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활인 상.하 - 전2권
박영규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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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삶을 위한 삶을 살아가리라.

 

『활인』 박영규 역사소설, 교유서가
- 무선 제본, 상/하 2권 구성

 

♥ 역사서 전문가가 집필한 역사 소설을 읽고 싶다면?
♥ 조선의 의술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했다면?
♥ '사람을 살리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면?

 

  초등학교 때 도서관에 꽂혀 있던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무작정 뽑아들고 읽기 시작한 적이 있다.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의 나열로만 인식한 채 책장을 넘겨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나 나는 그 500쪽이 넘는 실록을 닷새 만에 완독했다. 하나는 분명했던 것 같다. 역사 속 삶의 궤적을 되짚어가는 것이 정말로 즐거운 일이라는 것. ‘나’라는 존재가 생겨나기 전의 세계를 두 눈으로 목도하는 일은 나의 현존을 증명함과 동시에 상상의 세계를 무한대로 넓혀나갔다. 

 

  역사서와 역사 소설을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삶을 훑어나가다 보면 현재와 맞닿는 공명과 울림에 도달한다. 『활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먼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승자의 기록이었던 역사 속에서 조명되지 못했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어 쓰인 소설이라는 점. 무녀의 수양딸 소비와 아버지의 누명으로 노비가 된 노중례는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의술에 두각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을 도왔으며 임금의 눈에도 들게 된다. 소비와 노중례가 실존 인물이었고 의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록에 두어 줄밖에 남지 않은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삶을 재구성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 쓰는 것보다 무게감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들이 이 작업을 해내야만 하는 것은… 앞으로 쓰일 역사를 위해서가 아닐까. 이는 ‘승자 중심의 역사’에서 ‘가치있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역사’로의 이행 과정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역사에서 앞으로 만들어나갈 역사를 찾아내는 일이다. 

 

  특히 좋았던 점은 『활인』 의 이야기가 조선의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쓰였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조선은 여성이 활약할 수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사회적 배경이 그러하다고 해서 그 시절의 모든 여성들이 마냥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기만 했을까? 그랬을 리가 없다. 제 꿈을 널리 펼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해 거듭 좌절했을 여성들이 조선에 얼마나 많았을까. 『활인』 에 등장하는 소헌왕후 심씨와 소비는 ‘여성도 인간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심씨는 세종이 왕이 되기 전부터 그에게 깨달음과 깨우침이 되어주었던 현명한 여성이었으며, 소비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의술의 길을 걸어간 올곧은 여성이었다.

 

 "아까운 인재지요. 하지만 인재면 뭐하겠습니까? 이 나라 조선에서 여인이 재능이 뛰어나봐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더구나 의술을 익혔으니, 기껏 천한 의녀로밖에 더 살겠습니까?"
"어허, 부인. 그것은 아니지요. 의녀가 비록 신분은 천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여인들 아니오. 또한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의술마저 천하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거야 대군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만, 세상인심이 어디 그렇습니까?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 죄로 평생 남자 그늘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더구나 여인이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코 태의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그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이지요." (상권 75쪽, 충녕 대군과 심씨의 대화)

 

 "그렇습니다. 유학이든 불교든 모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어떻게 살릴 것인지 방법론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모든 학문과 경전은 사람 살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사람보다 부처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부처라는 허울을 사람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대군께서는 공자라는 허울을 백성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십니까?"
그 물음에 충녕은 말문이 탁 막혔다.
"공자는 성인인데, 어찌 허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까스로 그런 대답을 하긴 했지만 충녕은 딱히 그 대답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살아 있는 공자는 허울이 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죽은 공자는 허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죽은 부처가 많은 사람들의 허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권 146쪽, 충녕 대군과 심씨의 대화)

 

  2권에서 소비와 노중례는 자신의 원수를 살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가 눈앞에 있으나 의원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법. 그렇게 원수를 치료하고 원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소비는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누군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죽음의 늪에 함께 빠지는 일임'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 자신이 그 감정에 잠식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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