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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왜란과 호란 사이 - 한국사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엄연히 유교이며 성리학에 찌든 사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란의 역사속에 다분히 그시대의 반항아들,혹은 백성을 제몸같이 생각하고 사회개혁을 꿈꾼 이들이 있었다.
이이나 유성룡은 조선왜란극복의 브레인였다. 고려시대의 불교에서 조선조의 유교로 사상적기반을 변화시킨 일이나 토지제도 개혁이 유명무실해지자 양반과와 백성에게조세를 공평히할 수미법 내지 대동법을 개창하고 사회개혁 을 시도한 걸보면 그들는 다분히 혁명적인 사대부였다.조선의 정치는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는 그들에게 운을 주지않았으니 군주에게 찬밥으로 몰려 제거되고 만다.절대권력의 관점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군주란 권력의 양분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 있나보다.유성룡은 결국 잘난 선조를 이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구상한 조선의 기본이념은 변질되어 백성을 위하기보다 착취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만일 그의 수미법이 성공했다면...?만일 그가 주장한 임난극복의 정치가 실현되었다면 조선이 군주독재가 아닌 다른 정치체제를 가질 수 있었을까?
광해군은 조선왕조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란 건 홍길동전이에서만 주장한 게 아니라 실록을 통해서 그의 사고를 알 수 있다.임난이후 사회모순이 드러난 조선사회를 그는 한심하게 여긴 것같다.서인기득권은 정권을 유지하려고만 했고 백성의 고통은 외면했다.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생각이 그 시대에 허용될 리 없었다.결국 광해군시대의 혁신은 대북파의 몰락에 말려 이상을 펴지도 못한채 처형되었다.
윤휴가 북벌을 계휙하면서 호포법 주장을 이미 효종때했으나 좌절된 것은 순전히 권력기득층의 횡포때문이다. 결국 균역법은 영조때나 이루어졌다. 양난으로 민생이 피폐한 데도 권력층들이 자신들의 잇권만 따지는 건 지금도 같다.
김육의 대동법은 조선역사에 세금의 부과를 획기적으로 통일시킨 제도였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안다는 건 김육 자신이 숙청되어 경기도광주에서 숯을 구우며 가족을 부양할 때 체험했을 것이다. 양반은 굶어도 노동하지 않는다는 사고의 시대에 천인으로 여겼던 숯굽는 일을 하며 노동을 한 그는 재상이 되어서도 민생의 고단함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정치인이 지금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본디 임난이후 경기도에서 유성룡의 주도아래 시행된 수미법은 그시대에도 찬사를 받았으나 권력층의 사대부들의 반발로 결국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오죽하면 재상이던 유성룡이 수미법과 면천의 시행으로 실각하기까지했을까? 이토록 오래걸린 내막을 보면 어이없기 짝이 없다.대지주와 양반 사대부들이 경작결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한단 것을 깨닫고 세금을 내지않으려 온갖 명분과 핑계를 대고 이미 시행된 대동법조차 폐기까지했다.그때도 양반층 기득권층 대지주의 조세저항이 극심했나보다.그 격렬한 지탄과 반대를 싸워가며 대동법을 추진한 광해군도 대단한 사람이다.역대 제왕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이 그들처럼 민생을 돌봐주었더라면 전대통령들이 줄지어 감옥에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하지만 인조반정으로 병란은 피해가지못했다.반청친명은 중립외교를 이해못하고 동북아의 권력의 추가 기울어졌다.그결과가 어떤지 참혹햇는데도 조선의 사대부는 현실을 외면했다.중국과 미국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북한 ..우리의 처지를 돌아볼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