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은희경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5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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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이미 이루어 졌거나, 혹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냉소적인 어린아이를 통해 평범한 인간 군상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 소설인가 싶었는데 마지막 해설의 한 글귀를 보고 마음을 풀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나로 하여금 내 몸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나‘ 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 P23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약점이 생기고 어리석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애는 결국 내 마음을 끝까지 붙들지못했다. 그런데도 그애에 대한 장군이의 질투심은 같잖게도 꽤 집요한 것이었다. 나와의 관계를 견제하는 부질없는 질투심이기도했지만 반장이 갖추고 있는 조건을 질투하는 열등감이기도 했다. - P52

그날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하며 장군이 엄마는 광진테라 아줌마를 상대로 한참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모의 월남치마를 두고 폭이 좁다, 무늬가 요란하다, 하면서 한바탕 참견을해대더니 이왕 나온 월남 이야기를 얼마 전 월남에서 돌아온 자전거포 작은아들로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안됐어. 다리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시집올 처녀나 있겠어?"
이렇게 동정하는 척하면서 불운을 강조하는 것이 남의 험담에이력이 붙은 장군이 엄마의 요령이다. 거기 비해 성품이 순박한 광진테라 아줌마의 대꾸는 언제나 솔직하다. - P63

"쪼꼬만 게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책가방 좀 봤다고 저 야단이야" 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이모의 행동이, 스스로도 떳떳지 않다고 생각한 행동을 현장에서 들켰을 때 어른의 권위를 되찾는 마지막 방법으로 택한 뻔뻔스러움이란 걸 알긴 하면서도 지금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온 배달부나 자문관의 권위를 잃은 나는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그 상처 위에는 억지로 딱지가내려앉았다. 쪼꼬만 게 어쩌구 하면서 꽝 닫고 들어간 바로 그 방문을 황급히 도로 열고 이모가 쏟아질 듯 방에서 뛰쳐나오며 아직까지 상한 자존심에 대한 정리가 끝나지 않아 마루 앞에 그대로 서있는 내 목을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이 꼭 끌어안았던 것이다.
이모는 정말이지 제멋대로 행동했다. 이모의 머릿속에서 세상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를 알아볼 줄 모르는 사람, 두 부류로만 나뉘었다. 또 세상일은 언제나 사랑과 미움 두 가지뿐이었다. 따라서 그런 몇 가지 생각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이모의 행동에 사려라고는 있을 수 없었다. - P85

그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다시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에서 나는 슬픔을느꼈으며 그런 슬픔이 나에게 약점을 만드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나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를 원치 않았다.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나는 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교과서가 효심을 고취시킨다는 목적으로 한 단원쯤은 반드시어머니의 사랑을 환기시키고 모든 동시와 동화가 어머니를 아름답고 그리운 존재로 찬미할 때마다 나는 찢어진 치마 사이로 땟국에 전 다리가 내비치던 장터의 미친년을 떠올렸다. 그때 비로소 죄의식이나 공포 같은 강력한 것보다 그리움이나 사랑 따위의 보드라운 것을 이겨내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 P158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 P164

아이들이란 쉽게 패를 짓고 그것을 공통된 정서로 묶어서 세勢를형성하기를 좋아했으므로 누구를 괴롭힌다는 데 신이 나서 그렇게짓궂은 반복음률을 만들어내 남을 놀리곤 한다. 나는 그런 데에 한번도 끼어본 적이 없다. 아이들 특유의 그런 하찮은 위악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 P167

(나는 ‘내 자랑이 아니라‘로 시작되는 노골적인 자랑과 ‘남의 험담 같아서 안됐지만‘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험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P200

할머니는 이모에게 무언가를 허락할 때 활짝 웃으며 "이 시간 이후는 그렇게 해라, 어때 맘에 드니? 좋지?" 라고명명백백하게 말하지 않고 꼭 절대 마음이 바뀔 리 없는 사람의 완강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 마음대로 해라" 라거나 "반대는않겠다"는 식의 미필적 고의 혹은 비판적 지지의 형식으로 표현하곤 한다. - P262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의해 완성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나는그것을 광진테라 아저씨 박광진씨를 통해서 알았다. - P275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 P301

한참 동안 혜자 이모는 진흙땅 위에 무릎을 꺾고 엎어져 소리죽여 운다. "현석아" 하면서 현석 오빠의 어깨를 끌어다 함께 우는데 솥단지며 곤로며 화장품이 어지럽게 널려진 진흙땅에 엎어져 우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하기는 하지만 한편 상처입은 영혼들처럼 순결해 보이는 점도 있다. - P325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그러나 우연은 많다. 아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공교롭게도 모두 우연이 해결한다.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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