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 약간 인간상실에 관하여 카뮈의 느낌이 묻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카뮈의 작품에 통달한 사람은 아니지만.....) 편혜영의 소설은 장편인 ‘홀‘을 본 거랑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저녁의 구애‘ 한 편을 본 것이 다였는데 그동안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렇게 비관적인 세계관을 그리는 작가는 딱 내 스타일인데.
해설을 참고하자면 문명은 동일성의 지옥이라는데, 동일성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개인들을 그리는 과정에서도 그 시스템을 만든 기성권력에 대한 고발도 부각 되고 있다. ‘토끼묘‘에서 인사발령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잠시 언급이 되고, ‘정글짐‘에서는 출장의 과정에서 상사가 주인공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자조적인 화법으로 대화한다는 점, 또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에서 두 주인공들이 목적의식 없이 하루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명 속의 개인들이 일상적으로 수용하게되는 권력의 압박과 주체성의 상실이 드러난다.
다만, 솔직히 내용적인 측면에서 독자들이 쉽게 몰입할 만한 분노유발장치는 은연히 숨겨놓고, 그냥 불쾌하기만 한 반복적이고 의미 없는 인생에 집중하는 글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작가의 스타일이니까.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인사 발령이 나 있었다. 인사에 있어서 사전 협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은 조직 내에서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통보만으로 충분한 존재였다. 그가 이번발령을 통해 깨달은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P17

그는 무엇보다 근태에 있어서 성실했고 업무 시간을 효율적이고 밀도 있게 사용하는 선배였다. 직장 생활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배가 그에게 모범이 된 것은 틀림없었다.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을 일러준 사람이 선배였다. 정보가 통용되는 방식,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흉이 되는 소식이라면 얼른 퍼뜨리고 다른 사람에게 득이 되는 소식은 혼자서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 사람도 선배였다. - P21

김은 그 일로 우정이라는 것은 애정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이거나 유익할 때에만 유효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일을 되새기는 과정이 그렇듯 과거의 어떤 일이 미친 결과나 상처는아무런 파동 없이 떠올랐고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새 시간이훌쩍 지나버린 것에 대한 서글픔과 뻔한 회한만 남았다. - P40

앞으로 여자와의 통화는 더 드물어질 것이고간혹 이어지는 만남은 지루할 것이고 말투는 무뚝뚝해질 것이며 웃을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럴수록 여자는 더 자주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소홀하고 무관심한 김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서운함과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울컥하여 화를 내고 얼마 후에는 화낸 것을 사과할 것이다. 그런일이 얼마간 반복되다가 나중에는 오로지 마음을 되받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며 김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 모든 일을 되풀이할 정도로 김을 사랑하지 않으며 어쩌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허탈해질 것이다. 김으로서는 그순간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그때비로소 여자에게 애틋함을 느끼게 될지도 몰랐다. - P57

을 덮었다. 결국 타인과의 완벽한 친밀감이란 동경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타인과 최소한 2미터 이상의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는 복사실의 카운터와 쉴 새 없이학생이나 강사 들이 지나다니는 복도까지의 거리가 대략 2미터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 거리는 복사실을 찾는 사람들과 그사이에 놓인 카운터의 가로 길이와도 같았다. 누구도 카운터너머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 P74

구내식당의 정식 A세트를기준으로 그의 하루는 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오전과 오후뿐만이 아니었다. 자정을 기준으로 하면 어제와 오늘이, 주말을 기준으로 하면 지난주와 이번주가, 연말을 기준으로 하면 작년과 올해가 같았다. 그러므로모든 미래는 과거와 동일한 시간일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같듯이 미래는 현재와 같을 것이다. 언제나 같다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언제나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거둬들였다. - P83

"자네가 하필 이 시기에 출장을 떠나는 건 회계 시스템을 바꿔야 하기때문이야. 불가피한 일이지. 그렇지? 두 도시 담당자가 바쁜일정을 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알겠나?" 그에게 말한다기보다 스스로에게 되뇌는 느낌이었다. 이 상황을 납득하고 싶어 하는 건 그보다는 백인 것 같았다. - P155

『저녁의 구애』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자연의 혼돈에맞서 문명이 이룩한 질서와 체계가 실은 그토록 인간이 두려워하던 ‘동일성의 지옥‘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다. 야만에맞서 건설한 문명의 끝이 야만이다. 자연에 대한 계몽 이성의지배가 최종적으로는 야만 상태로의 회귀로 귀결된다는 아도르노의 예언이 이번 편혜영 소설에서 확증된다. - P248

요컨대, 동일하고 동일하고 다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의저 군상들, 그들이 사는 곳은 바로 그 이유로 미로이고 저수지이다. 미로와 저수지는 그것이 설사 문명과 자연이라는 익숙한 근친적 대립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동일한 것들의 지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야만이 문명이고 문명이 야만이다. 편혜영의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가 이것이다. -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