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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후유증에 빠지다
하야미 가즈마사 저, 박승후 역, 『무죄의 죄』 -
만화나 영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본 뒤에는 정신이 멍해질 때가 많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 머리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감성은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에 아쉬움을 표하고, 이성은 그런 감성을 달래려는 듯 계속해서 작품 속 이야기를 재구축한다. 그래도 확실한 점은 내가 확실하게 작품에 감정이입하고 흥미롭게 읽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맞는 작품을 찾았다는 생각에 그날만큼은 잠들 때까지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다.
솔직히, 이 일련의 과정이 소설책을 통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소설과의 궁합이 맞지 않는다기보다는 소설책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소설책이라고는 정확히 1년여 전에 읽은 『냉정과 열정 사이』, 그리고 SF 장편 소설 서너 권에 불과하다. 최근이라고 말하면서 1년여 전 경험을 끌어오는 시점에서 아무래도 문제가 좀(?) 심각하다. 그러나 인지하면서도 이 편향적인 – 타인은 편집적이라고도 말할 – 독서 습관은 고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책을 통해서 내면에 지닌 하나의 관습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 책을 읽고 난 뒤 후유증에 제대로 빠져버린 탓일 것이다. 안내 책자에 “이 책의 후유증에서 사흘이나 빠져나오지 못했다.”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하야미 가즈마사의 장편 소설인 『무죄의 죄』(원제는 ‘イノセント・デイズ(innocent days)’ - 역자가 지은 제목도 작품을 관통하지만, 저자의 원제도 작품을 읽다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는 한 사람이 사형 판결을 받게 된 경위를 다루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다나카 유키노. 인위적으로 옛 연인이 살던 집을 방화했다는 혐의에서였다. 그러나 소설의 초점은 방화 사건이 아니다. 그녀의 사형 판결문의 문장 어두를 따와 만들어진 소제목을 가진 각 장은 유키노의 인생에 주목한다. 그녀의 유년기부터 성년기까지 소설은 그날의 진상을 하나하나 규명해 낸다. 그것도 유키노가 아닌 주위에 있었던 그와 그녀들의 눈길로. 유키노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부분은 얼마 없다. 독자는 유키노 주변인들이 유키노를 평하는 대로 유키노의 생각과 가치관을 추측해 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이 유키노와 그녀를 축으로 한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한편, 각 장은 관계가 없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짜여 있다. 유년기의 인물이 소년기, 더 나아가 성년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은 유키노를 둘러싸고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면서 그녀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러면서 각 장에 뿌려졌던 복선들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돌아온다. 저자가 곳곳에 뿌려놓은 복선에 한두 번 놀라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복선이 복선인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복선이라는 장치의 효과를 이토록 강하게 주었던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작품을 읽은 지 하루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작품의 후유증에 빠져있다. 유키노의 일생을 떠오를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학창 시절이었다. 소설 속의 공상과 현실을 순순히 동치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제까지의 일생을 자연스레 곱씹어보게 되었다. 정도는 달라도 비슷한 궤에 있는 일들은 내 주위에도 몇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는 잘 해결할 수 있었지만, 전부 그렇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잘 풀리지 못했던 나머지 일들도 제대로 대면할 수 있었을까.
“인간이란 꽤 복잡한 생물이라서 말이다. 생각하는 걸 다 말로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언젠가 네가 만날 누군가는 네가 뭐라고 해줄지 기대할 거야.
그런데 잘 설명할 수 없어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할 수도 있지.
그러니 그 누군가를 진솔하게 대하고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상상해주어야 한단다.”
상상. 안타깝게 타인에 대한 진정한 상상은 그 사람과 접촉하기 이전보다는 이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후회 비스무리한 무언가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내 주위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그만큼 비례해서 평소에도 그 사람에 대해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그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이름이 붙이기도 하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이 후유증에서 단기간에 빠져나오지는 못할 것 같지만 의미 있는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후유증이 계속 지속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스터리물을 표방한 이 책의 중심에는 하나의 범죄 사건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범죄는 탁해져 하나의 수사가 될 뿐이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유키노와 소설 속의 등장인물뿐만이 아닌, 거기에 자신이 더해진 그 무언가이다. 후유증이 무엇인지 궁금하거나 한번 빠져보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일독해보기를 권한다. 아마 삶을 돌아볼 좋은 기회를 가져다주는 후유증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좋아지긴 했어도 언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재개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지금, 가끔은 과거를 되돌아볼 후유증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이 책은 김영사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