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 타인을 대상화하는 인간
존 M. 렉터 지음, 양미래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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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타인을 당신(Thou)이 아닌 그것(it)으로 경험함으로써 상대방을 대상화한다. (47쪽)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와 동족인 인간을 고문하거나 살해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 우리 같은 인간이 아니며 어떤 사악한 행동을 대변하는 자라는 말을 듣고 나면 그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 모든 정치적,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의 목표는 하나이다. 어떤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이 진짜 인간이 아니라고 믿게 만들고, 따라서 그들을 약탈하거나 속이거나 괴롭히거나 심지어는 살해해도 그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65쪽, 올더스 헉슬리의 말 인용)


  '인간관계' '심리학' '타인과 타자' '공동체' '자아' '대상화' '사물화' 그리고 이들이 엮인 복합적인 사회현상과 그 해결점에 관해 고찰해보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 사회, 우리는 타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들을 쉽게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늘 현상 자체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 문제가 왜 일어나는지에 관한 고질적인 궁금증을 끌어안고 있었더랬다. 인간이 같은 권리와 인격을 가진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나아가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약자는 스스로를 규정된 울타리 속에 가두기도 하는 것일까. 과연 '대상화' 문제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료하게 존재할까.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내릴 수 있게끔 길잡이가 되어 주는 책이다. 인간이 타인을 대상화하는 형태와 원인을 사례를 바탕으로 분석함으로써 대상화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고, 심지어는 책을 읽는 나 자신이 타인을(혹은 나 자신을) 대상화하고 있음을(혹은 하였음을) 인식하게 한다. 


  '타인을 대상화하는 행위는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온당히 나타나는 감정적 미성숙을 반영하고 있(47쪽)'으나 이것이 성인기까지 이어질 경우 도덕적 결여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마태복음 16장 25절)"하(47쪽)'므로 성인이 될 때까지 타인과 공동체를 고려하는 일종의 이타적 역량을 함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실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47쪽)'는 것이다. 대상화는 과도한 경계적 자아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경계를 통한 구별은 타인을 '그것(it)'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타인을 '자율성이 없고 대체 가능하며 소유할 수 있는' 존재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상화의 주체는 과연 고정되어 있을까? 바트키에 따르면(37쪽) 대상화는 반드시 대상화를 하는 사람과 대상화를 당하는 사람이 모두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관능적인 외양의 여자들을 보여 수시로 쾌락을 얻고자 하는 남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받고 관찰당한 여자들이 결국 본인을 대상화하고 본인에 의해 대상화를 당하는 역할 모두를 맡에 된다(37쪽)'. 이것은 대상화가 단순히 하나의 집단 혹은 특정 가해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깊숙이 내재해 있음을 시사한다. '규율을 부과하는 주체는 모든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누군가도 아니기(37쪽)' 때문에 근본적인 대상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리(어쩌면 모든 사람) 내부에 깊이 침잠해 있는 무관심과 유도체화의 파편을 인지하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는 사적인 성향과 기질이라기보다는 상황과 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발생하는 맥락적 현상이므로 인간 내면뿐만 아니라 대상화가 발생하는 상황에도 주목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성격의 본질적인 선함, 기질의 안정성, 상황이 주는 압박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유혹을 명확히 거부할 수 있는 능력 등을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알려진 것, 익숙한 것, 사랑받는 것으로 대표되는 선(善)과 이국적인 것, 생경한 것, 경멸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악(惡) 사이에 확실한 경계를 세워서 세상을 단순화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모든 인간의 마음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자주 간과한다(293~294쪽).' 이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스스로가 지닌 본질과 내면을 믿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이 이점으로 작용할 때도 분명 존재하지만 분명 때로는 상황 속에 우리를 잠몰시키기도 함을 말해 준다. 인간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할 수 있다. 완벽하게 선한 사람, 그리고 완벽히 대상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좋은 자아는 언제나 나쁜 상황을 이겨낼 수 있(296쪽)'을까? 이는 계속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다. 타인을 유도체화 혹은 비인간화하게 되는 상황 앞에서 나 자신은 얼마나 선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선해질 경우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핑커는 "역사는 대체 어떤 이유로 인신공양, 능지처참, 거열형, 화형뿐만 아니라 채무자 감옥, 전족, 거세, 투우, 사냥, 심지어 아동 학대로부터도 멀어지게 된 것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폭력이 줄어들게 된 이유는 인간이 그러한 문제를 조금씩 제거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79쪽)'. 인간은 악을 인식하고 인지하면서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인간이 걷는 길을 정비해왔다는 것이다. 책은 대상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대상화 경향을 줄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나는 절대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편이지만 인간은 언제나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좀더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고 본다. 선(善)이란 사실 완전히 절대적일 수도, 완전히 주관적일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인간이 완벽히 선해질 수 없는 일이고 또 완전히 선해지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 우리가 '조금 덜 잔인해지는 것'이 필요함은 어느 정도 명백한 사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_교유당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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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지식인 - 아카데미 시대의 미국 문화
러셀 저코비 지음, 유나영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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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이란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싶다면?

♥︎ 미국 문화, 사회, 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 문화의 대중성, 상업성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면?


『마지막 지식인 - 아카데미 시대의 미국 문화』 러셀 저코비 지음, 유나영 옮김, 교유서가 펴냄

- 견장정(양장)


 교유서가와 싱긋의 인문서들은 전반적으로 모던한 깔끔함을 추구한다. 표지에는 고딕에 형태변화를 준 단정하고 멋스러운 서체를 자주 사용하며, 표지 디자인의 균형감을 중요시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과하게 딱딱해 보이지 않아서 - 때론 일러스트가 삽입되기도 한다 - 거부감이 들지 않으며 안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 주어 좋다.


# 1940년 무렵과 그 이후에 출생한 세대가 사회에 나왔을 때는 대학과 지성계의 정체성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지식인이 된다는 건 교수가 되는 일이었다. 이 세대는 대학으로 흘러들어갔고 지식인이 되고 싶으면 대학에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재능이나 용기나 정치적 입장이 아니다. 문제는 대중적 산문에 숙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글이 대중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다 폭넓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머릿수가 얼마나 많은가는 상관없었다. 실종된 지식인들은 대학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41쪽)


 대학이 일반화되면서 대학의 규칙이 보편화된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대학별로 어느 정도 차이를 가지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학과 교수가 원하는 답과 길이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젊은이들은 교육이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야 하고 창의적인 작업 기회는 일부에게만 주어진다. 리포트는 '대학의 기준에 따라' 학술적이어야 하며, 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에 적응하여 보편적 규칙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젊은 지식인이 사라지는 이유는 어쩌면 치우친 보편성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사고방식과 그의 실현이 일률적으로 변화하면서 특별히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지식인이 반드시 '대중을 위해' 말할 필요는 없다. (그 과정이 아무리 보편화되어 있더라도 모든 절차가 과정과 결과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므로) 대학을 통해 양성된 젊은이를 지식인이라 부를 여지 또한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계속해서 대학 교육과 진정한 지식인 사이 미묘한 지점에서 모순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나 자신조차 사회의 교육제도에 순응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제도가 바뀌어 '다른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실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쪽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뿐.


# 이 모두는 집필이 힘든 직업임을 가리키고 있다. 프리랜서 글쓰기가 경제적으로 유일한 생계 수단일 때 저자는 쉽게 소진된다. 경제적으로 실현 가능한 - 편집자가 사줄 만한 - 기획을 제안하고 조사하고 완수하려면, 그보다 현금 가치가 떨어지는 기획을 추진할 여력은 거의 남아나지 않는다. 프리랜서 작가는 시장의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데, 멈퍼드가 지적했듯이 진지한 일반 산문에 대한 시장의 지원은 날로 줄어든다. (312쪽)


 글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이 상업성을 띠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이 상업성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한다. 예술가 그리고 예술가와 협업하는 이들이 상업성을 우선순위로 추구했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예술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명시했듯, 누군가 사줄 만한 예술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보면 예술가는 순식간에 소진되고야 만다. 실제로 나 또한 누군가 보고 듣고 읽고 평가할 것이라는 부담감을 가졌을 때, 누군가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 창작할 때 어떤 작품이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 모두가 예술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상업성을 배제한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작품을 팔아야 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사랑받길 바라는 존재로 바라봐주면 안 될까.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다 해도 그 작품이 가치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를. 


- 교유당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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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 2 - 일상에서 발견하는 호기심 과학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 2
사물궁이 잡학지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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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 2』 사물궁이 잡학지식 지음, 아르테 펴냄
- 무선 제본


♥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질문들을 만나보고 싶다면?
♥ 잡다한 생활 과학 지식을 쌓고 싶다면?
♥ 유튜브 채널 '사물궁이 잡학지식'의 구독자라면?


  목차 다음 부분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세상에 이유 없이 만들어진 것은 없습니다. 이 책도 그러하길 바랍니다.' 이 말처럼, 『사소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궁금했던 이야기 2』는 세상에 이유 없이 만들어진 물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책은 일상 속에서 문득 궁금해할 만한 질문들을 정리하여 답을 찾아간다. 사실 이 질문들은 평소 특별히 궁금해했던 것들이라기보다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듣고 보면 궁금한 점에 가깝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들도 사례와 통계를 곁들여 좀 더 명료히 설명해주어 좋았으며 그림과 사진 자료를 풍부히 사용하여 읽어나가기 편했다.


  다섯 챕터로 나뉘어 있는 책의 구성이 참 깔끔하고 좋았다. 각 챕터마다 질문을 8개씩 분배했는데 쉬어가며 읽기 적당한 분량이라 좋았다. 더 궁금한 질문이 있는 챕터, 더 흥미로울 것 같은 챕터를 골라서 먼저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 흥미로웠던 질문들
- 멀티탭에 멀티탭을 연결하면 장거리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까?
- 가위바위보 게임은 정말 공정할까?
- 스카치테이프가 여러 겹일 때 왜 노랗게 보이는 걸까?
- 수저 밑에 휴지를 까는 것이 정말 위생적일까?
- 왕조 시대 때 신하들은 어떻게 타이밍을 맞춰서 합창했을까?
- 넷째 손가락은 왜 들어 올리기 힘들까?


  장거리 콘센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리드선’이라는 것이 있어서, 실제로 멀티탭에 멀티탭을 길게 연결해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멀티탭을 여러 개 연결해 사용한다면 전압 강하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게 되면 전기가 공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신하들이 다같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또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는 것은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픽션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실록에 등장한 말들을 오늘날의 사극에 맞게 재구성하여 사용한 셈이다.


※ 책수집가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리뷰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에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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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활인 상.하 - 전2권
박영규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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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삶을 위한 삶을 살아가리라.

 

『활인』 박영규 역사소설, 교유서가
- 무선 제본, 상/하 2권 구성

 

♥ 역사서 전문가가 집필한 역사 소설을 읽고 싶다면?
♥ 조선의 의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했다면?
♥ '사람을 살리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면?

 

  초등학교 때 도서관에 꽂혀 있던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무작정 뽑아들고 읽기 시작한 적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의 나열로만 인식한 채 책장을 넘겨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나 나는 그 500쪽이 넘는 실록을 닷새 만에 완독했다. 하나는 분명했던 것 같다. 역사 속 삶의 궤적을 되짚어가는 것이 정말로 즐거운 일이라는 것. ‘나’라는 존재가 생겨나기 전의 세계를 두 눈으로 목도하는 일은 나의 현존을 증명함과 동시에 상상의 세계를 무한대로 넓혀나갔다. 

 

  역사서와 역사 소설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삶을 훑어나가다 보면 현재와 맞닿는 공명과 울림에 도달한다. 『활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승자의 기록이었던 역사 속에서 조명되지 못했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쓰인 소설이라는 점. 무녀의 수양딸 소비와 아버지의 누명으로 노비가 된 노중례는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의술에 두각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을 도왔으며 임금의 눈에도 들게 된다. 소비와 노중례가 실존 인물이었고 의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록에 두어 줄밖에 남지 않은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삶을 재구성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 쓰는 것보다 무게감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들이 이 작업을 해내야만 하는 것은… 앞으로 쓰일 역사를 위해서가 아닐까. 이는 ‘승자 중심의 역사’에서 ‘가치있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역사’로의 이행 과정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역사에서 앞으로 만들어나갈 역사를 찾아내는 일이다. 

 

  특히 좋았던 점은 『활인』 의 이야기가 조선의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쓰였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조선은 여성이 활약할 수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사회적 배경이 그러하다고 해서 그 시절의 모든 여성들이 마냥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기만 했을까? 그랬을 리가 없다. 제 꿈을 널리 펼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해 거듭 좌절했을 여성들이 조선에 얼마나 많았을까. 『활인』 에 등장하는 소헌왕후 심씨와 소비는 ‘여성도 인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심씨는 세종이 왕이 되기 전부터 그에게 깨달음과 깨우침이 되어주었던 현명한 여성이었으며, 소비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의술의 길을 걸어간 올곧은 여성이었다.

 

 "아까운 인재지요. 하지만 인재면 뭐하겠습니까? 이 나라 조선에서 여인이 재능이 뛰어나봐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더구나 의술을 익혔으니, 기껏 천한 의녀로밖에 더 살겠습니까?"
"어허, 부인. 그것은 아니지요. 의녀가 비록 신분은 천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여인들 아니오. 또한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의술마저 천하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거야 대군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만, 세상인심이 어디 그렇습니까?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 죄로 평생 남자 그늘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더구나 여인이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코 태의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그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이지요." (상권 75쪽, 충녕 대군과 심씨의 대화)

 

 "그렇습니다. 유학이든 불교든 모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어떻게 살릴 것인지 방법론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모든 학문과 경전은 사람 살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사람보다 부처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부처라는 허울을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군께서는 공자라는 허울을 백성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십니까?"
그 물음에 충녕은 말문이 탁 막혔다.
"공자는 성인인데, 어찌 허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까스로 그런 대답을 하긴 했지만 충녕은 딱히 그 대답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살아 있는 공자는 허울이 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죽은 공자는 허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죽은 부처가 많은 사람들의 허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권 146쪽, 충녕 대군과 심씨의 대화)

 

  2권에서 소비와 노중례는 자신의 원수를 살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가 눈앞에 있으나 의원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법. 그렇게 원수를 치료하고 원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소비는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죽음의 늪에 함께 빠지는 일임'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 자신이 그 감정에 잠식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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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 - 100년 역사의 고교야구로 본 일본의 빛과 그림자
한성윤 지음 / 싱긋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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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시엔'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 '일본 야구'와 문화, 전통, 사회의 관련성에 대해 알고 싶다면?
♡ '스포츠'에 관심이 많고 스포츠 관련 교양 지식을 쌓고 싶다면?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 - 100년 역사의 고교야구로 본 일본의 빛과 그림자』 한성윤 지음, 싱긋

♡ #싱긋 이 펴내는 책은 무언가를 열렬하게 애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지난 서포터즈 도서였던 『가구, 집을 갖추다』는 가구와 인테리어를 파고들어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삼월의 도서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은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인 '고시엔'을 소재로 일본의 문화, 전통, 사회의 면면을 보여준다. 두 도서의 공통점은 모두 적당한 무게로 열렬한 애정과 사유를 충분히 표현해낸다는 점. 저자는 각 분야를 오래도록 파헤쳐 온 탐색자이다. 개인적으로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이 책은 나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야구 이야기뿐만 아니라 야구에 얽힌 세계의 수많은 지표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넓게 보는 법을 싱긋의 책들이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분야의 책을 만들더라도 넓은 세계를 알려 주는 책을 만들고프다는 소망이 자꾸만 커졌다. 야구 경기 시작 전 울리는 사이렌 소리처럼, '계속 만나고 싶은 꿈이었습니다.'라는 고시엔 캐치프레이즈처럼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를 더욱 힘껏 사랑하고 싶어졌다.

# 그런데 청춘은 과연 무엇인가? 청춘이라는 단어는 중국의 음양오행에서 비롯되었다. 음양오행 사상의 다섯 개 요소에는 저마다 상징하는 색깔이 정해져 있는데, '목'은 '청'이다. 그리고 계절도 다섯 개로 구분되는데, '목'에 해당하는 계절은 '봄'이다. 그렇게 탄생한 단어가 바로 청춘이다. (18쪽)

♡ 일본 고교야구는 청춘의 드라마로 불렸다. 젊은이들이 힘을 짜내어 경기장을 달리고 '꿈의 무대'에 서는 모습은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젊음을 불사르는 열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 모습이 전부일까? 우리는 그것을 마냥 '아름답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은 것일까? 고교야구를 빌려 책이 이야기하는 청춘의 모습이 거듭되는 입시와 취업에 시달리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연상케 했다. 젊으니까 그만큼 열심히 해야 하고 젊으니까 조금 아파도 괜찮다는 것은 그런 모습이 오히려 박수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은 결코 청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것이 아니다.

# 실제 게이오기숙고등학교 야구부의 모리바야시 감독은 일본판 <허프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른들이 마음대로 청춘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른들의 시선을 통해 고교야구는 이래야 한다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데 빡빡머리를 한 채 무조건 전력 질주를 하는 모습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겨도 눈물, 져도 눈물이라는 청춘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21쪽)

♡ 지금의 젊은이들이 바라는 것은 이겨도 눈물 흘리고 져도 눈물 흘리는 청춘이 아니라 하고픈 일하기 위해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언가를 열렬히 애정하고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는 시간은 생에서 참으로 귀중하다. 그러나 젊음을 대가로 바쳐야만 노력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꿈의 무대'는 결코 불타는 청춘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 야구가 여전히 남성 중심의 스포츠이며 여자야구 환경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청춘은 결코 소년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 또한 덧붙이고 싶다.

# 그런데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그라운드에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현실에선 퇴장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등번호를 달지 않은 사람의 그라운드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남자가 아닌 여자 매니저이기 때문에 제지당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187쪽)

# 일본 여자야구는 남자 프로야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다. 연봉부터 숙소나 연습 환경 모두 프로라기보다는 동호인에 가까운 수준이다. (192쪽)

※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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