시장에서 크게 흥행하지는 않았지만, 역사 재현물 중에서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플롯이나 반전이 있지는 않았다. 평범한 작품이었고, 어느 사극에서나 보이는 등장인물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는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높게 평가받을 만했다. 이제까지 잊힌 역사적 사건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큰 무리 없이 각인시켰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큰 비중으로 회자된 적이 거의 없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 전말이 간략하게 실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언어가 민족의 결정 요소임을 생각했을 때, 조선어학회의 역할은 그 이상이었다. 근대 시기부터 이미 언어는 민족의 생사를 결정짓는 요소로 탈바꿈했다. 식민 제국은 식민지에서 쓰이는 언어를 탄압했고, 식민지인들은 반대로 자민족의 언어를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해방이 목전에 다다른 1940년대 중반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은 구한말부터 시작한 조선어 연구가 일제 강점기에 속에서도 계속해서 맥을 이어왔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조선어학회 사건을 중심으로 근대 시기에 한국어와 한글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이제까지 ‘언문’에 불과했던 한글이 어떻게 ‘국문’의 위치로 올라섰는지, 구한말 국문학자였던 주시경 선생부터 시작된 조선어 연구의 학맥이 어떻게 해방 정국까지 계승되었는지를 개괄적으로 훑고 있다. 국문법과 표준어 체제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책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책의 두께는 얇지만, 저자가 조선어학회에 관한 사실들을 알리기 위해 큰 공을 들인 흔적이 책 곳곳에 드러난다. 대표적인 일례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흔히 알려진 인식이나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열차를 타던 여학생들이 조선어로 대화하던 것이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말이 사라진 날』에서는 다소 생소한 사건들을 전한다.
역에서 지인을 기다리던 박병엽이 역에서의 불심검문을 통해 의심받게 되어 가택수사가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그의 조카 박영희의 일기장이 일제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국어(國語)를 사용하다가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박영희는 ‘국어’가 조선어를 지칭한다고 설명해 선생님과의 연관을 부인했지만, 경찰은 수사를 무리하게 강행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해당 책 내용의 신빙성에 의구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관련 자료 조사를 시작했는데, 최종적으로 『나라말이 사라진 날』에 실린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과 민족서사의 탄생」(장신, 2016.)이라는 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해당 논문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에 대한 갖가지 설들을 비교하면서 일기장 발단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다른 이설들은 당대의 사회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해당 책의 말미에서 설명하듯이, 이렇게 다양한 가설이 공존했던 이유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한 명확한 문건과 물증이 별달리 없어 관련인들의 증언에 따라 재구성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저자는 열차에서 조선어로 대화한 여학생 이름이 ‘박영옥’이라 알려진 것 역시 당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 추측에 대한 진위 여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저자가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자료 수집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지막 장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의 최종판결문에 대한 요약과 조선어학회에 대한 평론은 이러한 점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조선어가 억압받던 일제 강점기였지만 역설적이게도 현대 국문법의 기초는 이때부터 세워졌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등 다양한 문법 통일안을 내세웠고 - 이에 관한 여러 논박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 현대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어학회가 세운 기준은 거의 유지되었다.
회원들은 한반도 내에서 사용되는 한국어를 하나로 만들 방안을 강구하면서도 조선어 보급 운동,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 교육 사업 등 다양한 활동으로 한반도 내에서 조선어가 계속되게 했다. 조선어학회는 자신들의 활동이 독립운동 중 하나임을 알면서도 ‘정치와는 관계없는 학술 활동’으로 대외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점은 조선어학회가 해방 직전까지 일제의 탄압을 회피하면서 조선어 관련 활동을 지속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선어학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해방 이후 한국어는 일본어를 빠르게 대체할 수 있었다.
『나라말이 사라진 날』은 조선어학회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어 연구가 어떠한 의의를 지닌 채 진척되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조선어학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볍게 일독해 보는 것을 권하는 바이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 ( https://cafe.naver.com/booheong/198430 )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