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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능을 치르고도 밤잠을 못 이루는 학생들과 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몇 일전 그 문제의 수능점수가 발표됐다. 예상했던 대로 물수능이란다. 한두 문제 때문에 과목별 등급이 달라지는 해괴망측한 사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한두 문제가 학생들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여, 불안한 부모들은 오늘도 무료 입시설명회에 줄을 서고, 고액 입시컨설팅업체에 전화를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에. 부족하고 모자란 점수 때문에 수시로 눈을 돌려보는 부모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이렇게 복잡한 전형이 있을까? 전형절차 중 항목상의 상관성이나 각 지표간의 유의미한 결론이 과연 가능할까? 입학사정관의 통찰이 준비된 수험생의 성실성을 꿰뚫을 수 있을까? 일부 부모들이 만든 만들어진 상장과 성과는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입학사정관은 전문성이 갖춰져 있을까?

 

허점투성이의 시스템이 불러들인 결론은 사교육시장의 부흥이다. 왜 우리의 교육당국자들은 하는 일마다 공교육부실과 사교육시장 배불리기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갖추었을까? 진정 그 능력이 아깝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닌데, 아무튼 기가 막힐 노릇이다.

 

 

#2.

그러나, 우리 집은 멀리 있는 수능이 아니라 발등의 불인 기말고사가 문제다. 2인 큰딸이 이번 주부터 기말고사를 치른다고 한다. 온 가족이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네 살배기 막내도 정숙을 요하는 놀이를 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셋째는 묵언수행중이다. 엄마 아빠는 일단 큰딸의 비위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는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벼락치기에 능했던 아빠는 큰딸의 시험공부하는 방법에 늘 의문을 갖는다. 복습과 반복학습을 그토록 강조했건만, 막상 시험공부하는 딸의 모습 속에는 생소하고 난해한 학문을 하는 초짜의 진지한 모습뿐이다. 투입 대비 산출의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게 보인다. 각 과목마다 자기 학습방법을 생각하라고 했건만, 그 역시도 말한 사람 입만 아프다.

 

하지만 아빠도 공부하는 딸의 진지한 모습에서 고민스럽다. 가장 바람직한 공부방법은 자기만의 방식인데도 자꾸 딸에게 아빠가 생각하는 공부방식을 주입하려고 한다. 아빠가 생각할때 가장 경제적인 시험공부는 시험 직전의 벼락치기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면에서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기억이나 보다 큰 시험에서는 취약한 공부방법이라 결코 추천할 수는 없다. 아빠는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좋은 습관을 들이는 공부방법을 계속 잔소리처럼 조언하고 있다.

 

대부분의 좋은 결과는 자신에게 맞는 좋은 습관과 반복의지에서 나온다. 중고등학교 공부나 대학교 공부, 각종 취업시험이나 고시공부에 있어서도 이 원칙은 타당하다. 문제는 우리집 큰딸이 이 보편타당한 원칙을 이해하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우리는 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깨달음을 늘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얻는지 모르겠다. 이 또한 하나의 원칙인지도 모를 일이.

 

 

#3.

요즈음 학생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시험일 이전 한 달도 전에 시험준비를 시작한다. 특히 선행학습과 무한반복을 중시하는 학원시스템에서 키워진 아이들의 평균성적은 기대이상이다. 문제는 사교육비용과 아이들 스스로의 자생력이다. 학원 종합반과 영수 전문학원의 교습비용은 부모의 허리를 휘게 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는 고1인 아들의 사교육비로 한 달180만원을 지출하고 있다. 이는 누군가의 월급이다.

 

더 큰 문제는 자기주도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반복학습으로 길러진 문제풀이 능력은 시험성적은 오르게 할지언정 아이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개인차에 따른 개별성과 예외성은 있다.

 

어찌되었건, 우리 큰딸은 오늘밤도 혼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뒤적이고 있다. 다니는 학원이 없기 때문에 예상문제 강의나 과도한 반복의 폐해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큰딸의 방은 새벽 1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덕분에 아빠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책을 보고 있. 아침에도 혹여 큰딸이 알람소리를 놓칠까 두려워 먼저 일어나 아이를 깨운다.

 

아무튼 한사람이 시험을 치르면 온 가족이 시험준비를 한다. 그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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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 칼릴지브란(예언자)

   

해마다 5월이면 많이들 인용되는 칼릴지브란의 예언자 중 "아이들에 대하여" 일부분이다.

누구든지 부모가 되면서,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떠오르는 의문 중 하나는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배냇저고리를 처음 입혀주며 눈시울을 적시는 부모, 처음 걸음마를 내디딜때 뭉클했던 그 순간.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부정확한 발음으로 듣던 그 순간에도 떨리는 건 부모였고,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조마조마 한근반 두근반 앞날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던것도 부모였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사랑과 자신의 생각, 지식까지도 주고 싶어한다.

자신의 분신으로 살아가리라는 근거없는 확신도 부모들에겐 차라리 하나의 종교다.

이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을 소유하려고 하며, 이로부터 모든 문제가 고개를 처든다.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 칼릴지브란은 부모와 자식에 대한 본질을 명확하게 설파하고 있다.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까지 줄 순 없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순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자신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아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가지고 내일을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 그로부터 발생하는 여러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가정문제의 사회문제화 현상이 우리시대의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 스스로 질문해본다.

진실되게 의문을 갖는다. 내 영혼과 피로 만들어낸 자식인데 과연 소유할 수 없는 것인가.....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이것은 질문입니까?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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