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학로 - 성균관 유생과 반촌 사람들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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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으로 유학을 가르치고 국가의 관리가 될 인재를 양성하던 최고 국립 교육기관이다. 이 성균관이 자리하고 있던 일대를 대학로라고 했다. 성균관이 있던 숭교방은 대학가라는 이름에 부합하고, 대체로 현재의 명륜동과 혜화동, 대학로 일대 마을이다. 성균관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학문과 관련된 생활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서책을 파는 곳, 붓과 종이 등 문방구를 파는 상점, 유생들이 머물던 하숙집과 여관 등이 생겨나면서 일종의 학문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들이 머물면서 서로 교류하고 학문적 토론을 나누며, 선후배 관계 속에서 학문과 예절을 배운다. 지금의 대학가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대학로 일대는 조선시대 말로 바꿔 표현하면 반촌이라고 한다. '반촌'은 성균관이 있는 동네 또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 중기 이후 대한제국기까지 불렸던 역사적 명칭이다.


<조선의 대학로>에서는 성균관과 반촌, 반촌에 사는 사람들, 반촌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반인의 흥망성쇠까지 반촌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 반촌의 주민은 반인, 반민, 관인, 관사람 등으로 불렸다. 호칭은 달랐지만 성균관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인은 공노비 신분으로 반촌에 거주하면서 성균관의 온갖 업무를 맡았고, 성균관 노비는 면천을 허용하지 않았다. 노비 신분이기는 하나 반인을 단순하게 노비로만 단정하기 어렵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지위가 상당한 수준까지 올랐고, 양반 신분의 유생이나 조정 관료가 그들을 함부로 부리지 못했다. 주민이 늘어나면서 집터가 부족해지는 문제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거주 이전 제한이 반인의 주거 때문에 핵심적 안건으로 등장한다. 반인을 성균관 업무에 묶어두기 위해서 그들을 반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막는 강제가 필요했다. 왜 반인을 성균관에 묶어두었냐면 성균관 이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좁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생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성균관 행사와 의식을 준비하는 등 반촌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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