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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와 근대 - 1883년, 지식의 질서가 바뀌던 날
박천홍 지음 / 너머북스 / 2018년 3월
평점 :
우리민족은 아직까지 유교의 삼강오륜이 존재하고 유생들한테 찍히면 신문에 좌파처럼 오도되어 나는 대한민국사회의 상태에서 언제 근대문명을 받아들였는가 때론 의아하다.하지만 구한말 민중의 삶을 깊숙이 파고들어 민초들의 삶을 계몽한 것은 활자라고 생각된다.
식민지로 가는 길목의 가난한 시절을 보낸탓에 오직 배운 사람도 적고 신분의 굴레에서 양반만이 떠받들여지던 시대에도 평민들은 신문물을 열망했다. 하지만 양민에 대한 천대는 정도가 심하다고 밖에 말할 수없다.민주적인 정치관이나 민주사회를 거의 겪어보지않고 근대를 수용하기위해 선각자들은 인쇄를 이용했다. 민초들은 계몽운동으로 글을 깨치며 삶을 살아야했던 시대다 .
왜 금속활자인 직지심경을 가진 최고의 나라라고 자랑하며 근대화는 뒤쳐졌을까?일본은 이미 에도막부시대에 인쇄술을 근대화의 기반으로 이용했다.에도시대 이미 시골을 돌아다니며 인쇄된 책을 빌려주는 행상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들의 독서열을 짐작할 수 있겠다.쇄국정책을 했어도 네덜란드나 포르투칼상인들을 통해 서양의 쓸만한 문물을 도입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근대적 활판인쇄술이었다.또한 메이지유신이후 서민들은 활자를 통해 신물물을 보급받을 수 있었다.
김홍집과 김옥균 같은 개화파도 인쇄술을 근대화에 이용가능하단 걸 일찍 파악했다.현해탄을 건너온 인쇄기 두대가 남다른 것도 이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수신사일행이 소개한 인쇄의 효과를 한성순보의 발행등 관의 권력에 이용했을 뿐이다.일본은 활자의 인쇄를 국민의 계몽에 썼지만 조선은 민중의 계몽보다 권력의 하수로 전락한 것이다.비슷한 현상은 중국에서도 있었다.관보를 발행하여 황제의 권력을 강화해나갔다.그런 중국도 근대화에 뒤져 반식민지가 된 걸 보면 발명보다 이용은 인간의 사고에 달린 것같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가 소개한 박문국이 폐쇄되는 지경까지 간 걸보면 조선은 근대문물을 도입하기에 그만큼도 준비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혼란한 구한말 생존은 했지만 불우한 국내상황과 이념혼란의 갈등에 산 민중들은 그 와중에 생존에 매달렸던만큼 교육은 극히 힘들었다. 박영효같은 이들이 일본을 모방해 신교육과 문물을 도입하려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던 것도 민족적으로도 불행했다.근대교육을 제도화하려해도 민도가 따라가지 않았던 탓이다.특히 아녀자들은 교육의 기회를 붙잡기도 힘들었다. 스스로 안방글이라는 한글이나 깨치면 다행이었던 시대니....결국 문명개화운동은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정책적 제도의 부재와 민중의 낮은 민도까지 합쳐져 조선은 식민지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에도 향햑열은 계속되어 평민들은 활자를 통해 스스로를 개화시키는 수밖에 없었다.국한문체에서 순한글체를 재발견하여 현대 대한민국의 문맹률이 극히 낮은 것도 이 한글활자의 인쇄에서 비롯된 공이 크다.
결국 조선의 근대화는 상당부분 활자의 인쇄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