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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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은 성인 강좌 수업에서 엘리자베스 핀치의 강의를 듣는다. 닐에게 핀치의 강의는 고무적인 지적 성장을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다른 강좌생들은 그녀의 냉철한 태도 때문에 그녀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강좌가 끝난 뒤에도 닐은 핀치를 만나 주기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인연을 이어가지만, 그녀는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대한 강의를 하며 기독교 보수세력의 질타를 받고 구설수에 오른다. 엘리자베스 사후 닐은 그녀의 수업 때 완성하지 못한 에세이를 완성하고, 그녀의 오빠를 만나 엘리자베스에 대한 개인적인 행적을 참고하여 그녀의 전기를 쓰려하지만, 그녀에 관한 언론과 학계의 악평, 그리고 자신과 함께 강의를 수강했던 친구들을 마주하며 원고를 자신의 서랍에 묻어둔다.

진실에 대한 모순을 말해주는지, 아니면 결국 진실은 드러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희망을 품어주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엘리자베스의 고상함과 우아함이 좋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닐의 시선일 뿐이니, 결국 엘리자베스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카타리나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처럼 언론의 작위성에 대한 고발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는가?

"그리고 잊지 마세요. 전기나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에서도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 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 세요." 이것은 내가 따르려고 애를 써온 경험칙이다. - P23

"강요된 일부일처제란 강요된 행복과 마찬가지인데, 그건 우리도 알다시피 가능하지 않죠. 강 요되지 않은 일부일처제가 가능해 보일 수는 있어요. 로맨틱 한 일부일처제는 바람직해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첫 번째 는 보통 강요된 일부일처제의 한 형태로 다시 주저앉고, 두 번째는 강박과 히스테리에 사로잡히기 쉽죠. 또 그렇게 해서 편집광에 가까워져요. 우리는 상호 간 열정과 공유된 편집광 을늘 구별해야 합니다." - P25

"물론 우리는 이 수업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우리 자 신의 격동적이고 안달 나는 삶에서도 우연이라는 요소를 고 려해야 해요. 우리가 깊이 만나는 사람의 수는 이상하게도 적어요. 열정은 우리를 맹렬하게 현혹하기도 합니다. 이성도 똑같이 현혹할 수 있죠. - P32

그러나 나는 곧 린다가 사 실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아니, 자 신이 이미 하기로 한 행동과 일치할 때만 내 의견을 들으려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식이다. 아니, 대부분이 그럴 것이 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입장을 바꾸 어 그녀의 계획을 지지했다. - P36

많은 경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더 진실하고 깊은 생각을 낳기보다는 하나의 통념idke reguc을 다른 통념으로 대체 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라는 것- 그렇다 해도 그 과정은 그 자체로 귀중했다. - P39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오염 이라는 관념, 그와 더불어 성에 대한 누그러들지 않는 죄책 감을 인정하고 강조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밀려났습니 다. 이런 교리 분쟁의 결과를 상상해 보고 또 아우구스티누 스가 승리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 P46

르낭은 나라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나라가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기 위해 항 상, 매일, 작은 행동과 생각, 또 큰 행동과 생각에서 우리 자 신을 속여야 해요, - P63

"역설적으로 젊은 사람일수록 자기 확신이 더 강해요. 그들의 야망은 외부인의 객관적인 눈에는 모호해 보이 지만 자신들에게는 선명하고 성취 가능해 보이죠. 반면 성인 의 경우… 일부는 그저 즉흥적으로 등록하기도 하지만 대 부분은 삶에서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와요. 자기가 뭔가 놓 쳤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그런데 이제 상황을 바로잡을 기 회-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기회-가 왔다는 느낌. 나는 그게 대단히 감동적이라고 생각해요." - P71

"정상이라는 게 좋다는 뜻은 아니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탓할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볼 수가 있잖아요."
"예를 들어?"
"투표로 그 자리에서 쫓아내거나."
"정부를 바꾸면 달라지리라는 건 되풀이되는 망상이에요."
"그건 절망에서 나온 조언이죠."
"아니, 현실주의에서 나온 조언이에요. 내가 절망한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하지만 선생님이 선거 때마다 투표했다는 것도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게 효과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하는 거죠."
"그런데 왜 투표를 하나요?"
"시민의 의무. 그렇게 기대되고 있으니까." 그 지점에서 나는 약간 열을 받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심 쓰는 척하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누구한테?"

그·••· 어, 나머지 유권자한테.
"내가 그들의 희망이나 꿈과 그 이후의 실망을 완전히 공 유해야만 한다는 건가요? 정치가의 주요 기능은 실망을 주 는 거예요."
"그건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소적으로 들리고요, 아시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냉소주의자가 아니에
요"
"그럼 뭔데요?"
"나 자신에게 어떤 딱지를 붙일 만큼 허영심이 크지 않아
요. - P73

그녀를 신중하게 사랑했다는 거다. 삼가면서, 또 무겁게. - P240

현대 이슬람교 순교자들은 축복받은 변화의 순간에 불신 자를 최대한 많이 데려가려 한다. 기독교 순교자들은 설득력 이 뛰어나 순교하기 전에 다른 많은 사람을 개종시키고 그들 에게 천국으로 가는 줄에서 새치기를 하라고 촉구했다. 어느 쪽에서든 나는 "죽음을 향한 그런 욕망은 거의 육욕과 같다" 라는 EF의 말을 기억했다. - P245

이 모든 것에 처음에는 낙심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것 을 받아들인 뒤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신학자들은 훌 륭한 소설가도 될 수 있다. 둘째로, 종교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나는 또 성 우르술라의 그 뒤의 삶 에 관해서도 더 알게 되었다. 12세기 초 쾰른은 옛 도시의 성 벽 너머로까지 넓어졌는데, 이때 땅을 파는 과정에서 엄청난 해골이 묻혀 있는 거대한 매장지가 드러났다. 이 도시는 이 미 순례의 목적지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고고학(너무 앞서 나간 표현이기는 하지만)이 종교적 역사를 아름답게 확인 해 주었다. 게다가 비둘기 한 마리가 기적적으로 그 지역 주 교에게 어느 것이 성자의 유해인지 정확히 가리켜주었다. 수 많은 유골과 머리뼈 600개가 특별히 건설된 성 우르술라 교 회로 옮겨졌다. 이 위로가 되는 증거- 알프스산맥 북쪽에서 가장 큰 매장지-는 수백 년 동안 기독교 관광업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DNA 검사의 시대가 왔을 때 이 뼈들은 약 2천 년이 된 것으로 드러났고, 따라서 이 유적은 옛 로마의 매장지라는 게 다수의 의견이 되었다. 그러나 방 문객들은 낙담하지 않고 여전히 순례자처럼 이 가짜 유물을 보러 온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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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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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여수에서 두 딸과 동반 자살을 한 아버지 사이에서 살아남은 정선이 서울에서 룸메이트를 구해 서울역 여수발 열차에서 발견된 고아 자흔과 함께 산다. 하지만 정선의 결백증은 계속 자흔에게 상처를 주었고, 자흔은 정선을 떠난다. 여수의 다도해 바다를 보았던 때 자신의 고향을 여수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자흔이 자신을 떠나자 정선은 자신의 고향 여수로 향한다.

<어둠의 사육제>
7자매의 셋째인 영진은 상고를 졸업하자 마자 서울로 상경해 학비를 마련하여 영문학과에 진학해 번역가의 꿈을 꾸는 청춘이었다. 서울에서 같은 고향 언니 인숙을 우연히 만나 모아둔 돈을 합쳐 반지하 전셋방을 구해 살았으나 어느날 인숙이 전세금을 빼서 달아나 갈곳이 없어진 영진은 부유한 이모의 아파트에 얹혀살게 된다. 인숙언니에 대한 배신감과 이모집 살이의 갖은 멸시를 당하며 오기로 세상살기를 배운 영진은 맞은 편 동의 명환에게 자신의 집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명환은 신혼부부였으나 교통사고로 임신한 아내는 죽고, 자신은 한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게 되었고, 가해자에게 보상금을 받았으나 억울함과 분노로 가해자의 아파트에 이사와 그들 가족에게 심적인 복수를 하였고, 가해자 가족이 끝내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 자신의 삶의 동력을 잃고 자살하려는 남자였다. 영진은 그러는 와중에 자신의 전세자금을 빼돌린 인숙언니가 간암에 걸려 치료비를 마련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인숙도, 명환도 결국 다 죽을 것이라 생각한 영진은 이모의 아파트로부터 달아나려 필사적으로 월셋방을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영숙이 이사하기 전날 명환은 영숙의 이모집 배란다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싶다는 부탁을 하고, 영숙이 이사하는 날 명환은 자신의 아파트에 떨어져 자살한다.

<야간열차>
삶에 큰 의지가 없는 영현은 자신이 어울리던 무리의 친구 중 한 명인 동걸과 우연한 인연으로 여러 전환점을 맞는다. 영현은 술에 취해 동걸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되면서 동걸이 아픈 자신의 몫까지 우유배달을 했던 날 쌍둥이 형제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책임지며 후암동의 단칸방에서 가장으로 살고 있는 것을 알게된다. 자신과는 다르게 매사에 성실한 동걸이 매번 술에 취하면 동해로 가는 야간열차를 얘기하는 술버릇이 있었는데, 영걸에겐 그 야간열차는 자신의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수단이었던 것을 알게되었고, 정작 술친구들과 함께 야간열차를 타자고 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도 알게된다.
훗날 역시나 가장 늦게 취업을 한 영현은 우연히 영걸의 여동생을 마주치고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며, 세상이 많이 변해가고 있음을 인지한다. 회사 회식이 늦게까지 이어지고 늦은 밤 귀가한 영현은 오랜만에 영걸이 벽제에 함께 가달라는 부탁을 무시하고, 다음날 계속 연락을 취해보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던 영걸은 며칠 뒤 떠난다며 청량리도 마중나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쌍둥이 동생의 죽음을 예감하던 영현은 동해로 가는 영걸을 배웅한 뒤 무작정 영걸이 탄 기차에 뛰어 오른다.

<질주>
인규는 자궁에 물혹이 생긴 어머니가 수술이 두려워 미루다 입원한 사실을 알게된다. 인규의 친아버지는 그가 11살 때 농약을 먹고 자살했고, 어머니는 돈만 밝히는 남자와 재혼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 인규의 동생 진규는 7살 때 동네에서 애들에게 구타를 당하다 죽었다. 진규가 죽고 난 뒤 의붓 아버지와 어머니는 딸을 낳았고, 진규의 모든 흔적을 없앤 어머니에게 서운한 마음과 의붓아버지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며 살아왔다. 진규를 죽인 아이들에게 복수를 한명 한명 해나가던 인규는 마지막 대상이 복수를 하기도 전 자신을 바라보다 2층에서 뛰어내리자 더이상의 복수를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인규는 가족과 소원하게 지내고 자신의 비정함을 오직 달리기를 통해서만 달랠 수 있었다. 인규는 어머니가 입원하기 전 마지막 통화에서 진규를 다시 낳고 싶다며 진규를 향해 돌아오라며 울부짖었는데, 자신만이 진규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게 아닌 것을 알게되자 당황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달려간다.

<진달래 능선>
정환은 화목한 집안과는 거리가 먼 황씨의 집이 되레 마음에 들어 월세를 계약한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에 따르면 황씨는 딸이 심장병을 앓는 중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도망을 가 그들을 찾아다니다가 딸도 결국 3년 전에 죽고 혼자 정원의 나무를 뿌리째 뽑아 태운다는 것이었다. 정환은 반푼이 동생 정임과 매맞는 엄마, 폭력적인 아버지를 버리고 객지를 떠돌다 양부를 만났고, 이등병 때 양부의 장례식에 찾아간 뒤 자신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 가족들을 찾았으나 동사무소에서 아버지가 십오년 전 사망한 것만 알았을 뿐 다른 가족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집터 근처에 숙모를 만나 정임이의 중학교 졸업사진을 받게 되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정임과 어머니를 찾았으나 그들을 찾진 못했다. 황씨가 밤마다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정환은 황씨에게 관심이 가 말을 걸어보지만, 황씨는 절대 정환을 상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환은 뿌리째 진달래 나무를 태우던 황씨를 말리다 얻어 맞는다. 황씨는 정환에게 자신의 딸이 진달래를 좋아했다며, 딸이 있는 곳으로 가 진달래가 피어나길 바란다고 말한다.

<붉은 닻>
동영이 제대하자 동식의 어머니는 다 같이 소풍을 나가자고 제안한다. 아버지가 어릴 때 물에 빠져 죽고, 동생은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아이와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들이 살던 동네는 사립재단이 사기를 쳐 몰락해버린 옛 학교 터 근처에서 문방구를 계속하며 지냈고, 동식은 허약한 몸 때문에 군 면제를 받고, 내성적인 동영은 안개같이 떠돌다 입시에 실패하고 군대를 갔다 온 것이었다. 전역한 날 역시나 동영이 사라지고 다음날 돌아온 도영과 셋은 일요일 같이 갯가로 소풍을 나선다. 정착하지 못한 아버지와 동영, 그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과는 다르게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싶은 동식이 함께.

"넌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지? 좋은 방향만, 아주 잘되어 나갈 것들만 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언제나 나쁜 쪽만 생 각해. 내 인생도!"
인숙언니는 바르다 만 립스틱을 허공에 휘두르며 외치고 있었다. - P81

그곳에 눌러살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유난히 추운 겨울이 지날 때까지만 몸을 의탁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모의 대답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한나절 동안 뺨을 깎는 추위에 시 달리다가 안온한 아파트의 내부에 들어설 때부터 나는 눈물 을 참고 있었다.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에 나는 굴 욕을 느꼈다. 자신이 눈물로 동정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에는 더한 굴욕을 느꼈다. - P88

그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 중년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 꼈던 것이었다.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 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 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 P92

대학 입학금이라고도 독립 자금이라고도 딱히 이름 붙이지 않은 적금을 다시 붓기 시작 했을 때 나에게 희망 따위는 없었다. 그 대신 인숙언니에게서 배운 오기가 나를 버티어주고 있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얼 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였는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 P95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 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 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진짜 삶이 과연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 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때 인숙언니는 떠났다.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버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 P115

그 무렵 나는 모든 것에 실망하고 있었고 그 실망을 견디기 위해 모든 것을 빈정거리고 있었다. 나에게 정열이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것을 부려둘 데가 없었다. 정열 이 달구어질수록 나는 그것을 짐스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내 보일 수 있는 행동은 술을 마시는 일과 친구들이 놀랄 만한 냉 소적인 농담을 적시에 내뱉는 일뿐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겉늙었다고 말했다. - P150

우리는 어 느새 한 걸음씩 물러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 P187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만 서식한다는 말이 맞다면, 진규는 인규의 죽음과 함께 영원 히 죽어질 영혼이었다. 그때에야말로 진규의 죽음은 완연해질 것이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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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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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가 기억하는 정원은 마치 꿈만 같았다. 유대인 학살 후 페라라의 지주였던 피치콘티니가의 사람들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인종분리법이 막 시행될 때쯤 화자가 기억하는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던 핀치콘티니가에서의 가슴 졸이고 애태우던 여인 미콜과의 애잔한 기억들. 알베르토의 초대로 브루노, 아드리아나, 말나테와 함께 테니스경기를 하던 추억들. 미콜에 대한 불타는 욕망과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수치스러워하던 패기와 열정들. 그런 추억의 긴장감은 인종법 시행으로 유대인들을 혐오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더욱 증폭되어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후에 모든 것이 끝난 뒤, 미콜에 대한 그의 열망이 말나테와 미콜의 관계를 눈치채며 싸하게 식어갔던 것처럼, 그 긴장감이 더 급하게 냉각됐고, 허무했다.

핀치콘티니가의 에르만노교수와 올가부인의 자녀들인 알베르토와 미콜은 부유한 유대인 집안의 자식들로 개인 교습을 받아, 공립학교에 다니는 화자와는 연결점이 없었다. 어느 날 수학에서 낙제한 화자는 안젤리 성벽에서 우는 모습을 미콜에게 발각된다. 그때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비밀의 문을 알려준 미콜과 인연이 시작되었으나, 알베르토는 밀라노로, 미콜은 베네치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잠시 왕래 없이 지냈다. 그러다 인종법이 시행되면서 자신들이 다니던 테니스클럽에서 제명당하자, 알베르토의 초대로 화자는 핀치콘티니가의 테니스장에서 여러 친구들과 테니스를 치며 핀치콘티니가와 다시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다. 미콜과 정원을 걸으며 점차 미콜에게 감정이 생기지만 미콜은 화자를 친구로 남기를 바라며 경계한다. 미콜이 베네치아로 논문을 마치러 간 사이, 알베르토와 화자는 알베르토의 대학 친구인 말나테와 셋이 핀치콘티니가에서 문화와 정치에 대한 토론을 하며 친하게 지낸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미콜에게 충동적으로 들이대고 난 뒤 미콜의 접근 금지 조치를 받은 화자는 핀치콘티니가를 잠시 멀리했고, 말나테에게 미콜과 있었던 일을 토로하며 가까이 지낸다. 그러다 화자는 안젤리 성벽에서 말나테와 미콜이 연인관계였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녀는 습관대로 ‘부정하고‘라는 글자 하나하나에 강세를 주어 말했는데, 일종의 씁쓸한 자부심 같은 게 훨씬 더 많이 담겨 있었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자기를 다소 지나치게 과대 평가해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서 자기는 잘못이 없 다는 걸 증명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건 물론이고. 그렇지만 그녀는 내 눈에서 언제나 ‘이상주의‘를 읽어냈는데, 그로 인해 어떻게 보면 내 눈에 자기가 실제보다 훨씬 근사하게 비쳤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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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 쌓일 만두 하지? - 일상의 빈틈을 채워주는 세상의 모든 지식
팀 교양만두 지음 / 다산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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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재밌다.

왕실의 사위를 가리키는 부마라는 말은 부마도위라는 관직에서 유래했습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 차할 땐 혹시 모를 암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운행하는 예비마차를 관리하고, 탑승하는 직책이었죠. 이는 왕의 생명과 관계된 중요한 기밀이었기 때문에, 중국 서진의 세조 때부터 왕실 가족인 사위를 임명하는 전통이 시작 됐습니다. - P30

이런 경향은 조선 후기 성리학 질서가 강화되면서 달라졌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시댁에서 사는 ‘친영제‘가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유산도 남성 특히 장남에게 집중적 으로 상속되기 시작했죠. 또한 여성은 외출할 때 쓰개치마나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 야 하는 등 일상생활의 규제도 생겨났고 재혼도 금지되었습니다. - P38

스페인 독감이라고 하면 발생국이 스페인일 거라 생각 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각국의 정보가 엄격하게 통제된 반면, 당시 중 립국이었던 스페인은 정보가 통제되지 않았죠. 이 때문 에 전염병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갔고, 결국 스페인이 발 생국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게 됐습니다. - P95

달리는 작품에 에너지를 쏟는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자신 을 알리는 데에 쏟았습니다. 그의 도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함께 활동하던 초현실주 의 그룹에서 제명당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런 행동들로 더욱 유명해졌 습니다. 요즘 말로 ‘기믹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하는 특이한 전략, 또는 그 전략에 이용되는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까요? - P121

차라리 인플루언서로 살았으면 본인한테도 좋 았을 텐데•••. 연산군은 노래와 춤도 무척 즐겼다고 해.
특히 처용무를 잘 췄는데, 그냥 자기만 춤추고 논 게아니라 전국에서 제일 춤을 잘 추고 예쁜 사람들을 모 아놓고‘흥청‘이라고 불렀어
흥청망청 - P184

오, 안 그래도 우리가 자주 쓰는 ‘박스 오피스‘라는 말 이 오페라 극장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어. 오페라 극 장에 가면 측면에 튀어나와 있는 공간이 있잖아. 그걸
‘박스석‘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이야 누구나 예약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특권층만의 공간이었지.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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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해피 엔드 소설Q
이주란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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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는 어느 모임에서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던 어린 시절을 토로하는 자신에게 공감해준 원경과 빠르게 친해진다. 서로에게 누구보다 가깝고 서로를 위해주고 이해해 준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어느날 원경의 다소 무례한 발언에 상처와 모욕을 받고 관계가 소원해졌다. 원경의 연락에 답장을 하지 못하던 기주는 자신의 회사에 다소 특이한 유튜버 장과장에게 동행을 부탁해 원경이 운영하는 카페에 찾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원경은 카페에 없었고, 원경의 어머니와 동생을 보고온 기주는 결국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원경에게 왜 이해받으려 했었는지 성찰하며 돌아온다.

기주의 주변 인물들도 기주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자신을 떠나 보내려는 어머니, 장과장에게만 친근한 가니, 옷을 전부 빨아버려 한여름에 기모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장과장. 하지만 기주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고통받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친한 사람은 쉽게 자신을 이해해 준다는 착각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기주의 마음은 나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그날 원경으로 인해 가까워진 원경의 친구들 앞에서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진정하라는 원경 의 말에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고 갑자기,라는 말에 절망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이후 1년 동안은 하루의 많은 순간에 문득 원경을 떠올렸던 것 같다. 아니, 원경이 아니라 수치심과 절망감만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 다. - P7

원경의 메시지에 답하지 못한 채로 1년 정도가 지나서야 나는 종종 원경의 말대로 내가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 을 인정할 때가 있었고 앞으로 나 자신이랄지 가까운 사람들에겐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내게는 누군가를 잃는 것보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나에 대해 솔직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게 더 두려웠다. 상대가 이해해줄지 아닐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얼마만큼 솔직할 수 있는 걸까. - P20

화를 낸 이유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결국 침묵을 택했던 것. 입을 꾹 다물고 네 사람의 시선을 견디며 지금 내 침묵이 원경을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끝까지 입을 떼지 못했던 것. - P20

공존하기 어려운 것들을 바랄수록 인생은 고단해질 것이다. 나는 고단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므로 되도록 무엇인가를 바라고 싶지 않다. - P27

그러니까 이런 모든 생각들이 때로 무의미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이유는, 종종 무엇도 바라는 것 없이 마음 이 좋을 땐 지난 일들과 현재의 나 사이에 별다른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미 일어난 일은 영원히 그때 그대로라는 것. 나는 어떤 일을 같이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 이 모두 다른 걸 볼 때마다 사실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것인지 종종 의문이 들고는 했다. - P57

기주씨,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될 거예요.
열린 방문 틈으로 장과장이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나는 장과장의 말을 반만 믿기로 했다. 반을 믿지 않는 것 이 아니라 반을 믿기로. - P74

나는 왜 그토록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했을까. 기쁨이나 슬픔은 그렇지 않은데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오래되고 깊은 마음들은 왜 꼭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했는지 잘 모르겠다. - P95

가장 깊은 곳에 가려둔 마음들을 곧 마주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원경과 가짜 화해와 멀어짐을 반복하 던 그해 여름의 끝에서. - P95

하지만 어쩐지 슬픔은 나누거나 더하는 연산이 통하지 않는 신통한 모양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으레 함 께 머무르려 하는 친근한 정령 같았고, 어쩌면 한데 어울리는 동안 우리도 슬픔의 성질을 조금은 알게 된 것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픔은 사람의 안과 밖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또 반대 로 어떤 마법 같은 순간에 이르면 제 스스로 무너져 세상의 한겹 밖으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는 것 을요. - P96

타자의 행복에서 자신의 불행을 발견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보통의 생활은 기주 가 가진 기억과 감정의 틈입으로 긴장되기도 하고 마비되기도 합니다. 기주의 현실은 기주의 마음속에서 타인 들이 모르는 모습으로 변형되고 왜곡됩니다. - P98

기주가 그토록 마주하려 하고 또 도망치려 했던 끝은 다른 어디도 아닌 기주 안에 있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그 일을 다시 마주하는 일. 스스로 고통스럽게 그 일을 다시 쓰는 일. 계속해서 멋대어진 여러겹의 엔딩이, 그 입 체적인 시공간이 소설의 여정을 동행한 우리의 엔딩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결론지을 수 없어 맹렬히 사로잡혔 던 기억 위에 더해지는 기억. 변형되고 왜곡되어서야 겨우 제대로 마주볼 수 있게 된 우리의 약한 마음입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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