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베이비
김의경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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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 강문정, 38세 한지은, 37세 윤소라, 44세 이혜경, 37세 장은하, 46세 김정효. 난임으로 아기천사병원에 다니고 있는 예비엄마들의 단톡방 <헬로 베이비>를 둘러싼 이 소설의 중간 제목은 (정효의 아랫집에 사는 40세 최설주를 제외하고) 다섯 명의 나이와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름 앞에 적혀 있는 이름은 35세 이상의 노산이자 완경이 찾아오기 전의 나이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겠구나 싶으면서, 생애주기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요구받는지를 보여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여야 하는데 엄마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 같달까.
<헬로 베이비>에서는 배우자를 포함해 어떤 가족구성원은 물론 친구, 직장 동료들에게도 이해받거나 공감받지 못하면서도 아이를 원하는 난임 여성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돌보며 임신을 기다린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비소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낯설지 않은 전개가 펼쳐진다. 고사난자, AMH(항뮬러관호르몬) 수치, 바이오아지니나액, 실시간배아관찰경처럼 처음 듣는 용어도 있었지만, 나 역시 자궁난관조영술을 받은 경험이 있고 혜경의 자궁근종 수술 후 남편의 반응(97-102쪽) 또한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의 경험이 주변에 수두룩해도 공론화되지 않는 것 못지않게 숱한 난임 여성들의 목소리도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국가에서는 ‘저출생’ 문제로만 가임기 여성을 호출한다. 난임휴가를 사용하는 직원을 저격하는 직장 익명게시판(59-60쪽)에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사용하는 직원에게도 달릴 것이고, 아이를 낳으라고 독촉하는 친정엄마나 난임병원에 다닌다는 사실을 시댁이 알고 있다는 사실(120-121쪽)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듯 아이를 이렇게 키우면 된다 안된다 이번 주말엔 올 거냐 영상통화를 하자 참견질로 피곤한 건 아이를 낳고서도 매한가지다. 출산을 여성의 의무이자 책임으로 짐 지우는 가부장의 틀은 기혼이든 비혼이든 다를 것 없는 감옥이다.
아이를 왜 안 낳느냐는 질문도 왜 낳느냐는 질문도 과도기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지로 웃어넘길 수 있는 언젠가가 찾아올까. 사람은 상황마다 시기마다 하나의 질문에도 수없이 대답이 바뀔 수 있고, 실상 어떤 질문은 진지한 물음이기보다 비난이거나 조롱인 경우도 있다. 배려나 존중이 늘 옳기보다 약자를 대하는 또 다른 차별일 때가 있는 것처럼, 난임 여성을 향한 우리의 시선 역시 이중적이었던 것 같다. 여성을 돕는 이들이 같은 처지의 여성뿐이었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되뇔 때마다 슬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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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몸은 너의 것이야 - 경계존중으로 시작하는 우리 아이 성교육 부모 가이드
엘리자베스 슈뢰더 지음, 신소희 옮김 / 수오서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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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운영하는 폭력예방 통합교육 전문강사 양성과정을 수료했다. 총 4단계 150시간의 교육을 이수하고 필기시험과 위촉평가를 통과하면 전문강사로 위촉될 수 있다. 위촉된 전문강사는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라 폭력 예방교육 의무대상기관의 필수 교육대상을 교육할 수 있고 전문강사에게 교육을 받는 것이 의무대상기관의 실적 점검에서 교육방법 상 배점이 높기 때문에, 폭력예방교육을 하려는 강사들에게 이점이 있다. 해당 과정을 수강하면서 성폭력, 가정폭력, 성희롱, 성매매 4개 분야를 중심으로 젠더폭력의 구조와 현실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서류접수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많고, 위촉평가 합격률이 2022년 당시와 전 해 기준으로 30% 가량이라고 해서 긴장을 했는데, 다행히 한 해에 수료하게 되었다.

성폭력 예방교육에 관해 학습하면서 가장 자주 들었던 표현이 '경계 존중'과 '동의'였다. 특히 (각급학교는 의무대상기관이므로) 아동 대상 폭력예방교육의 경우 이 개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다만 이를 전달하는 매개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청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전할지는 까다로웠다. 기존 표준강의안도 있고 업무 차 아동이나 양육자 대상 폭력예방교육을 자체점검하면서 강사들의 강의도 자주 듣게 되는데 흔쾌히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이 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전문용어나 개념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과정에서 듣는 사람 입장에서 허공에 뜬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폭력예방교육이 보건 및 위생 교육이나 안전 교육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잦았다.
성교육 교육자이자 훈련가인 엘리자베스 슈뢰더가 쓴 <너의 몸은 너의 것이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내가 배웠던 폭력예방교육을 아동과 양육자 관점에서 완벽에 가깝게 소화하고 있었다. 일례로 "경계"를 '내 영역을 만드는 울타리'라고 설명하면서, "네가 혼자 있고 싶어서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면, 그게 바로 경계를 만든 거야. 누군가 경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일단 문을 두드려야 해. 그러면 너는 '들어와도 돼'라든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라고 대답할 권리가 있어'(12쪽)"라고 친절하게 사례를 든다. 매번 도로의 차선을 예로 들면서 '차는 인도로 오면 안 되요. 차는 차선을 지켜가며 달려야 해요.'와 같은 강의를 들었었는데, 그보다 훨씬 청자 중심적이면서도 일상에 가까운 사례라 귀에 쏙 들어왔다.
책 전반적으로 소아과 의사가 진찰하듯 온화하고 친절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를 간결하게 구사하는 점도 장점이다. 각 단락 별로 핵심요약과 양육자가 해야 하는 발언의 예시를 든 것도 도움이 되었다. "아이가 어리거나 신경다양성을 지녔다면 시각 자료를 활용하세요(78쪽)"과 같이 다양한 아동과 양육자의 상황을 고려한 점도 좋았다. "공감과 동감의 차이(106쪽)"처럼 어른들도 구분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들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동시에 '좋은' 접촉과 '나쁜' 접촉이라는 표현의 위험성을 예민하게 포착하면서 차라리 "아이에게 괜찮지 않은, 바로 부모에게 와서 알려야 할 접촉들을 일러주는 쪽을 추천(55쪽)"하는 것처럼 언어와 상황을 민감하게 다루는 지점도 인상 깊었다.
부제에서 말하듯 이 책은 "우리 아이 성교육 부모 가이드"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영역과 무관하게 전문가들이 양육자에게 요구하는 자세는 일관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목차에서처럼 "아이는 부모의 거울(10)"이고, 양육자는 아이가 설정한 경계를 존중(9)"해야 하며, "믿을 수 있는 어른 네트워크(11)"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같은 것 말이다. 그 방법도 아주 특별하다기보다 "실제 사례를 활용(134쪽)"해서 "반복, 반복, 반복(133쪽)"해야 하고, "항상 아이의 의사를 확인(121쪽)"하면서 양육자부터 "언행일치를 실천(67쪽)"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다시 태어나는 일과 같다거나 제2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비유는 사람마다 다르게 활용하겠지만, 내 경우는 지금까지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이자 새롭게 배워야 하는 강력한 동기인 것 같다. 번역도 감수도 훌륭한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배우자에게도 읽어보라고 추천할 수 있을 만큼 가볍고 쉽게 읽힌다는 것 그럼에도 그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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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학대하는 사회, 존중하는 사회 - 아동학대를 멈추고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길을 찾아 민들레 선집 13
부추 외 지음, 민들레 편집실 엮음 / 민들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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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독하고나서 무심결에 책을 후루룩 넘기며 17편의 글이 격월간 민들레에 실린 시기를 살펴봤다. 20년부터 22년까지 만 3년이 채 안 되는 시기, 딱 내가 영아 양육자로 산 시기와 중첩됐다. 맞아, 내가 출산하고 맞이한 첫 여성의 날 나를 위해 샀던 책이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사계절, 2020)였지. 함께 걷던 길에 어린이가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길가의 어린이에게 먼저 미소 지으며 인사하고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고 있다니. 최근 3년 간 어린이에 관해서만큼은 내 시선과 태도가 상당히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책 속에는 몇 차례 아동학대 주요통계가 등장한다. 2021년 보건복지부 통계를 살펴보니 피해아동과의 관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학대행위자는 부모(83.7%)였다. 여러 사람들이 아동학대 행위자가 부모라는 점에서 소위 제가 낳고 기르는 자식을 학대할 수 있느냐는 표현으로 어떻게 보호의 의무가 있는 부모가 가해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만, 나는 실상 그만큼 아이를 돌보고 기르는 역할이 부모에게 치중되어 있는 사회현실을 보여주는 통계라고 생각했다. 양육자라면 누구나 온 시간과 체력을 갈아넣어 아이를 돌봐도 보상은 커녕 아이에 대한 온갖 책임만 짐 지우는 통념에 숨막혀 해본 적 있지 않은가.

그럼 아이를 부모가 키우지 누가 돌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취약하거나 고립된 이들이 결국 본인보다 더 약한 이에게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 악순환이 반복될 건 눈에 뻔하다. 오히려 학대행위자의 성별 중 남성(54.7%)이 여성(45.3%)보다 많다는 점이 더 신기했다. 한국사회에서 대다수의 관계에서 단절된 채 양육을 옴팡 뒤집어 쓰고 있는 상당수가 여성인데, 아동과 함께 하는 시공간의 비중만큼 비례해 학대가 발생한다면 행위자의 비율은 여성이 훨씬 높아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상대적으로 더 적은 시간 아동과 같이 있는 남성이 왜 여성보다 더 많이 아동을 학대하는지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처음에 "아동"을 중점에 두고 읽었던 책은 읽어나갈수록 어떤 단어로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따옴표 안에는 여성으로, 노인으로, 장애인으로 바꾸어도 실상 크게 무방하지 않았다. 아이를 학대하는 사회는 여성도 노인도 장애인도 학대할 것이고, 아이를 존중하는 사회는 역시 그들 역시 존중하며 동등한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저자들이 보여주는 사례는 절망이기도 하지만 희망이기도 했다. 아동 청소년 역시 대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고 관심을 잃지 않는 등의 각각의 노력들이 전국민의 관심으로 모여 아동청소년법이 개정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물론 허술하거나 행정 편의의 시스템도 여전하지만 체계 또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니.

어린이와 산다는 건 내 삶에서 어린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집 어린이에게 내가 좋은 어른이라고, 그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우리집 어린이의 무수한 용서와 애정으로 좋은 어른이 될 기회를 얻은 셈이다. 남은 하루만큼이라도 어린이와 서로 존중하는 시간을 보내야지, 작심삼일의 다짐을 앞으로도 계속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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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성교육
김수진 외 지음, 성평등교육활동가 모임 모들 기획 / 학이시습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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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들어가기 전 "포괄적 성교육, 이어 말하기"라는 재영 대표저자의 글 제목처럼, 이 책은 "포괄적 성교육(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을 실천하는 교사, 전문강사, 양육자, 기업인, 활동가의 현장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종합적' 성교육도 낯선데 '포괄적' 성교육이라는 어색한 용어를 붙잡고 고군분투 중인 그들의 발언들에서 한국 사회에서 성교육의 현재와 함께 절망과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솔직히 포괄적 성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성교육조차 들어본 기억이 희미하다. 나 역시 성교육을 떠올려보면 중학교 시절 남학생들은 운동장에 축구하라고 내보내고 여학생들만 교실에 남아 양호교사가 월경대를 아무렇게나 휴지통에 버리면 지저분하니 이렇게 말아서 버려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던 것 정도가 생각난다. 평생을 성적 존재로 살아왔음에도 그 어떤 시기에도 성과 관련해 구체적이거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을 받았던 일이 딱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인상적이었던 무언가는 없었던 듯하다. 출산을 앞두고 필요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맘까페를 들락날락할 때마다 어떻게 이토록 많은 엄마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댓글을 달아주는 건지 놀랐던 일 정도가 떠오르니 말이다.

출산한 지 백일쯤 지나서 접속한 온라인 부너미 모임에 참여한 어느 분이 소개해주셔서 검색해 읽어 본 <국제 성교육 가이드>는 놀라웠다. 상당히 광범위하면서도 명료하게 학습목표가 진술되어 있었다. 성적 존재로 산다는 것을 이토록 다채롭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구나 싶었다. 이 책 <포괄적 성교육>은 나는 글자로 읽었던 '포괄적 성교육'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의 일종의 증언 같았다.

성적 존재 당사자인 나의 성적 욕망과 성적 행동에 대해서 내가 참 무지하구나 나 역시 성교육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실감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배울수록 내가 싸워야 할 가장 높은 장벽은 '기존의 나'라는 것(141쪽)"을 절감하게 됐다. 양육자로서 한 세대가 지나도록 성교육 현장의 변화가 미미하며 공교육의 장벽은 견고하고 사회의 변화에 둔감하다는 현실을 생생한 사례로 읽으니 갑갑하기도 했다. 언제까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은 포괄적 성교육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설명하고 홍보한다. 개인의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국가 단위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 책이 교육부나 교육청 고위관리자들의 책상 위에 한 부씩 놓였으면 좋겠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지만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고 먼저 나서주는 이들이 있어 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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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싸한 기린의 세계 - 스물하나, 여자 아닌 사람이 되었다! 오 마이 갓. 이거 살맛 나잖아?
작가1 지음 / 든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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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알고리즘에 걸려 자연스럽게 접하는 책, 힘들여 이거 꼭 읽어보고 싶은데 여기 있었네 하고 만나서 반가운 책. <알싸한 기린의 세계>는 평소 내가 주로 읽게 되는 그런 류의 책은 아니었다. 20대 초반 여성이 인스타그램에 연재한 만화를 묶은 책. 맛도 멋도 뺀 표현이지만, 그래도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라는 온라인 서점의 분류보단 낫지 않을까 싶다. "만화 > 웹툰/카툰에세이"도 아니고 "정치 > 사회학 > 여성학"도 아니고. 여하튼 누군가 굳이 추천하지 않았다면 가시권 안에 들기 어려웠을 형태의 책을 읽게 되었다. 결론은, 재미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작가의 발화를 담은 대화상자 안의 글씨체와 말투였다. 제목과 동일한 흘림체 성향의 글씨체를 쓰고 주로 문어체를 쓴다. 문장 자체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어떤 주제와 논리를 고민해보고 그걸 어떻게 발화하고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했다는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평소 어투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20대 초반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이자 "비혼이자 비출산주의 (241쪽, 교양 수업 발표)"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면 예측가능한 폭언에 가까운 비난과 비판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입장과 논거를 다듬는 지속적인 훈련의 결과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었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건 주인공인 기린의 표정이 상당히 풍성하다는 점이다. 만화임에도 지문의 비중이 높고 배경이 거의 없는 편이고 선이나 색이 단순해 그림은 자못 단조로운데 주인공의 표정만큼은 다채로웠다. 이 만화에서 가장 복잡한 선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주인공의 표정인데 그만큼 주인공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딸에게 대리엄마를 요구하는 가정(1장. 딸과 아들), 우연하게 접하게 되어 빠져나오지 않은 페미니스트로의 입문(3장. 그때 그시절) 등 다루는 소재는 친근하고 익숙한데 이를 마주하는 작가의 태도가 친밀하면서도 역동적이어서 청년들에게 페미니스트 입문서를 추천한다면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부담이 덜 하겠다 싶었다.

마지막으로 몇몇 에피소드 마지막에 "세상의 모든 기린이들에게"라는 문장 모음이 참 좋았다. 아마 작가가 받은 응원의 글 몇 개를 추려 담은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 시대를 사는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든든할 만한 소소한 위로와 격려를 담았다. 읽어나갈 때마다 이번 에피소드엔 "세상의 모든 기린이들에게"가 있나 찾아보게 되고, 이것만 따로 모아 어디엔가 적어두고 기운 없을 때마다 꺼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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