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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혜린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유명한 소설을 이제서야 읽으며, 데미안이 주인공이 아니라 에밀 싱클레어가 주인공이라는 것과, 막스 데미안의 데미안은 이름이 아니라 이 씨, 김 씨 같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막스는 독일에서 흔한 이름이고, 데미안이라는 성은 우리나라의 남궁씨처럼 희귀한 성이라고 한다.
<데미안>은 소년 싱클레어가 멘토인 막스 데미안의 도음으로 진정한 자아를 찾아 홀로서기를 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깊이 있는 자아 발견의 여정을 다루고 있어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장 소설이 된 것 같다.
등장인물 이름은 어떤 소설이나 먼저 알아두고 읽으면 좋은데,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워낙 유명하니, 이 책을 읽기 전에 풀네임을 알아두면 어떨까 싶다. 데미안의 엄마인 에바 부인이 데미안을 부를 때 "막스"라고 하는데, 하도 '데미안'에만 익숙해서 막스와 잘 매칭이 안 됐었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가 공원에서 만났던 이상적인 여성상이라 등장인물에서 제외했다. 싱클레어는 단테를 읽은 적은 없지만 어떤 영국 그림에서 베아트리체를 보았다고 한다. 나중에 그녀를 생각하면서 그렸는데 그 얼굴은 데미안이었다.
이 책이 #전혜린번역복원본 이라고 해도 나는 어릴 때 읽어보고 처음 읽는 것이라 다른 번역본과의 비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읽다보면 고호를 고흐로 고치고, 까스등을 가스등으로 고치는 등 맞춤법을 바꾸기는 했어도 살짝 옛날식 표현이 있어서 더 정감이 갔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맘에 든 것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 새의 이름인 아프락사스다. 오디오북을 듣다보면 아브락사스로 표현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건 아프락사스였기 때문에 그 표기가 아주 반가웠다.
에밀 싱클레어(Emil Sinclair) : 나는 이제까지 주인공이 데미안인 줄 알았다! 에밀 싱클레어가 주인공이니까 데미안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지인들에게 질문해 보자!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에밀 싱클레어다. 우리는 싱클레어의 성장과정을 통해 정신적 성숙의 여정인 알 깨기의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경험한다. '밝은 세계'는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 속에 있는 삶이며, '어두운 세계'는 거짓말, 폭력, 욕망으로 가득 찬 세계다. 싱클레어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는다.
막스 데미안(Max Demian) : 주인공 싱클레어의 학교 친구이자 싱클레어가 기존 세계의 관념에 의문을 품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이끌어 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싱클레어가 자신만의 길을 찾고,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선 내면의 참 '나'인 아프락사스의 세계로 안내한다. 중요한 건 안내자가 아니라 그 안내자인 데미안을 따라 아프락사스의 경지에 이르는 싱클레어다.
에바 부인(Frau Eva) : 막스 데미안의 어머니. 싱클레어가 꿈꾸는 이상적인 여성상이자 선과 악을 아우르는 '아프락사스'의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다. 모든 본질의 어머니이자 무의식의 세계를 상징한다.
피스토리우스(Pistorius) : 오르간 연주자이자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싱클레어에게 아프락사스(Abraxas)라는 신을 알려준다. 그리스어의 b 발음은 ㅂ과 ㅍ 둘 다 가능하므로, 아프락사스, 아브락사스 둘 다 맞는 표기이다. 이 책에는 아프락사스로 표기되어 있다.
아프락사스는 선과 악, 빛과 어둠,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포괄하는 신이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지만, 그의 생각이 과거에 갇혀 있음을 알고, 그를 초월해서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프란츠 크로머(Franz Kromer) :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불량소년. 양복집 아들로 아버지는 주정꾼이었고, 그의 온 가족은 평이 좋지 못했다. 책에는 '그는 명령했고, 그것이 오래된 관습인 듯이 우리는 명령대로 복종했다.'고 묘사된 것처럼, 지금의 학폭이나 괴롭힘이 뿌리 깊은 문제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인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그의 노예가 되어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데미안을 만나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
헤르만 헤세는 이런 싱클레어의 내면적 갈등을 아주 섬세하게 보여줌으로써,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게 프란츠 크로머 같은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부와 성적을 강요하는 부모님의 기대와 그 기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트라이>라는 드라마를 보는데 "져도 괜찮아"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우리 엄마가 이런 표현을 할 줄 알았으면 학창 시절을 그렇게 힘들게 보내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싶었다. 져도 괜찮아, 공부 못해도 괜찮아, 좋아하는 걸 이것저것 해 보면서 네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라는 말을 들었더라면...
이것이 문학의 힘이 아닐까?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은, 고독하고 힘겨운 투쟁인 동시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더 넓은 세상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넓은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 일주를 하면서 사는 삶을 '더 넓은 세상에서 산다'고만할 수 없듯이.
더 넓은 세상, 데미안이 추구하는 알을 깨고 나온 세계란, 단순한 세계라는 공간이 아닌 정신적인 상태라고 본다.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림은 있지만 빨리 회복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과 더불어, 에피쿠로스 학파가 주장하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동요가 없는 평온한 상태인 아타락시아(Ataraxia), 즉 평정심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공부 못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서 통합되어 버리는 부모님 세대의 알을 깨뜨리게 되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이제 나는 내 자녀에게 그런 말을 들려줄 수 있는 엄마가 된 것이다. 이것이 아프락사스가 아닐까?
데미안의 대표 문장인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p.158) 는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면의 자아이자 진정한 목소리로, 싱클레어가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준다.
싱클레어는 전쟁 중 부상을 입고 데미안과 재회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때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데미안과 닮은 자신을 발견한다. 데미안은 자신이 도달해야 할 이상이었던 것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결말은,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한 자아를 완성했음을 의미한다.
데미안의 마지막 문장을 '설민석 강독' 유튜브 동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일반 번역본과 전혜린이 번역한 이 책을 비교해 봤다.
내가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서 나 자신 안으로 완전히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모습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나는 그냥 몸을 숙여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 모습은 이제 완전히 그와 같았다. 내 친구이며 길 안내자인 그 사람과. (일반 번역, 유튜브 영상 참고)
내가 때때로 열쇠를 발견하고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나 자신 속으로 완전히 내려가면, 나는 검은 거울 위에 몸을 구부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인제는 완전히 '그'와 같은 -내 친구이며 지도자인 '그'와 같은 나 자신의 모습을 거기서 본다. (p.293, 전혜린 번역)
전혜린 번역은 '그(데미안)'를 더 강조한 느낌이 든다. 데미안은 우리에게 자아를 발견하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 자아란 세상의 기준을 떠나, 나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가치관을 따르는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성숙한 자아를 가진다는 것은,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가 말하는 데미안(Max Demian)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Übermensch)과 비슷한 것 같다.
"네가 어떤 사람을 아주 자세히 살펴본다면 너는 그 자신보다 그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돼." - p.96
이 문장은 단순히 관심 가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관찰하는 중요성까지 말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데미안>은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닌 것이다. 힘들 때마다 곁에 두고 읽으면, 스스로의 내면에서 세상의 껍질을 깨부수고 진정한 나를 찾아 그 길을 가라는 데미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