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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사전
허진열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7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종교가 없는 내가, 목사님이 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릴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좋은 책은 두꺼운 분량도, 예쁜 편집도, 화려한 삽화도 아니라는 것을.
저자인 허진열 목사님의 딸은 담도 폐쇄증으로 10년 동안 세 번이나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중 불안에 떠는 목사님에게 새벽에도 딸의 수술이 잘 되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문자가 이어졌다. 이런 걸 동행이라고 하는구나 하며 감동받았다.
이 책은 ㄱ부터 ㅎ까지 14 개의 단어로 구성돼 있다. ㄱ기다림, ㄴ내려놓음, ㄷ동행, ㄹ라파, ㅁ맡김, ㅂ붙듬, ㅅ섭리, ㅇ어둠, ㅈ전화위복, ㅊ채움, ㅋ카이로스, ㅌ통곡, ㅍ평안, ㅎ희망이다.
고난이 목사님의 삶에 들이밀었던 단어들이라고 한다. 내가 인상 깊었던 단어 5개를 뽑아봤다.
1. 라파(רָפָא)
라파는 히브리어로 치유하다 뜻이다. 목사님은 딸의 수술이 잘 돼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말에 벅찬 기쁨을 느꼈고, 딸뿐 아니라 목사님도 치유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치유되면 한 가족이 치유되고, 한 가족이 치유되면 각자가 맡은 학교와 일터가 치유되는, 라파는 도미노 같단 생각이 들었다.
치유는 몸이 낫는 것뿐 아니라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도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관계, 고난과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가 함께 회복되는 것. 이런 치유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가 보다.
2. 맡김
목사님은 딸이 크루아상을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아빠에게 건넨 순간, 문제 해결의 책임이 아빠에게로 넘어갔다고 했다. 혼자 끌어안고 있으면 내 짐이지만, 믿고 맡기는 순간 그 무게는 나를 사랑하는 존재의 몫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하나님께 모든 걸 다 맡긴다고 기도 해놓고, 나가면서 다시 그 짐을 찾아가지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맡긴다는 건 상대의 시간과 방식을 기다려 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빠에게 크루아상을 부탁하고, 믿고, 딸은 핸드폰으로 빵집조차 검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종교가 없어도, 내가 믿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맡겨본 경험이 있다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3. 섭리
섭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이끌어가는 뜻과 계획이다. 목사님은 섭리를 거창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섭리가 다르게 보였다고 한다.
하나님은 기적보다 사람을 더 자주 사용하신다는 것.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마침 그 순간 건네진 말 한마디가 고난 속에서 보이기 시작한 섭리의 진짜 의미였다.
딸의 투병생활 동안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던 날들도 많았지만, 돌아보면 그 자리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밥 한 그릇으로, 문자 한 통으로, 꽃 한 다발로도 오셨던 것이다. 섭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람이 위로였고, 사람이 힘이며, 사람이 선물이었다.
4. 채움
"내가 가득 차 있을 때는 그분이 채울 자리가 없다. 채움은 내 것을 비워 드리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한 과부가 엘리사를 찾아왔다. 남편이 남긴 빚을 갚지 못하면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울며 호소하는 그녀에게 "네 집에 무엇이 남았느냐"고 물었다. 기름 한 그릇이 있다고 했다.
엘리사는 이웃에게 빈 그릇을 최대한 많이 빌려오게 한 뒤, 그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했다. 준비한 그릇의 수만큼 기름이 채워졌다.
여기서 포인트는 기름이 아니라 빈 그릇이 아닐까. 그릇이 없으면 기름을 채울 수 없듯,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의 그릇을 먼저 비워내신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처음엔 상실처럼 느꼈지만, 그것은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기 위한 섭리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5. 카이로스(καιρός)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특별한 은혜의 때를 말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χρόνος)와 구별되는 결정적 순간을 의미한다.
고난이 힘든 건 끝을 알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 아닐까. 끝을 알 수만 있다면 희망 하나로 버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끝을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크로노스가 길어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그분의 시간표에 맞춰 올테니까.
각자가 통과하고 있는 크로노스의 끝에는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의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믿고 오늘을 견뎌야 한다.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고난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싶다.
목사님은 모든 것을 비운 채움의 끝에서 라파, 즉 치유의 하나님을 만났다. 고난 사전을 읽고 나니, 하나님은 내 고난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 속을 함께 걸으며 나를 채우고 회복시키시는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고난 속에서 "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를 묻고 있는 모든 이에게 생생한 동행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