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사랑을 읽다 - 명작으로 배우는 사랑의 법칙
김환영 지음 / 싱긋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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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비정치적인 것 중에서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196쪽) 】

 

『문학으로 사랑을 읽다』 김환영 지음, 싱긋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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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내용의 소재도 마음에 들었지만 만듦새 또한 눈에 띄었던 책이다. 머메이드지 느낌 나는 양장 표지가 빛을 비추면 광택이 돋보이는 홀로그램 박을 입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낭만적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처럼 '사랑을 읽고픈' 표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에서 다루는 작품은 모두 해외문학인데 그에 걸맞게 서체 또한 서양풍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책의 부제는 '명작으로 배우는 사랑의 법칙'으로, 사실 이 부제만 보고서는 책의 소재가 되는 작품들이 모두 해외문학임을 알아채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니 책의 디자인을 통해서 힌트를 준 셈이다. 사실 이러한 부제와 디자인이 어떤 고정적인 인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디자인과 만듦새 또한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에, 일정한 사회적 약속을 따르는 것 또한 하나의 소통 방식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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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이 책을 읽을 때 내용 서술의 많은 부분이 저자의 주관적인 이해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쓰였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해외 명작에 담긴 사회적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책을 통해 그에 관한 목소리를 내고자 하고 있다. 또한 여러 사랑의 양상과 인물의 행동 양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표현과 서술에서 일정 부분 정체감(停滯感)을 느꼈다. 

 

* '남자들은 "왜 여자들은 나처럼 착하고 능력 있는 남자가 아니라 늑대 같은 나쁜 놈들을 좋아할까"가 궁금할 수 있다. 여자들은 "왜 남자들은 나처럼 착하고 어여쁜 여자가 아니라 여우 같은 나쁜 년들을 좋아할까"가 궁금할 수 있다.' (27쪽) 

 

  책은 '이성 간의 사랑'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다. 물론 우정이나 정 또한 사랑이며 우정이 사랑으로 혹은 사랑이 우정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서술이 남성과 여성의 사랑에 한정되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성 간의 사랑'만을 다룬 책은 당연히 존재할 수 있지만, '이성 간의 사랑'만을 '사랑'의 범주에 포함해버리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 아닌가. 저자가 조르주 상드의 여성 연인을 '사랑하는 사이'나 '연인', '애인'이 아닌 '동성애 관계'로 함축시킨 것, 그리고 상드가 남성용 의복을 입고 다닌 것을 '남장'이라 칭한 것 또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앞서 인용한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 저자의 주관적 판단하에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대표성을 지닌 존재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남성의 경우 능력을 강조하는 반면 여성의 경우 외모를 강조하고 있어 표현에서부터 차별적 시선이 느껴졌다. 

 

* 진보나 페미니즘이라는 오늘의 잣대로 보면 '카마수트라'에 화낼 내용도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성희롱, 강간에 해당되는 일도 바차야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여성의 노no, 항의, 고통 호소를 남성을 자극하기 위한 '술책' 정도로 여러 번 이해했다. '카마수트라'의 남성은 가정을 꾸린 다음 집안의 왕처럼 군림했다. 눈살을 찌푸릴 만하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카마수트라'는 이례적으로 여성을 존중한 텍스트다. 여성의 욕구를 인정했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의 성욕은 남성보다 여덟 배 강렬하다. "여성은 만족시키기 힘들다"며 남편이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내가 남편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160~161쪽)

 

  지난 시대의 잘못을 마냥 과거의 시선으로만 평가해도 괜찮은 것일까? 여러 문학 작품을 접하면서 딜레마처럼 고민하던 문제 중 하나다. '카마수트라'는 고대 인도의 성애와 성적 쾌락에 관한 문헌이다. 대략 서기 200~300년에 완성되었고 그 원초는 기원전 5,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 당연히 현대인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차별이 만연한 지난날 이례적으로 여성의 욕구를 인정하고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하였다 해서 '카마수트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여성의 욕구를 인정했다는 것이 당시에는 특별한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따라서 '카마수트라'는 당시에는 흔치 않게 여성의 욕구를 인정했지만, 21세기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과거 수직적이었던 남성과 여성 간 관계를 명백히 드러내는 문헌이라고 볼 수 있다. 성희롱, 강간이나 마찬가지인 일이 당연시되었던 시대, 여성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더불어 연인 관계에서 한쪽을 '만족시켜야 할', '만족시켜 주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을 건강하고 바람직하다 보기는 어렵다. 지금은 과거의 최선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차별과 소외를 분명히 인식하고 차별 없는 세상으로 계속 나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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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존중을 바탕으로 한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한 서술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음으로써 해외문학작품에 드러나는 여러 사랑의 형태를 정리해서 볼 수 있었으나 그뿐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작품 속의 내용을 저자 주관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책의 내용을 완벽히 흡수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여성 문제와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현대의 저자가 과거의 (대부분 여성에게) 불합리한 사랑의 계보를 읽었을 때 어떤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또 현대의 사랑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시는 마치 초등학생처럼 관심 있는 여학생에게 일부러 못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보통은 남자가 사랑에 빨리 빠지고 여성은 천천히 빠진다고 한다.' (187쪽) 와 같이 편견을 양산하는 문장 또한 존재한다.

 

  소재가 흥미롭고 문학 작품으로 사랑을 읽는다는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챕터를 읽을 때마다 이 작품에 대한 또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랑이란 인간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것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더불어 문학 작품 내 인물 양상과 시대상에 관한 고찰과 검토, 반성은 지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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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무음에 한하여 아르테 미스터리 14
오리가미 교야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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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모르는 것과 맞닥뜨렸을 때 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상식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배웠죠."
  당장은 믿기 힘들지만 무턱대고 부정할 생각은 없다는 뜻인 듯했다. (중략)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도 했어요." (60~61쪽)


『단지, 무음에 한하여』 오리가미 교야 장편소설, 김은모 옮김, 아르테 펴냄


  그가 볼 수 있는 죽음의 흔적은 생의 마지막 힌트를 남기듯 소리 없이 흩어져 있었다. "확실한 정보를 쥐고 있는 자는 죽은 당사자뿐"이었다. 


  영혼을 보는 탐정, 아마노 하루치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종종 보통 탐정이 해결하기 어려워할 법한 사건을 도맡게 된다. 하루치카는 영혼을 볼 수 있으며 영혼이 있는 곳에서 잠들면 영혼의 기억을 일부 읽어낼 수 있으나, 영혼의 소리를 듣거나 혹은 영혼과 소통할 수는 없다. 영혼이 보이는 장소, 영혼이 보여주는 장면의 조각조각을 맞추어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치카는 그리 뛰어난 탐정은 아니다. 추리력이 아주 뛰어나지도 않고, 영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노련하게 써먹을 만큼 영악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런 점이 매력적이다. 


  "네가 더 탐정에 적합할지 모르겠다. 돌파구가 생긴 건 기쁘지만 프로로 살아갈 자신감이 좀 없어졌어."
  "밖에서 보면 금방 알지만 안에 있으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죠. 그렇게 낙담할 것 없잖아요." (275쪽)


  아주 뛰어난 탐정이 아니기에 사건을 해결하는 데 여러모로 난항을 겪기도 하지만, 하루치카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는 아주 인간적인 탐정이었고 또 타인의 말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그는 『단지, 무음에 한하여』에서 맡은 사건들을 어찌저찌 끝으로 이끌어간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영리한 소년과의 티키타카가 상당히 흥미롭다. 나이는 어리지만 하루치카가 집어내지 못하는 부분을 예리하게 찾아내는 소년은 '평범한 탐정'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밋밋함을 보완해준다. 올해 3월에 일본 출간된 속편 『여름에 기도를: 단지, 무음에 한하여』에서는 탐정과 소년 콤비가 함께 활약한다고 하니, 국내 출간을 기대해볼 만하다. 


  "…하지만 그건 영혼이 최종적으로 거기 정착한다는 뜻이지, 죽은 순간부터 내내 거기에만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을까요. 내가 죽어서 영혼이 되면 시신이 옮겨지는데도 그 자리에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도 시신과 함께 구급차에 타겠죠. 시신이 있는 동안은 그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중략) "…영혼이 어딘가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즉 영혼이 그 장소에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 장소보다 더 강한 결속력을 지닌 뭔가가 존재한다면 영혼이 그쪽으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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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교유서가 어제의책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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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교유서가 펴냄


 "예민한 눈으로 보면, 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간다." (29쪽)


★ 땅거미(gloaming), 닭 가두기(cock-shut), 더듬거리는 시간(groping), 까마귀 시간(crow-time), 낮의 대문(daylight's gate), 올빼미 빛(owl-leet). 영어에는 낮이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연상시키는 관용어가 방대하다. (중략) 낮이나 밤의 어떤 시간대도 이보다 더 풍요로운 어휘를 갖고 있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밤이 내려오는 시간을 가리키는 명칭은 '문 닫을 때'였다. 그것은 집 지키는 개들을 풀어놓은 뒤 문을 닫고 빗장을 거는 시간을 가리킨다. 밤의 불결하고 고약한 공기와 불가사의한 어둠은 현실적이기도 하고 허구이기도 한 미지의 위험을 낳았기 때문이다. (30쪽)


  밤은 오래전부터 부정적 상징이었다. 원초적으로는 시야를 차단하는 불가사의한 '어둠'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낯선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고 좀더 생각해 보면 밤에는 그 어둠을 틈타 갖가지 범죄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일 테다. 지금 우리는 환한 전구와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밤을 살아가고 있으나,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사람들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악령이나 귀신으로 쉽게 오해하곤 했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는 '밤'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밤에서 시작하여 밤의 범죄, 밤의 노동, 밤의 잠과 꿈을 순차적으로 이야기한다. 곱씹어보면 우리는 평소 -밤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시간대에 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는가? 나 또한 밤이 예술 작품을 이해할 때 줄곧 부정적 상징으로 읽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책 덕택에 밤의 특성 때문에 밤에 어떤 사건과 범죄들이 일어났으며 또 사람들이 밤과 밤에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밤에 하는 일과 잠과 꿈에 대한 인식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밤이 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재하게 되었는지, 그럼에도 밤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문학이나 미술 작품을 해석하고 분석할 때 크게 참고가 될 만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교유서가에서 이 책을 완역하여 다시 펴내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한다.


★ 어둠에 대한 본연적인 두려움이 인간의 정신에 언제 처음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최초의 조상이 틀림없이 느꼈을 두려움에 비추어볼 때, 이 가장 오래된 인간의 불안감은 버크가 주장한 것처럼 태곳적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지만 어떤 심리학자들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어둠을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특정의 위험에 공포를 느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밤이 점점 위험과 같은 뜻이 되면서, 초기의 인간은 여러 세대에 걸쳐 본능적인 공포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36쪽)


★ 달빛이 인체에 해롭다는 속설이 있지만, 영국 여러 지역 주민들은 달을 '교구의 랜턴'이라고 불렀다. 보름날이나 그 전후에 달은 반농담으로 제2의 태양에 비유되었다. 때로 사람들은 동이 튼 줄 알고 한밤중에 일어났다가 '가짜 새벽'에 속았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207쪽)


★ 이스트앵글리아의 속어에 따르면, 잠드는 것은 "세상을 잊는 것"이었다. 세라 쿠퍼는 "그 즐거움이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라 해도, 잠은 삶의 축복 가운데 하나로 꼽힐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혼이 고갈되면 우리는 현재 상황에 지쳐, 노인이 죽음을 찾듯 잠을 찾는다."고 그녀는 썼다. (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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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평화 -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 민간전래본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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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다시 읽고 싶을 때,
그리고 새로 읽고 싶을 때
'삼국지평화'

 

용과 범이 다투지 않고 인의를 일으키니(不爭龍虎興仁義)
역적들과 간신들이 꿈속에서도 놀라겠네.(賊子讒臣睡裏驚)

 

『삼국지평화 三國志平話』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펴냄
- 무선 제본

 

# '평화'라는 말은 당시 이야기 공연 장르의 대본이라는 뜻이다. 송나라 이래 중국 민간 연예에서는 특히 장편 역사 이야기 공연을 '강사'라 불렀다. 이 '강사'는 점차 창 없이 이야기로만 공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이들 이야기 공연 장르의 대본은 점차 독서물로 문자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평화'다. (31~32쪽)

 

  어릴 적의 나는 『삼국지』와 함께 자랐다. 만화로 시작해 여러 버전의 『삼국지』를 읽었고 애니메이션도 여러 종류 보았더랬다. 죽이고 빼앗고 함락시키는 이야기를 어찌 그리 좋아했나 싶기도 한데, 생각해보면 어릴 적에도 지금도 『삼국지』를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우애와 신의여서 그랬던 것 같다. 죽고 죽여야 하는 시대에 존재하는 믿음이란 목숨만큼 끈끈한 것이었다. 의형제 관우와 장비가 죽었을 때 유비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도원결의가 얼마나 깊은 우애를 담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비가 조운을 대하는 태도나 군사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는 모습에서는 상대에 대한 존중을 읽어내게 된다. 『삼국지』를 여러 번 읽고 좋아했던 이유는 작품 전체에 내재되어 있는 믿음의 정서 때문이었을 테다. 그래서 이번에 『삼국지평화』를 통해 오래 읽고 좋아했던 삼국지 이야기를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 군사 제갈량은 관우의 죽음을 감히 속이지 못하고 유비에게 천천히 이야기했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땅에 쓰러졌고 몇 번이나 기절했다. (343쪽)
# 세 사람은 함께 군막으로 가서 장비를 죽인 뒤 그의 목을 잘라 오나라에 투항했다. 다음날 유비는 그 사실을 알고 여러 번 기절했다. (346쪽)

 

  『삼국지평화』는 『삼국지』를 다시 읽고 싶을 때, 그리고 새로 읽고 싶을 때 편하게 집어들 수 있는 책이다. 『삼국지평화』는 『삼국지연의』보다 한참 앞서 구전된 내용을 텍스트로 엮은 것인데 연의에 비해서 자세하지는 않으나 시간을 비교적 적게 들여 삼국지 전체 내용을 훑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연의에는 나타나지 않는 몇 가지 독특한 설정이 눈에 띈다. 해제에서 옮긴이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내 개인적으로도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환생 모티프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삼국지』가 『초한지』의 복수극이라는 것인데, 『초한지』에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이바지한 한신, 팽월, 영포가 저승의 판결을 통해 각각 조조, 유비, 손권으로 환생해 한 헌제로 환생한 유방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한신에게 유방에게서의 독립을 말했던 괴철은 제갈량으로 환생하며 판결을 한 저승의 왕은 사마의로 환생한다. (36쪽 참고) 『초한지』의 유방과 항우 이야기는 『삼국지』의 삼국 이야기 이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배경으로 삼국 이야기가 시작되므로 환생 소재는 초한지와 삼국지의 이야기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장비의 활약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장비는 사고가 단순하고 행동이 거친 까닭에 장비 중심의 『삼국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최초의 삼국지 텍스트에서 장비는 주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술을 좋아하고 거친 성정은 그대로지만 도원결의를 주도하는 것도 장비였고 독우 최렴을 죽이고 삼 형제가 산적이 되었을 때도 장비가 앞장섰으며 서주를 잃고 삼 형제가 흩어졌을 때 장비는 '쾌활'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왕으로서 고성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34~35쪽 참고) 개인적으로 어릴 적부터 삼국지를 읽을 때 항상 눈에 밟혔던 인물이 장비와 조운이었는데 - 장판파 전투와 장판교에서의 장비, 아두를 구해 적진을 홀로 탈출한 조운의 모습이 크게 남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 최초 텍스트에서는 장비가 우리가 알던 것보다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삼국지평화』의 이러한 특성에 맞추어 표지에 장비 일러스트를 내세운 점 또한 인상적이다.

 

# "장비의 용력은 천하에 으뜸이다. 내 휘하 관원들도 모두 장비에 비견할 수 없다." 조조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장비는 벼슬이 없지만 거기대장군이라 할 만하다. 내가 동쪽에서 여포를 정벌한 뒤 조정으로 돌아가면 그대에게 바로 벼슬을 내릴 것이다." (143쪽)

 

  상·중·하 3권이 1책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모든 쪽마다 삽화가 들어가 있는 원전에 충실하도록 지면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본문 내용과 일치되게 구성했다. 그 밖에도 인물화, 계보도, 지도 등을 삽입하여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정사 『삼국지』나 소설 『삼국지연의』와 비교하여 ‘삼국 이야기’의 원류와 그 형성과정, 변화과정을 그려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yes24 보도자료 발췌) 본래 삼국지의 팬이었던 사람, 오래전 읽었던 삼국지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사람, 중국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 모두 『삼국지평화』를 한번쯤 읽어 보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삼국 이야기를 기억하는 그리고 기억해나갈 모두를 위한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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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 - 끝나지 않는 전쟁, 자유세계를 위한 싸움
H. R. 맥매스터 지음, 우진하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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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국의 국민들조차 존중하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이웃 국가들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 안드레이 사하로프 Anderi Sakharov (109쪽)

♥︎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종종 완전한 무지보다 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443쪽)


* 『배틀그라운드』에 도달하기까지 교유당 서포터즈 활동을 하며 느낀 인문사회 분야 도서들의 공통점은 제목에 부제가 붙는다는 것이었다. 『가구, 집을 갖추다 : 리빙 인문학, 나만의 문명』, 『청춘, 여름, 꿈의 무대 고시엔 : 100년 역사의 고교야구로 본 일본의 빛과 그림자』, 『마지막 지식인 : 아카데미 시대의 미국 문화』,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 타인을 대상화하는 인간』, 『배틀그라운드 : 끝나지 않는 전쟁, 자유세계를 위한 싸움』 늘어놓고 보면 책의 본 제목만 보았을 때는 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제목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빌리거나 구매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책 선택의 지름길을 제시해놓은 것이 부제라고 볼 수 있겠다. 교유서가와 싱긋 책들의 부제는 본 제목을 설명하면서 책 내용을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다. 책을 읽고 나면 본 제목과 부제를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에 들어가 베스트셀러에 꼽히는 인문사회 분야 도서들의 표지만 쭉 열람해보았다. 대부분의 책들이 부제를 통해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제목과 부제목의 조화가 이루는 향연을 훑고 있자니 그동안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인문서의 경우 강렬한 제목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깔끔단정한 부제목이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모두 교유당 서포터즈 활동 덕택!


* 『배틀그라운드』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과연 이 지구에 '전쟁이 멈출 날'은 존재할까 하는 것이었다. 왜인지 십 년 후에도 이십 년 후에도 '끝나지 않는 전쟁'과 유사한 부제목을 단 책이 나올 것만 같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뉴스를 읽고 있자면 우리 땅에서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마음이 아프고 막막한 기분이 드는데, 문제는 이러한 크고 작은 싸움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고 우리나라 또한 크고 작은 정치적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 폭력과 살인이 발생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이 다른 인간을 악한 행동을 투영하는 존재, 즉 악한 행동을 가해도 되는 존재로 상정하고 그것을 공동체와 집단으로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의 '악'이란 주관성을 띠는 수단으로서, 많은 경우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사용된다. 이는 인간이 전쟁과 싸움을 멈추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며 따라서 『배틀그라운드』에 등장하는 정치 이야기는 일종의 고질적인 현상이자 인류가 해결해나가야 할 총체적인 과제에 관한 서술이다. 


* 자밀 자키는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스스로는 잘 알아차리지 못하며 따라서 아직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행동이다. 또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거나 혹은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게 될 경우, 우리는 오늘 당장 어떤 희생을 치르거나 투자를 할 가능성이 적(572쪽)"다고 말한다. 이는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에 사용되는 핵의 장기적인 위험성 그리고 기후위기의 고질적 문제까지 포괄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맥매스터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시선을 읽음으로써 나 또한 전쟁, 세계 정세 그리고 미래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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