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생각의 기술
박종하 지음 / 김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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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논리와 숫자로만 채워진 딱딱한 공학분야라고 생각하기쉬운데 의외로 인문학적인 면도 있네요.음악이나 미술도 수학적계산이 안 깔리는 분야가 없네요.사고의 자유가 수학적 아이디어의 시발점이네요.너무 겁먹을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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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과학 - 원자 무기에서 달 탐험까지, 미국은 왜 과학기술에 열광했는가?
오드라 J. 울프 지음, 김명진.이종민 옮김 / 궁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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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과학산업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놀랍군요.냉전이 그런 부수적인 과학발달 효과가 있었네요.아직까지 한국은 꿈꾸기힘든 분야지만 북핵때문이라도 대한민국도 첨단과학분야에 관심좀 가져야겠네요.군사기술이 머잖아 민간사업화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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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천재들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이덕일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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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엄연히 유교이며 성리학에 찌든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백년 역사속에 다분히 그시대의 반항아들,혹은 백성을 제몸같이 생각하고 사회개혁을 꿈꾼 이들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킹메이커였다. 고려시대의 불교에서 조선조의 유교로 사상적기반을 변화시킨 일이나 토지제도 개혁으로 신진 사대부와 백성에게 경작할 땅을 분배하고 다소 공산주의내지 사회주의성격이 짙은 주나라시대 정치를 회귀하려한 걸보면 그는 다분히 혁명가였다.조선의 개창은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는 그에게 운을 주지않았으니 방도전의 왕자의 난때 역신으로 몰려 제거되고 만다.천인의 핏줄이 섞여 권문세가의 멸시를 받은 그가 새왕조를 꿈꾼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군주란 권력의 양분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 있나보다.이성계를 이용하려 한 정도전은 결국 잘난 아들 방원을 이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구상한 조선의 기본건국이념은 변질되어 명나라의 조공국으로 전락했다.만일 그의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만일 그가 주장한 주나라시대 재상중심의 정치가 실현되었다면 조선이 군주독재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를 가질 수 있었을까?

 허균은 조선왕조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란 건 홍길동전이나 율도국건립을 통해 알 수 있다.임난이후 사회모순이 드러난 조선사회를 그는 한심하게 여긴 것같다.서인기득권은 정권을 유지하려고만 했고 백성의 고통은 외면했다.그러나 그의 급진혁명적인 생각이 그 시대에 허용될 리 없었다.결국 광해군시대의 정쟁에 말려 이상을 펴지도 못한채 처형되었다.

 윤휴가 북벌을 계휙하면서 호포법 주장을 이미 효종때했으나  좌절된 것은 순전히 권력기득층의 횡포때문이다. 결국 균역법은 영조때나 이루어졌다. 양난으로 민생이 피폐한 데도 권력층들이 자신들의 잇권만 따지는 건 지금도 같다.

 김육의 대동법은 조선역사에 세금의 부과를 획기적으로 통일시킨 제도였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안다는 건 김육 자신이 숙청되어 경기도광주에서 숯을 구우며 가족을 부양할 때 체험했을 것이다. 양반은 굶어도 노동하지 않는다는 사고의 시대에 천인으로 여겼던 숯굽는 일을 하며 노동을 한 그는  재상이 되어서도 민생의 고단함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정치인이 지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본디 임난이후 경기도에서 유성룡의 주도아래 시행된 수미법은 그시대에도 찬사를 받았으나 권력층의 사대부들의 반발로 결국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오죽하면 재상이던 유성룡이 수미법과 면천의 시행으로 실각하기까지했을까? 이토록 오래걸린 내막을 보면 어이없기 짝이 없다.대지주와 양반 사대부들이 경작결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한단느 것을 깨닫고 세금을 내지않으려 온갖 명분과 핑계를 대고 이미 시행된 대동법조차 폐기까지했다.그때도 양반층 기득권층 대지주의 조세저항이 극심했나보다.그 격렬한 지탄과 반대를 싸워가며 대동법을 추진한 김육도 대단한 사람이다.역대 제왕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김육처럼 민생을 돌봐주었더라면 전대통령들이 줄지어 감옥에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변덕스러운 숙종이 사대부지배층의 최고정점에서  대동법이 세금의 징수에 유리한 것을 알아채고 끝까지 법제화한 것이니만큼 온전히 백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앙정부의 착취가 덜해진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다.유서에서도 노망난 대신의 말은 대동법외에 쓸데가 없다고 할만큼 김육은 평생 대동법시행에 정치생명을 걸었다.경신대기근전에 시행된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대동법으로 공납이 없어지고  공인들의 활동으로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킨 건 한편의 역사의 장이다.그러나 이런 좋은 세법도 19세기 삼정이 문란해지며 빛을 보지 못했다.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잘 운영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서자들은  조선조에서 평민층의 부러움과 동시에 양반사대부들의 괄시의 대상이었다.

 정조시대나 되어야 서얼허통이 빛을 보았다. 실학자들의 생각이 유학에 찌든 양반 관료들보다 더 획기적이고 현실적이다.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다고 한 박제가나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유수원의 생각이, 노동하지 않는 양반은 먹을 수 없다고 깨우치는 실학자들의 주장이 노동을 천시한 양반들에게는 저주였을 것이다.박제가 ,박규슈..그들은 비록 서얼들이었지만 민생의 고단함을 알고 실리적인 사고를 했다.왜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 근대화에 뒤쳐졌나보면 유교가 국가를 말아먹은 것같다.일본만해도 사무라이들이 농사를 짓는데 양반은 기술직과 생산을 천시하며 글만 외기 좋아하니 한정된 관료의 자리에 잉여인구가 제구실을 못하고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라도 등과해서도 관직을 제대로 얻지못해 가난에 찌들어산다는 건 이미 그시대의 사회문제였다.지금도 많은 청춘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한다. 정조가 그들의 실용가치를 알아채고 규장각부터 등용한 것은 그 시대의 빛이었다.하지만 중인과 서얼들이 잡과로 관직에 나가 중국 청나라의 실용주의 노선을 걸으며 새시대의 분위기를 선도했지만 관습적인 사고는 크게 양반관료들과 변하지않은 것같다.  대다수 중인들은 몰락한 양반들과 통혼하며 신분상승을 꿈꾸었지만 사회개혁을 할 의지는 그만큼 없었나보다.그러한 실질적인 정책과 이론들이 불행히도 채택되지 못했지만 그러한 선각자들이 있었단 것만으로도 조선이 꽉 막힌 사회는 아니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천재들의 의견이 조선사회에 어느정도라도 수렴되고 실천되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사회를 살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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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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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일정은 일본규슈지방의 임난때 끌려가 정착한 조선인 피랍민들의 자취를 찾는 여정이다.그중에도 도자기를 구은 도공들의 발자취를 찾는다.

 우리 조상이 개척한 도자기가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심지어 천황이나 영주가에 헌상한 도자기들은 금을 입힌 그것까지 있다. 밋밋한 조선백자나 전통한국도자기에 비할 바없이 사치스럽다.어떻게 고령토도 나지않는 일본이 세계최강의 도자기생산국이 되었을까?

심지어 아직까지 많은 외화벌이수단이라고 하는데 우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없다.

그들의 도자기가 너무 화려해 우리나라백자가 싱겁기까지하다. 명청대의 도자기보다 더 현혹적이고 값도 비싼 것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초래한 건 조선이라는 나라 당사자였다.분명 우리 조상들이 본토일본인보다  재주가 더 뛰어나고 학식도 있었으리라.삼국시대부터 문물을 전수해준만큼 일본은 조선의 문화를 동경했다.도자기 ,서예,의술,천문,주자학등등...

 하지만 도공들은 조선에서 사회최하층 천민이었다. 그들을 끌고온 일본인들은 도공들을 사무라이신분에 편입시키고 대우를 해줘 도자기만 개발하게끔 배려했다.비록 그들이 우리문화재를 약탈하고 도공들을 끌고갔지만 기능공들을 대우할 줄 알았던 것이다.하지만 조선은 그들을 천대하며 대우하지않았다. 도자기외에도 세금과 여러 천역에 동원되어야하는 만큼 끌려온 이들을 데려오려 했을 때 오히려 도공들이 귀국을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선정부의 치욕스런 실수다.유교가 노동을 천시하여 조선은 상공업발달을 할 수 없었고 근대화에 뒤진 결과 식민지가 되었다. 양반은 생업에 종사하지않는다는 불문율은 사서 어디에도 없는데 무슨 근거로 도공이나 상공인들을 천시했나 모르겠다.

 눈물을 뿌리며 피랍된 그들의 터전은 척박했다. 하지만 잇속에 밝은 일본 영주들은 그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도래인내지 피랍인들이란 딱지를 떼고 일본사회에 파고들어 성공한 것도 보면 조선인들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끌려간 조선인들이 사회적 천대를 받았다는 흔적은 에도시대들어 거의 찾을 수없다.그만큼 일본인들이 동화시키려 노력했고 기능공을 대우했다는  뜻이다.물론 도공들이나 주자학자들이 귀족들의 취향에 맞춰 생산을 해내기도 하고 그들이 통치에 필요한 학설을 역설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실용지식을 존중했다는 뜻이다.

 청출어람 청어람,..조선인후예들은 일본에서 자신들의 예술을 더 꽃피웠다. 문화란 교류하며 발전한다고하는데 일본인은 섬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외래문화및 선진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에대한 민족적감정이 안좋아도 얄미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문제는 조선자신에 있었다.노동을 경멸하고 사농공상중 사에만 매달려 관리를 최고로 여긴 결과가 어떻던가는 두말않겠다.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하고 있으니...고질적인 유교의 뿌리가 문제가 심각하다. 일본이나 구미서구에서 젊은이가 그렇게 세월을 낭비하며 보내면 당장 손가락질 대상이다.일본도 사무라이들이라도 평화시에는 농사짓는 걸 당연시 여겼다.그들이 도자기외에도 화과자나 기타 손재주에 명인들이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책을 읽으며 일본에 뿌리깊이 남은 조선인들의 자취를 음미하다 우리나라는 그런 건설적인 풍토가 언제 받아들여질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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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의 로마 역사 기행
정태남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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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는 건축학도로 로마에 거주하는 보헤미안이다.이 책외에도 유럽의 문화와 역사를 다룬 책들을 여러권 냈는데 주관심은 건축인 듯하다.전공이 건축이니만큼 다소 어렵고 생소한 설명도 있다. 건축에 내가 문외한이니만큼 하지만 분명한 건 고대 로마건축들이 참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천년 전의 가도와 기초초석을 그대로 쓰다니..이런 나라는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천년 제국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그들도 시작은 테베레강변의 일곱언덕에서부터 나무오두막부터 출발했다.국력이 커지며 공공건축물들을 내실을 기해 벽돌이 아닌 대리석화강암으로 지은 것이다.

 지금 대다수남은 로마유적은 공화정의 벽돌의 로마가 아닌 제정시대의   대리석의 로마 유적이다.그전의 유적은 내내 벽돌이나 나무로 지어져 수명이 길지않아 별로 남지 않았나보다.그러나 공화정시대의 유적들도 주춧돌만 남은 터라도 부지를 다진 흔적이 엿보인다.적어도 부실공사를 하지않았다는 얘기다.

  특이한 건 로마사람들이 자손만대의 용도를 생각하고 내구성을 중시했다는 것이다.지금의 미국국회의사당의 모델이 된 판테옹을 예로 들면 이천년 전 사람들이 지금같은 설계공학을 알고 있었는지 의심스럽지만 건물을 뜯어보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아마 경험으로 습득한 지식이리라.

 로마포룸의 공공건축들의 기초초석들을   보면 그들의 토목공사수준이 보통아님을 느낄 수 있다. 외관을 치장하는 심미관은 둘째고 거리를 정확이 계산하여 홍수나 지진까지 대비해서 부지를 다지고 사방에 튼튼한 벽을 쌓아 시작한 걸보면 그들의 멀리 보는 안목에 탄복할 뿐이다.시간과 공간적인 차이를 넘어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으니..

거기에 섬세한 조각과 부조는 그 시대의 역사를 전한다.하드리아누스황제의 개선문이며 여러 분수의 조각들이 이천년전에 해부학을 알고 있었나싶을만큼 섬세하다...

 게다가 사비를 들여 공공도로 포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공익정신이란 ..현대에도 대한민국에 이런 사람이 드문데..그들의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부러울 따름이다.이래서 포에니전쟁이 승리할 수 있었나 보다.재산으을 군비로 헌납하고 아들을 전장으로 보낸 로마 시민들덕에 제국은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당시 시민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콜롯세움을 지은 황제들은 빵과 서커스만을 염두에 두고  그 장대한 건축물을 이용했을까?얼마나 튼튼하게 지었는지 근세까지 석재를 뜯어다 건축자재로 썼다고 한다.

 수천년전의 도시개발계휙이며..우리나라는 일제시대나 되어서야 도로정비를 시작했건만 그들은 이천년 전에 도로포장과 상하수도시설을 계휙하여 공공위생에도 신경썼다.로마뿐 아니라 이태리 곳곳에 그들이 남긴 수도교를 보라. 수십키로 떨어진 곳의 수원에서 물을 끌어오면서 시멘트도 없이 이런 정교한 건축물을 어떻게 지었을까?쇠로 조임새를 엮어 돌을 잇다니...툭하면 댐건설 관리나 치수사업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물난리나고 상수도오염때문에 시끄러운 현대의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확실히 대제국을 경영한 이들은 사고가 다르다. 적어도 길게 내다보고 계휙하지 않았으면 오늘날도 그 초석들이 남아있지 못햇을 것이다.미국사람들처럼 장대하기도 하지만 기초나 내구성을 중시하는 건 현대관점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부실공사로 백화점이 붕괴하는 전력이 있는 대한민국은 이런 로마인들의 정신을 좀 배웠으면 한다.

 작자가 찍은 로마 건축물들의 사진들이 휼륭해서 로마 여행을 다녀온 듯한 착각이 든다. 넥타이를 맨 보헤미안인 작자가 찍은 사진이 정말 매력적이다.야경의 로마 콜롯세움은 독자를 훌쩍 이천년전으로 데려다주는 듯하다....왜 그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로마에 남아 거주하는지 이해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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