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 - 책망과 옹호, 유죄와 무죄 사이에 서 있는 한 판사의 기록
박주영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데 이건 좀 도덕을 숭상하는 느낌이고, 내가 느낀 법을 표현하자면 가장 ‘하급의 도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법이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할 거라는 미신이 일반인들을 재판 결과에 분노하고 허탈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내가 이런 생각에 머물러서 그런지 저자는 좀 사랑이 넘치고 지나치게 감수성이 풍만한 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소중한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고결하기때문이 아니다. 사랑은 실용적이어서 중요하다. 사랑은 무관심과 질시와 모욕과 폭력을 없애는 백신이나 해독제 같은 것이다. 증오가 왱왜거리며 삶을 위태롭게 할 때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지만, 그들 사랑은 이미 바닥나버렸다. 사랑은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폭력만이 무너진 가장의 위신을 세우고 가정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믿는 아버지는 밥상을 뒤엎다가 급기야 망치를 들어 아내와 딸을 때리고 칼로그들의 얼굴을 그었다. 장르는 극적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동화는잔혹동화가 되고, 어느새 하드보일드가 되었다. - P22

상대가 아무리 숱한 악행을 저질러도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 쉽게 포기하고 용서한다. 평온한 삶을 지속하고 싶은 관성은 이성이라는 브레이크를 마모시키고 무력화한다. 상처를 얼기설기 봉합하고 활시위처럼 재빨리 일상으로 되돌아오지만, 그 복귀의 탄성에날아간 화살은 각자의 가슴 깊숙이 박히기 마련이다. - P24

두 번째 사건은 죄질이나 B의 범행 전후 정황을 고려해보니 양형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소아마비에 가벼운 지적장애까지가진 채 가족과 세상에서 소외돼 힘겹게 살아온 피해자에게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B를 무겁게 벌하는 것이 과연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조치인지 고민됐다. B로부터 겪을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신체나 생명의 위협보다, B의 부재로 지금 당장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소외와외로움이 피해자에게는 더 감당하기 어려운 건 아닌지, 신산스러운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피해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가정폭력으로부터 구호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품어줄 수 있을 만큼 사회가 성숙했는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고민을 거듭했다. - P25

"나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재판은 진실을밝히는 곳이 아니다. 재판은 모아들인 증거를 갖고 피고인의 유무죄를 임의로 판단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유죄가 되었다. 그것이 재판소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고 절규하는 스물여섯 가네코 텟페이(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가 있을 수도있다. 한 사람의 무고한 범인을 만들면 안 된다는 법은 언제나유효하지만, 판사는 한 사람의 억울한 피해자를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 P33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 선악은 양형에 다소참고될 뿐이다. - P38

피해자들이 아프게 지적하듯, 형사재판절차는 기본적으로 피고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즉흥적이고 흉포한 절대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 수많은 이가 피 흘려 쟁취한 투쟁의 결과물이다. 근대 형사재판절차의 목표와 지향점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가치다. 누구나 형사피고인이 될 수 있고, 형벌권을 발동한 국가에 맞선 한 개인의 인권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의 절차적 권리가 무너진곳은 야만과 문명의 경계가 사라진 곳이다. - P40

오랜 시간 법정에서 각양각색의 탐욕을 관찰하다 보니 탐욕의속성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법정에서 바라본 탐욕은 버라이어티하고 전방위적이며, 디테일하고 치밀하다. 탐욕은 포기를 모르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대부분 눈매가 선하다. 탐욕은 위선적이고게걸스럽다. 백무산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놀이동산 대기줄을 길게 하고 급행 티켓을 팔아먹고, 포경을 금지하고 고래고기를팔아먹고, 유전무죄를 만들어놓고 전관예우를 팔아먹고, 전관예우를만들어놓고 현직을 팔아먹고, 법을 만들어놓고 탈법을 팔아먹는, 무한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다(<주인님이 다녀가셨다>,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2012) - P54

그 영상에는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성전환자도 없었다. 그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밥벌이가 힘겨운 고단한인생들이 있을 뿐이었다. 혐오는 대부분 관념에 정주한다. 혐오의 대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보면 혐오가 얼마나터무니없는 편견에 근거한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 P72

강만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산재사건에서는 형벌도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기업이 크면 클수록 그 기업의 최고책임자에게까지 산재사고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정말로 고래는 빠져나가고 피라미만 걸리는 이상한 그물이다. 그 그물을 들고 있자니 피라미 보기가 참 민망했다. - P93

이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편견은 진영을 만들고, 진영 속에서 강화되어 차별과 혐오를 낳는다. 집단 혐오는 사적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 집단을 혐오하는 다른 집단을 만들어낸다. - P103

연민으로 내민 손은 이처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즉시 회수된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윤리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타인의 고통>, 이후,2004). 밥차나 노숙인 쉼터나 매달 내는 후원금은 동정이든 연민이든어떤 이름으로도 시작할 수 있고, 즉흥적인 시도여도 소중하다. 그러나 법의 영역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위험하다. 인권은 시혜가 아니기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법적 보호를 시혜라고 보면, 그 시선은 언제 철회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 P107

법은 표적 항암제가 아니다. 법은 고전적 수술법이고, 판사는 메스를 든 외과의다. 아무리 숙련된 판사라도 핀포인트로 암세포만 골라서 잘라낼 수는 없다. 법은 개개인에게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가 밉다고, 흉하다고, 거슬린다고, 사회나 국가에 아무런 도움이안 된다고 도려내면 건강한 조직까지 뭉텅 잘려나간다. 우리는 모두어떤 기준에서건 소수자고, 어떤 이유에서건 사회의 암적인 존재일 수 있다. 법으로 소수자를 제거한다는 건 어떤 기준으로 잘라내느냐, 누가 집도하느냐에 따라 잘못하면 내가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 P113

당시 재판장은 "내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고 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없다‘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는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심리상태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설명했다. 피고인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 P168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1980)에서 "생의 저녁에 이르면 얼마나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사랑받고 사랑한 기억보다 더의미 있는 것이 또 있을까? - P173

과연 무엇이 바르고 곧은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본성‘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라 했고,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칸트는 ‘도덕적인 사람이행복해지는 것‘이라 했고, 존 롤스는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 자유를평등하게 주되, 사회적·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있을 때는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주는 것‘이라 했고, 마이클 샌델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고, 로널드 드워킨은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living well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론을 깊이 들여다본 바 없고, 주마간산으로 읽은 정의론이라 오독일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이론도 대충 알았다 치고 사례로 바로 넘어가보자. - P2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