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천재들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이덕일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엄연히 유교이며 성리학에 찌든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백년 역사속에 다분히 그시대의 반항아들,혹은 백성을 제몸같이 생각하고 사회개혁을 꿈꾼 이들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킹메이커였다. 고려시대의 불교에서 조선조의 유교로 사상적기반을 변화시킨 일이나 토지제도 개혁으로 신진 사대부와 백성에게 경작할 땅을 분배하고 다소 공산주의내지 사회주의성격이 짙은 주나라시대 정치를 회귀하려한 걸보면 그는 다분히 혁명가였다.조선의 개창은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는 그에게 운을 주지않았으니 방도전의 왕자의 난때 역신으로 몰려 제거되고 만다.천인의 핏줄이 섞여 권문세가의 멸시를 받은 그가 새왕조를 꿈꾼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군주란 권력의 양분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 있나보다.이성계를 이용하려 한 정도전은 결국 잘난 아들 방원을 이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구상한 조선의 기본건국이념은 변질되어 명나라의 조공국으로 전락했다.만일 그의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만일 그가 주장한 주나라시대 재상중심의 정치가 실현되었다면 조선이 군주독재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를 가질 수 있었을까?

 허균은 조선왕조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란 건 홍길동전이나 율도국건립을 통해 알 수 있다.임난이후 사회모순이 드러난 조선사회를 그는 한심하게 여긴 것같다.서인기득권은 정권을 유지하려고만 했고 백성의 고통은 외면했다.그러나 그의 급진혁명적인 생각이 그 시대에 허용될 리 없었다.결국 광해군시대의 정쟁에 말려 이상을 펴지도 못한채 처형되었다.

 윤휴가 북벌을 계휙하면서 호포법 주장을 이미 효종때했으나  좌절된 것은 순전히 권력기득층의 횡포때문이다. 결국 균역법은 영조때나 이루어졌다. 양난으로 민생이 피폐한 데도 권력층들이 자신들의 잇권만 따지는 건 지금도 같다.

 김육의 대동법은 조선역사에 세금의 부과를 획기적으로 통일시킨 제도였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안다는 건 김육 자신이 숙청되어 경기도광주에서 숯을 구우며 가족을 부양할 때 체험했을 것이다. 양반은 굶어도 노동하지 않는다는 사고의 시대에 천인으로 여겼던 숯굽는 일을 하며 노동을 한 그는  재상이 되어서도 민생의 고단함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정치인이 지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본디 임난이후 경기도에서 유성룡의 주도아래 시행된 수미법은 그시대에도 찬사를 받았으나 권력층의 사대부들의 반발로 결국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오죽하면 재상이던 유성룡이 수미법과 면천의 시행으로 실각하기까지했을까? 이토록 오래걸린 내막을 보면 어이없기 짝이 없다.대지주와 양반 사대부들이 경작결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한단느 것을 깨닫고 세금을 내지않으려 온갖 명분과 핑계를 대고 이미 시행된 대동법조차 폐기까지했다.그때도 양반층 기득권층 대지주의 조세저항이 극심했나보다.그 격렬한 지탄과 반대를 싸워가며 대동법을 추진한 김육도 대단한 사람이다.역대 제왕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김육처럼 민생을 돌봐주었더라면 전대통령들이 줄지어 감옥에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변덕스러운 숙종이 사대부지배층의 최고정점에서  대동법이 세금의 징수에 유리한 것을 알아채고 끝까지 법제화한 것이니만큼 온전히 백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앙정부의 착취가 덜해진 게 행운이라면 행운이다.유서에서도 노망난 대신의 말은 대동법외에 쓸데가 없다고 할만큼 김육은 평생 대동법시행에 정치생명을 걸었다.경신대기근전에 시행된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대동법으로 공납이 없어지고  공인들의 활동으로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킨 건 한편의 역사의 장이다.그러나 이런 좋은 세법도 19세기 삼정이 문란해지며 빛을 보지 못했다.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잘 운영하는 건 사람의 몫이다.

 서자들은  조선조에서 평민층의 부러움과 동시에 양반사대부들의 괄시의 대상이었다.

 정조시대나 되어야 서얼허통이 빛을 보았다. 실학자들의 생각이 유학에 찌든 양반 관료들보다 더 획기적이고 현실적이다.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다고 한 박제가나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유수원의 생각이, 노동하지 않는 양반은 먹을 수 없다고 깨우치는 실학자들의 주장이 노동을 천시한 양반들에게는 저주였을 것이다.박제가 ,박규슈..그들은 비록 서얼들이었지만 민생의 고단함을 알고 실리적인 사고를 했다.왜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 근대화에 뒤쳐졌나보면 유교가 국가를 말아먹은 것같다.일본만해도 사무라이들이 농사를 짓는데 양반은 기술직과 생산을 천시하며 글만 외기 좋아하니 한정된 관료의 자리에 잉여인구가 제구실을 못하고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라도 등과해서도 관직을 제대로 얻지못해 가난에 찌들어산다는 건 이미 그시대의 사회문제였다.지금도 많은 청춘들이 공무원시험에 매달려 인생을 허비한다. 정조가 그들의 실용가치를 알아채고 규장각부터 등용한 것은 그 시대의 빛이었다.하지만 중인과 서얼들이 잡과로 관직에 나가 중국 청나라의 실용주의 노선을 걸으며 새시대의 분위기를 선도했지만 관습적인 사고는 크게 양반관료들과 변하지않은 것같다.  대다수 중인들은 몰락한 양반들과 통혼하며 신분상승을 꿈꾸었지만 사회개혁을 할 의지는 그만큼 없었나보다.그러한 실질적인 정책과 이론들이 불행히도 채택되지 못했지만 그러한 선각자들이 있었단 것만으로도 조선이 꽉 막힌 사회는 아니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천재들의 의견이 조선사회에 어느정도라도 수렴되고 실천되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사회를 살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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