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능을 치르고도 밤잠을 못 이루는 학생들과 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몇 일전 그 문제의 수능점수가 발표됐다. 예상했던 대로 물수능이란다. 한두 문제 때문에 과목별 등급이 달라지는 해괴망측한 사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한두 문제가 학생들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여, 불안한 부모들은 오늘도 무료 입시설명회에 줄을 서고, 고액 입시컨설팅업체에 전화를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에. 부족하고 모자란 점수 때문에 수시로 눈을 돌려보는 부모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이렇게 복잡한 전형이 있을까? 전형절차 중 항목상의 상관성이나 각 지표간의 유의미한 결론이 과연 가능할까? 입학사정관의 통찰이 준비된 수험생의 성실성을 꿰뚫을 수 있을까? 일부 부모들이 만든 만들어진 상장과 성과는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입학사정관은 전문성이 갖춰져 있을까?

 

허점투성이의 시스템이 불러들인 결론은 사교육시장의 부흥이다. 왜 우리의 교육당국자들은 하는 일마다 공교육부실과 사교육시장 배불리기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갖추었을까? 진정 그 능력이 아깝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닌데, 아무튼 기가 막힐 노릇이다.

 

 

#2.

그러나, 우리 집은 멀리 있는 수능이 아니라 발등의 불인 기말고사가 문제다. 2인 큰딸이 이번 주부터 기말고사를 치른다고 한다. 온 가족이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네 살배기 막내도 정숙을 요하는 놀이를 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셋째는 묵언수행중이다. 엄마 아빠는 일단 큰딸의 비위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는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벼락치기에 능했던 아빠는 큰딸의 시험공부하는 방법에 늘 의문을 갖는다. 복습과 반복학습을 그토록 강조했건만, 막상 시험공부하는 딸의 모습 속에는 생소하고 난해한 학문을 하는 초짜의 진지한 모습뿐이다. 투입 대비 산출의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게 보인다. 각 과목마다 자기 학습방법을 생각하라고 했건만, 그 역시도 말한 사람 입만 아프다.

 

하지만 아빠도 공부하는 딸의 진지한 모습에서 고민스럽다. 가장 바람직한 공부방법은 자기만의 방식인데도 자꾸 딸에게 아빠가 생각하는 공부방식을 주입하려고 한다. 아빠가 생각할때 가장 경제적인 시험공부는 시험 직전의 벼락치기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면에서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기억이나 보다 큰 시험에서는 취약한 공부방법이라 결코 추천할 수는 없다. 아빠는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좋은 습관을 들이는 공부방법을 계속 잔소리처럼 조언하고 있다.

 

대부분의 좋은 결과는 자신에게 맞는 좋은 습관과 반복의지에서 나온다. 중고등학교 공부나 대학교 공부, 각종 취업시험이나 고시공부에 있어서도 이 원칙은 타당하다. 문제는 우리집 큰딸이 이 보편타당한 원칙을 이해하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우리는 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깨달음을 늘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얻는지 모르겠다. 이 또한 하나의 원칙인지도 모를 일이.

 

 

#3.

요즈음 학생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시험일 이전 한 달도 전에 시험준비를 시작한다. 특히 선행학습과 무한반복을 중시하는 학원시스템에서 키워진 아이들의 평균성적은 기대이상이다. 문제는 사교육비용과 아이들 스스로의 자생력이다. 학원 종합반과 영수 전문학원의 교습비용은 부모의 허리를 휘게 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는 고1인 아들의 사교육비로 한 달180만원을 지출하고 있다. 이는 누군가의 월급이다.

 

더 큰 문제는 자기주도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반복학습으로 길러진 문제풀이 능력은 시험성적은 오르게 할지언정 아이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개인차에 따른 개별성과 예외성은 있다.

 

어찌되었건, 우리 큰딸은 오늘밤도 혼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뒤적이고 있다. 다니는 학원이 없기 때문에 예상문제 강의나 과도한 반복의 폐해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큰딸의 방은 새벽 1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덕분에 아빠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책을 보고 있. 아침에도 혹여 큰딸이 알람소리를 놓칠까 두려워 먼저 일어나 아이를 깨운다.

 

아무튼 한사람이 시험을 치르면 온 가족이 시험준비를 한다. 그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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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 저희의 빵을 주되, 어느 한 편 빵만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외로운 기타 줄들처럼.

 

칼릴지브란, <예언자> 결혼에 대하여 중에서.

 

결혼에 관한, 그리고 결혼한 남녀인 부부에 관한 칼릴지브란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어떤 영감을 얻어야 할까요?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랑,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랑....

 

 

#2.

세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인간관계는 부부관계다. 부부의 사랑은 따스한 봄빛아래 잉태하고 여름밤의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며, 내장산 애기단풍처럼 세상의 온갖 빛깔로 무르익는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사랑의 발화점을 넘고, 우정과 더불어 인간세상의 오만 속정을 아우르는 것이 부부의 내면성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상황이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신혼이혼과 황혼이혼이 아니더라도 모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부가 과연 얼마나 될지 진정 궁금하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던 터라 등을 돌리기도 쉽고, 이미 가둔 물고기 같아 세심한 정성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관계가 부부다. 생업을 위한 외부관계처럼 깍듯한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고, 사랑의 열정이 식어도 당연시 되는 이상한 관계도 부부다. 사랑이 아니라 정()으로 산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공식이 지배하는 관계도 부부다. 조용필의 노래(정이란 무엇일까)를 들으면서도 그 정이 무엇인지 역시 궁금하다.

 

가정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을 보고 듣고 자란다. 생물학적 유전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 비롯되는 사회학적 형질까지도 닮는다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의 삶의 궤적에서 자식들이 삶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피로한 삶으로 인해 거칠어진 부모에게서 결이 고운 아이들의 성장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의 가정을 둘러싼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자유롭고 공감하는 사랑을 꿈꾸고 실천하고픈 부부들도 막상 세태의 어려움이 녹아든 공간에서는 속박된 사랑조차도 어렵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정은 심포니오케스트라의 교향악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현악4중주 정도의 화음은 울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정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화음의 이면에는 사랑, 웃음, 행복, 눈물, 갈등이 숨어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화음의 중심에 엄마, 아빠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3.

* 부부의 이야기를 나누자

우리 부부는 네 아이를 키우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한다. 아이들의 건강, 학교생활, 공부, 저녁식단문제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도 부족하지만 부부만이 나눌 수 있는 주제도 가끔씩 이야기하곤 한다. 애들 문제나 가정외부의 문제에 파묻혀 정작 소중한 부부 자신의 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늦은 밤 라디오를 켜놓은 거실에서 각각 책을 읽거나 빨래건조대에서 옷가지를 거두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쏠쏠한 재미다.

 

주위의 친구나 선후배, 직장동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드라마에서 보는듯한 사이좋은 부부는 실제로 보기 드물다. 거칠고 힘든 세상이 주는 어려움으로 인해 서로를 살갑게 살피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부부 서로의 얘기를 떠나서 아이들 교육문제, 빈약한 가정경제, 암울한 미래문제까지 겹쳐지면 부부 자신의 이야기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메마르기 십상이다.

 

남녀의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수렴되지만, 곧 가정이라는 틀 속에서 정()이라는 변주곡으로 연주되고, 결국에는 식구라는 연대감으로 변해간다. 그 과정 속에서 잔잔하게 진행되는 부부의 스토리가 빠진다면 알맹이가 빠진 밤송이와 같을 것이다.

 

부부 자신의 스토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가정의 중심을 부부에 두자

가장 훌륭한 부모는 자식을 소년등과시킨 부모가 아니라 자식으로부터 존경받는 부모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돈독한 가정은 부부간의 관계도 좋은 편이다. 가정의 중심을 부부에 두고 있는 가정이라면 부부관계의 중요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가정에서는 그 중심을 부모보다는 아이들에게 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의사결정과정에서 부모보다는 자식의 입장이 중요하게 고려되고 우선시된다. 이러한 가정풍토에서는 부모가 소외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부부관계의 결핍은 가정 내에서의 부모의 역할에도 문제를 일으켜 결국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인구에 회자되는 노년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들이나 58년 개띠 부모님들의 불편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부모의 현재가 아이의 미래에 저당 잡히는 한국적 현실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가정의 무게중심을 부부에 두고 부모와 아이들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다차원으로 설계해야만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이좋고 대화가 잘되는 부모아래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존경할만한 자신의 부모를 마주할 확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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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아이들이 12년 생고생한 보람인 대입수능이 끝났다. 때마침 어떻게 알았는지 한파도 수능일을 잊지도 않고 찾아왔다. 배고픈 각설이도 아닌데. 전국의 유명사찰엔 수능수험생을 둔 부모들이 손이 닳도록 자식의 대박수능을 기원했다.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아이만은 시험점수가 잘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남의 학교 교문에 엿도 붙이고, 차가운 교문 아래서 온종일 기도를 드린 부모도 있었다. 마지막 종이 울리고 난 뒤의 풍경은 그야말로 마음이 뭉클해지고 왠지 짠해지고,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그런 감동어린 그림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출제기관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변별력이 떨어진 물수능이라는 이유 때문에.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입으로 여러 다른 얘기들을 쏟아놓는다. 학부모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말도 변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험이 끝나면 주체인 수험생에 대한 위안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시원찮은 점수와 시험제도에 관한 불만만 남는다.

 

그렇다, 이 나라에서는 분별력과 변별력을 갖추기가 쉽지가 않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분별을 모르고, 그들이 만들어낸 제도는 변별을 모른다. 어찌되었건 부모들은 이러한 풍토 하에서도(어쩌면 이런 풍토 때문에) 자식의 상위권대학 입학을 위해 온힘을 쏟아 붓는다. 그야말로 불확실성이 확실히 지배하는 한국 사회만이 만들어내는 병적인 열정이다. 내일을 모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과잉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진학문제에 관한한 부모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내 아이는 소중하니까.

 

 

#2.

서울 강남과 전남 무안에 거주하는 부모의 마음은 같다. 슬하에 자식이 몇 명이든지 모두 상위권대학에 진학해서 남보란 듯이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게 부모의 희망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러한 희망고문으로 인해 자식들에 미래에 대해 올인하고 있다. 부모들의 기대는 늘 아이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부모들은 아이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교육투자를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을 행동편향이라고 한다.

 

행동편향은 똑같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가만있는 것보다 행동하는 게 낫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믿음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의 능력이상으로 학습을 강요하고 그 대가로 불확실한 보랏빛 미래를 제시한다. 하지만 부모들의 행동편향에 의해 강요된 학습은 아이들보다는 부모를 위한 면피용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시장의 브로커의 반복된 투자나 정부의 변화무쌍한 교육정책도 이러한 행동편향의 일환이다. 증권브로커의 무책임한 투자유혹에 의해 누군가는 패가망신을 당할 수 있다. 특정 정권에 의한 교육정책의 잦은 변경과 사교육에 경도된 일부 부모들의 강요로 인해 아이들은 시들고 멍들어간다. 종국적으로 이러한 행동은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고, 근본이 흐트러진 사회는 조정능력을 상실 할 가능성이 크다.

 

 

#3.

부모가 고학력자이고, 현재의 직업이 안정적일수록 아이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부모 이상의 성취를 이뤄서 무한경쟁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럴 것이다.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정부부처의 공무원도, 교육시스템을 토론하는 대학교수도, 소위 잘나간다는 변호사나 의사도 집에서는 부모로서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는 자기주도학습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성적에 목매는 교육현실을 지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자식이 탁월한 성적과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소망스런 꿈이 되어버린 현실에서는 이상적인 이야기는 늘 남의 입장일 뿐이.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사교육비에 500만원을 쓴다는 얘기, 강요된 학습과 성적지상주의에 빠진 부모로 인해 아이가 성적표를 조작했다는 얘기는 흔한 뉴스거리다. 일부 아이들은 자신을 학원으로 과외학습으로 내모는 부모들을 독친(毒親)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신의 핸드폰에는 부모를 악마, 마귀, 대왕문어, 대왕오징어 등으로 저장해놓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 모두가 부모의 욕심에서 비롯된 불편한 사회현상이다. 우리 부모들의 욕망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하지 않게끔 절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을, 인생을 잘 살아가게 하는 참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독친으로 표현된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대학과 사회적 지위, 과시 가능한 경제력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답도 없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경쟁사회라는 무한궤도의 쳇바퀴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해보이지는 않는다. 부모의 바람대로 아이들이 성장하더라도 과연 그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선택권이 제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성취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도구적 삶을 살게 하고 유희적 삶을 알려주지 못한 부모들을 책망하지는 않을까?

 

부모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인생도 불확실한 하루하루의 연속일 것이다. 스스로가 모종의 불안감 속에서 책임져야할 선택을 하고 그에 걸맞은 결과에 만족하는 삶이 오히려 소망하는 삶이 아닐까? 불안하더라도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스스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지켜봐줄 수는 없을까?

 

 

#4.

아이들은 학원수업과 삼각 김, 컵라면이 주는 차가운 현실보다는 따뜻한 저녁식탁과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는 거실이 그리울 것이다. 자신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랑스런 미소를 보여주는 부모를 기대할 것이다. 공부나 성적보다는 오늘이라는 하루의 삶과 순간의 행복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부모를 바랄 것이다. 자신들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주인정신을 가질 있게 하는 조언자로서의 부모를 고대할 것이다. 성적표에 눈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인생의 선배로서 부모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과연 그러한가? 그들의 바람을 알고(혹은 알기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등산복패션처럼 획일화된 우리 부모들 세대의 속류화된 선택의 과오를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삶의 다양성이 결핍된 사회가 주는 속 좁은 직업에 관한 관념화의 오류를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게 타당한 것일까? 성공한 수능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대학이 아니더라도 인생이 망하거나 세상이 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실을 왜 외면하려는 것일까?

 

부모는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아이들이 바라는 바를 믿고 기다려주는 존재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부모들의 신뢰를 통해 아이들은 다양한 경험에 대한 용기를 갖고 세상의 불확실성을 보다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능실패와 대학진학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아직 경험치가 부족한 아이들이 알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세상은 훨씬 넓어져갈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학원으로 과외교실로 아이들을 이끌기보다는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아이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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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살배기 막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태윤이는 정말 싫어, 오늘도 친구들을 괴롭혔어

아빠가 답한다.

왜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너도 괴롭혔어

막내는 얼굴을 찌푸리고 한마디 더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아빠는 왜, 내가 태윤이를 싫어하는 느낌을 알려고 하지 않을까?)

 

2인 셋째가 아빠에게 이야기한다.

아빠, 나 내일 학교에 안가면 안 될까?”

아빠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 학교에 안가면 머할려고?, 집에서 혼자 놀게

셋째는 한숨을 쉬고 한마디 더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아빠는 왜,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지에 관한 내 감정을 읽어내지 못할까?)

 

2인 큰딸이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오늘 친구 보영이랑 싸웠어. 아침마다 내가 기다리는데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한마디도 안하잖아

아빠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큰딸이 한마디 더한다.

집에 올 때 보영이가 나한테 사과했는데...”

아빠가 대답한다.

너도 사과해, 그래야 사이가 더 좋아지지

큰딸은 그게 아니라는 듯고개를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아빠는 왜, 상식적인 선에서만 이해하려 하고, 내 말속에 숨어있는 내 감정을 알아듣지 못할까?)

 

 

#2.

윗글은 평범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수준의 대화내용이다. 우리 집에서도 가끔 이런 상황을 목격한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아빠는 아이들이 말하는 무엇을 놓치고 듣지 못했을까? 네 살배기, 2 큰아들, 2 큰딸이 왜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이들과 대화할 때 부모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듣는 내용마저도 부모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분명 아이는 자신이 전달하고픈 이야기를 자신의 감정과 더불어 표현했는데, 부모들은 그 이야기도 감정도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얘기를 들을 능력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판단할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면 부모는 아이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부모 또한 불소통의 상황 속에서 아이의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바람직한 부모와 자녀관계 형성에 분명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치유하기 힘든 악순환의 고리를 갖게 된.

 

현재 부모가 가진 기준과 가치는 하루아침의 결과물이 아니다.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개선 내지 변경된 것이기 때문에 그 기준은 아이에게는 가혹할 수 있다. 부모인 우리 자신도 어려운 것이 인생살이고 관계의 문제다. 하물며 아직 성장단계에 있고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불통이 습관화된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갖기가 쉽지 않.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감정소모와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인해 작은 화가 큰 분노를 낳는다. 가장 소중한 관계인 가족들 간에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형성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지적하기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고 끝이라고 한다. 즉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어떻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속뜻과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될 터인데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야기하는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듣고 있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듣기위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잘 못 듣는 부모의 오류를 시정하는 일일 것이다.

 

 

#3.

* 평범한 부모 - 부모도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특별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특정한 부모도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모두가 평범한 감정을 가진 보통(?) 인간이다. 누구나 작은 일에 속상해하고, 소소한 분노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고, 과거의 후회로 인해 현재가 발목 잡히는 그런 하루를 지낸다. 네 명의 아이들 둔 부모라고 해서 특별한 인격과 더 단단한 감정을 가질 수도 가질 필요도 없다.

 

부모들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가 아닌 평범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있다.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순간 스스로가 만든 틀에 구속당할 수밖에 없고, 그 틀의 시각으로 타인의 말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시각에 불편해하고, 상황은 어려워진다.

 

* 상황에 대한 이해 -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매사에 정답을 구하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름 치밀해 보일 수는 있지만 사고의 유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정답이 없는 문제나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최소한 두 갈래 길에서도 선택의 문제는 존재하고 후회가 남을 수도 있다. 부모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은 다르지 않다.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상황과 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부모들도 스스로도 아이들도 특정 상황에서 정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다만 좀 더 유연하게 상황을 바라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오히려 교과서적인 정답을 요구하는 서투른 시각을 경계하여야 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고 부모는 이들의 가능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즉 상투적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 판단하지 말 것 - 특정한 기준에 얽매이지 말자

아는 만큼 보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려있는 만큼 들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릴 것이다. 부모들의 경험과 지식도 제한적이다. 결국에는 내가 구성한 틀에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들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만든 기준에 얽매이다보면 내 방식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할 것이다. 상대방을 내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과 상대방의 의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특정한 기준을 내세우지도, 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아이들도 자신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고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진정성을 드러내기도 쉬울 것이고,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이해하기도 쉬울 것이다.

 

* 일관성에서 탈피 -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른 눈빛이 필요하다

부모가 아이들을 대할 때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조언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많은 부모들이 각각의 아이들이나 그 상황에 상관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열 손가락을 깨물면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이 있듯이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애정과 관심에도 차별과 가식이 있을 수 있다.

 

매순간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부모 스스로도 아이들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말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좀 더 자연스럽다. 부모들만큼이나 아이들도 부모들의 행동에서 진정성과 가식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평범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고, 자신의 틀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들을 수 있을 때 부모와 아이들 의 관계는 그 전보다 훨씬 따뜻해지고 자연스러워질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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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ytone 2015-04-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청, 어렵지만 관계의 핵심이죠..
제 경우에는 아이의 감정보다 아이가 처한 상황, 그리고 문제에 초점을 맞출 때 100% 실패하더라고요. 아이가 ˝엄마가 지금 내 말을 잘 이해 못한 것 같은데,˝ 라는 말의 뜻이, ˝엄마가 지금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라는 걸 이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어요. ㅠ.ㅠ
감정 받아주고, 수용해주는 게 정말 어렵더라는...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 때 말이죠.

지성파파 2015-04-07 22:50   좋아요 0 | URL
듣는게 어렵기도 하지만, 정답이 없기때문에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서로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가 되어야 하는데,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에 맟추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상황일때에는 오히려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눈빛과 침묵으로 부모가 알아차리고 있음을 표현하면 좋을 듯 합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엄연히 타인으로서 상대방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란...오히려 부모의 욕심이 아닐가 합니다.
 

    

#1. 의도

 

부모 학부모2014년 연초에 공중파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시리즈의 제목만 보더라도 기획의도가 들여다보여서인지 TV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일한 심리적 주체로서 같은 입장이면서도 서로 달라 보이는 부모와 학부모의 딜레마를 3부작으로 풀어냈다. 1부는 공든 탑이 무너진다, 2부는 기적의 카페, 3부는 부모의 자격이다.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이렇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과 자식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에서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상황설정은 했지만, 이 땅에서 자식을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재였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낳은 자식은 늘 안쓰럽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그 환경이 아쉽고, 더 잘 못 먹여 안날이 나는 게 부모들이다. 애가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의 심정은 어떤가. 공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학부모는 어떠한가. 초등학교 시절 반장도 해봐야 하고, 공부는 물론이고 누구 앞에서 발표도 잘해야 하고, 악기도 두어 개 정도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춘기도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을 것 같고, 친구관계도 원만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것이 학부모 아니던가. 성적지상주의인 이 나라에서 자식의 위치를 가늠해보면 학부모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2.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애들이 요람에 쌓여있을 때나 기어 다닐 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학부모의 마음보다 부모의 마음이 승리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학년에 올라가고, 중학생이 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사랑스럽고 예쁘기 그지없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보다는,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 분명 앞선다. 문제는 부모의 눈빛을 그렇게 잘 받아들이고 순응하던 아이들이 학부모의 눈빛에는 심한 거부감과 저항을 한다는 것이다.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그런 눈빛의 아이들에게 서운하다. 학원에서 늦게 귀가하는 아이를 다그쳐 더 공부를 시키는 것이 모두 부모 잘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항변을 한다. 자신의 한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 진학과 전문가가 되는 자격증 취득, 유수의 공·사조직에 취업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 잘 살아가는 조건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직업에 의한 선호 및 차별이 어느 정도의 문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특정한 직업 또는 직역이 개인의 인격이나 품격까지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국회의원들 중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라. 잘난(?)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 국민들의 시선의 의미를 생각해보라. 이 나라에는 직업적 콤플렉스가 없는 직업이 없다. 왜 그럴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보다는 위쪽 세상을 향하고, 비교의 기준 또한 위쪽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학창시절과 직업전선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그들의 몸과 뇌리에 기억되어 자식들에게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이 찌질하게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국 과도한 경쟁사회에서의 자신의 경험은 가정에서 학부모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강한 논리가 된다.

 

문제는 학부모가 무장한 논리가 아이들에게는 너무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그 논리가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논리의 기준이 되는 것은 현재 아이가 아니라 학부모라는 것이 큰 문제다. 결국은 학부모의 일방적인 잣대나 강요가 아이의 성적에 일조할 수는 있지만 현재 아이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생각은 자식의 오늘보다는 대학진학 이후, 취업이후의 자식의 행복에 있다. 극단적으로 이 논리를 밀어붙이다보면 그 부작용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쉽지 않다.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중심을 잡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과도 경쟁사회, 부와 학벌 및 직업의 대물림, 특정 직역의 독과점화가 일반화된 이 땅에서 부모와 아이들에게 남겨진 카드는 없는 것인가?

 

이 프로그램에서는 서울대 경영학과 2013학번 학생들을 연구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쭉 공부를 잘했던 학생, 게임중독에 빠졌다가 스스로 극복한 학생, 중고등학교 성적이 들쭉날쭉했던 학생, 사교육의 큰 도움 없이 입시를 준비한 학생 등이 현재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 인터뷰에 응했던 학생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관리를 잘했던 유형이었고,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민주적인 부모들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헌신적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헌신과 자신의 욕망을 혼동할 때, 자식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을 일치시키려 노력할 때 부모는 자식을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한다. 자식은 부모의 그러한 시각에 불편해하고 양자간의 관계는 소통의 길에서 멀어져간다.

 

오히려 아이가 잠시 흔들리거나 공부 외적인 측면에 빠져있더라도 아이의 복원력을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들도 있다. 아이들이 그러한 부모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중심을 잡고 자기주도적인 행동을 통해 바람직한 결과를 맺는다.

 

프로그램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이들의 성장은 부모의 맹목적인 헌신에 있지 않고, 자식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바탕위에서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3. ‘기적의 카페에서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기적의 카페는 강남 대치동 한복판에 만들어졌다. 부모와 아이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학교와 학업성적 때문에 갈등이 고도화된 가정의 구성원들이 카페에 모여 상담을 하고, 특강을 들었다. 그 중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일부 가정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화면에 담았다. 아이들의 솔직한 상담에 부모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부모들과 아이들의 상처는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과연 기적의 카페가 필요한 것이었던가? 각자의 가정에서 부부가 평소에 가정의 대소사에 대해 자주 대화하고, 자녀교육문제도 각각의 수준에 맞는, 아이의 행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끌어 나갈 정도의 논의가 가능한 가정이었다면 분명 부모와 자식이 반성의 눈물을 흘리는 카페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도 그렇지 못하다.

 

문제가정은 어디든지 존재한다. 특히 사춘기가 지나고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둔 가정에서는 부모는 부모대로 한숨을 쉬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만을 터뜨린다. 부모 입장에서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이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단계로 인식을 하고 아이들이 이 시점에서 큰 성과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이 시기는 존재에 대한 혼란과 더불어 삶에 대한 불안감이 서서히 커져가는 단계다.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따분한 공부로터 탈출하고 싶고, 공부 이외의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싶은 욕구가 일상을 지배한다. 부모가 아이의 이러한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문제가정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우리사회의 교육과정은 고민이 필요한 십대들에게는 잔인하다. 우리나라에는 십대의 미성숙과 과도기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인간적인 교육과정과 이들을 사육하려는 학교,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부모의 무관심이 존재한다. 슬픈 현실에 아이들은 입을 닫고, 이를 외면하는 부모들은 귀를 닫는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어려워지는 수학이 중1, 2학년 때 난이도가 도약을 하게 되면 부모의 성급함은 극에 달한다. 덕분에 이 동네 저 동네 수학학원의 원장들은 쌍수를 들고 부모와 아이들을 반긴다. 이 때 아이들 중 열에 아홉은 비자발적으로 소위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된다. 수포자에게 부모의 시선은 냉정해지고 부모 자식 간의 불소통에 관한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수학을 포기하게 되었을 경우 상위권 대학진학이 물 건너가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부모에게 수포자는 이런 웬수가 따로 없다.

 

부모의 따뜻한 시선과 손길을 기대했던 아이들에게 냉담한 시선과 가시 돋친 훈계는 아이들 가슴에 상처와 아픔을 준다. 아이들 교육에 무관심했던 아빠나 헬리콥터처럼 주위를 맴돌던 열성엄마나 아이의 성적과 행동에 모두 분노한다. 아이는 돈벌어다주는 기계인 무관심한 아빠에게 분노하고, 학원 알아봐주는 사람인 사채업자 같은 엄마에게 분노한다.

 

분노의 가장 큰 단점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데 있다. 또한 분노한 마음은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듣지도 그 진심을 알지도 못한다. 기적의 카페에서는 이러한 부모와 아이의 분노를 치유했다. 냉정했던 부모는 자신의 일방적 잣대를 거두고 아이의 소소한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분노했던 부모는 따뜻한 시선으로 긴 호흡으로 아이의 일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기적의 카페를 통해 그동안 막혔던 대화에 물꼬가 트이고, 견고했던 분노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서로가 느끼기 시작했다.

 

부모들이여,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마냥 성적만 좋은 학생이 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꿈을 가진 따뜻하고 사랑스런 자식으로 성장하길 바라는가? 진정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회복력을 믿으시라.

 

  

#4. 진정한 부모의 자격은 사랑이다

 

자격은 신분이나 지위를 말하기도 하나, ‘남자의 자격이나 부모의 자격에서의 자격은 일정한 조건이나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때의 자격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대상을 찾고 일정한 기준으로 그 우위를 가리려 한다. 애당초 부모의 자격이란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본질이 아니었던가? 그 본질은 부모로서의 특별한 능력이나 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부모의 자격을 공론화하고 그 조건을 규정지을 때 이미 부모는 본연의 바람직함에서 멀어져있지는 않을까? 지금 우리가 부모의 자격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우리사회의 슬픈 세태를 반영한다.

 

우리 시대의 열성엄마들은 본인의 아이들이 경쟁에 우위를 점하고 성적에서는 정점에 서기를 바란다. 그들은 아이의 바람이나 적성과는 관계없이 과학고와 외고, 그리고 자사고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한. 과도경쟁의 사회시스템은 교육시스템에도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열성부모들의 혈관 속에 흐르는 외고나 자사고에 대한 애정은 아이들의 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신들이 종교처럼 믿는 대학의 입학허가서나 다름없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과신하고 있다.

 

수학이나 과학 올림피아드에서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노벨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다. 수학능력이 한참 처졌던 미국의 과학자나 과학능력이 부족해보였던 일본의 공학자들은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한국의 아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공부를 하지만 스스로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지적 호기심을 살리고 동기부여가 지속적으로 가능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강요된 공부를 한다. 그 어려운 수학문제를 반복해 풀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막상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써먹을 데가 없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결국 시험 외에는 쓸모도 없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버린 대가는 창의성이 부족하고 행복이 결핍된 아이들이다. 오직 시험을 위한 공부는 합격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성취는 없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전무한 것이다.

 

성적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줄을 세우고, 친구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어야 칭찬을 받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행복할까? 호기심 많은 십대를 지나면서 지적충족과 정체성을 찾아가며 스스로 자존감을 기를 수 있을까? 부모에 의해 강요된 공부를 하고 성적의 단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부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들의 평가에서 부모의 자격은 비로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제 있는 아이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듯이 문제 있는 부모를 개념화하기도 힘들다. 문제부모 뒤에 문제사회가 있다고 하는 것도 쉬운 설명은 아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자격을 논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 스스로의 처절한 반성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어불성설이다.

 

부모들이여, 아이들은 엄마, 아빠 그 자체로의 순수함을 원한다. 학원을 정해주고, 과외선생님을 고르고,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니고, 입학사정관에 제출할 이력을 만들어주고, 자신들을 숨 막히게 하는 그런 부모를 능력 있는 부모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부모만이 부모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욕망이 우리 아이들을 멍들게 하고, 한국의 교육현실을 피폐하게 하지는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

 

진정한 부모의 자격은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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