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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이다. 9세 때 어머니를 잃은 트라우마와, 대학 시절 자살을 시도한 후, 정신병원에 약 3년간 입원했던 경험을 가진 수잰의 에세이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어떻게 독서와 읽기로 치유할 수 있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조울증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저자의 삶을 이야기하며, 여성, 인종차별, 독서와 글쓰기, 정신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관한 자신만의 예리한 통찰과 견해를 펼친다.
원제인 Committed에는 수용되다는 뜻과 전념하는의 2가지 뜻이 있다. 수잰 스캔런은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던(Committed) 경험과 삶의 의미(Meaning)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전념한(Committed) 삶이라는 2가지 뜻을 모두 담아 이 책의 제목을 정한 것이 아닐까?
작가는 처음에 조현병으로 오진을 받았고, 이후 히스테리 진단을 받고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다. 그 당시 여성 환자에게는 히스테리라는 진단이 너무 쉽게 내려졌다고 비판한다. 그녀의 고통은 히스테리가 아니라 외로움, 슬픔,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수잰은 뉴욕주립 정신의학 연구소의 분석가들의 형식적인 차가운 대화와 비인간적인 형식으로만 가득한 것에 또 한 번 상처를 받는다. 결국 그녀는 독서와 글쓰기로 자신의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약물이나 형식적인 치료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치유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진단명이 아니다'라고 그녀는 외친다. 진단명이 개인의 정체성이 되면, 그 사람의 급진적이거나 예술가적인 면모 등은 진단명에 묻혀버린다.
일례로 어떤 A라는 여성이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고 치자. 그러면 가족부터 A를 광녀(madwaman)취급 할 것이고, 친구도, 사회의 시선도, A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저 조현병 환자일 뿐이다. 만약 A에게 예술적인 천재성과 탁월함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저 광기로 취급된다. 진단명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정신병원에서 정신과 환자로 지내는데 점점 익숙해진다. 죽음을 계획하거나 정신과 의사들과 대화하는 일도 더 능숙해진다. 주립병원은 학생 보험을 적용받아 모든 게 공짜였다. 그러니 떠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형식적이나마 이런 시설이 있어서 자살은 막지 않았나 긍정적으로 생각해 봤다.
그녀는 자신이 외로웠고, 슬펐으며, 미친 상태였거나 미친 척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에게 과거 트라우마를 기억해 내도록 강요했다. 그녀는 의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환상적인 트라우마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관심을 얻기 위해 연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한다.
광기를 연기하는 것은 더 역동적이고 더 진정한 존재가 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햄릿은 미친 것일까? 아니면 미친 척하는 것일까? 누가 그 차이를 알 수 있을까?
병원에 있는 여자들끼리는 서로 경쟁하듯 자해하며 서로를 부추겼고, 환자로서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소리치거나, 침묵하거나, 광분하거나, 사라질 수도 있었다.
환자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병원에서 배웠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사춘기 때 어긋나는 아이들이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런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부모의 나쁜 관심이라도 받고 싶은 것이다. 이곳 환자들 역시 의사의 나쁜 관심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p.52 그 일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맥락이었다. 그 무엇도 고립된 채 존재하는 건 없으며, 우리는 맥락 속에, 그 순간이라는 맥락과 서로의 존재라는 맥락 속에 존재했다.
뉴욕주립 정신의학 연구소는 뉴욕주가 관리하는 곳으로, 그 병원의 의학 대학원 학생들을 교육했다. 즉 그 병원은 커리큘럼이었고 훈련장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석 달에 한 번씩 의사들이 교체됐다. 한 의사가 떠나면 또 새로운 의사가 도착했다.
환자들은 한 의사에게 애착을 느꼈다가 3개월에 한 번씩 작별했다. 이것을 치유될 때까지 반복한다. 이것은 이런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루어진 인생을 훈련하는 일이었다. 애착을 형성했다가 놓아보내기를 반복적으로 할 수 있다면, 남은 평생도 그렇게 할 준비가 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훈련이기도 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허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죽으려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엄마. 살아 있는 일조차 잘 못하는 엄마가 부끄러웠던 수잰은 엄마가 돌아가셔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9살짜리 아이는 이미 슬픔에서 스스로를 분리하는 법을 터득한 뒤였기 때문이다. 사별의 슬픔을 매 순간 느낄 수는 없다. 사람이 항상 슬플 수는 없으니까. 그 무엇도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지라도 삶은 계속된다.
이 애착과 놓아 보내기는 돌아가신 엄마를 놓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훈련이었다고 한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엄마에 대한 저자의 기억들이었다. 앞으로 사랑하고 잃게 될 모든 사람들에 대한 훈련을 이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병원에 있던 환자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는데, 백인 여자들이 더 많은 것은, 백인 우월주의의 결과였다. 백인 여자들의 고통이 다른 이들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다는 암묵적 메시지는, 병원 직원들이 대부분 흑인이며 아무도 그들의 고통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저임금 노동자인 것과 대조적이었다.
저자는 그 병원 시스템 안에서 보낸 시간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누군가를 사귀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관계가 가짜인 것을 알았거나, 구멍투성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과 좀 비슷했다고 한다.
p.354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일단 그걸 꿰뚫어 보고 나면 떠나야 한다.
수잰의 전환점은 자살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그 결정은 예리하고 명료했으며 그걸로 끝이었다. 자살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결정. 그것은 치료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노트에 미친 듯이 글을 썼다. 이 책에서 하이퍼그라피아라는 단어를 배웠다.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싶은 상태를 말한다. 이 노트를 통해 저자는 젊은 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말한다. 때로는 그 젊은 여자를 돕고 싶었다고. 너무나도 그 여자의 엄마가 되어 주고 싶었고, 때로는 미쳤다고, 참아주기 힘들다고,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다고.
지금이라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며 후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과거의 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에서부터 수잰은 스스로를 치료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82 미친 여자의 자유는 꿈이기도 하고 덫이기도 하다. -수전 손택
수잰에게는 어쩌면 사회와 단절된 정신병원에서의 삶이 독서와 글쓰기로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신적 자유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에서는 낙인이 찍힌다. 사회에서 영구히 제외되어버리는 덫에 갇힌다. 직장, 결혼, 대인관계 등 과연 나라면 정신병원에서 나왔다는 사람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과 제정신인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욕망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멀쩡한 사람이니까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이 책을 읽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이 사람일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우린 모두 아프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영원히 살아남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내가 너보다 조금 더 건강하면 뭐하고,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제정신이면 뭐 하겠는가.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끼리 상처와 아픔을 덮어주는 것이 더 기쁘지 않은가?
1990년대부터 정신과 약물이 정신 질환 치료의 새로운 방법이 되었고, 제약 회사의 마케팅이 병원에 침투했다. 이로 인해 정신 질환 환자는 소비자가 되고, 환자들이 의사에게 특정 약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었다.
항우울제는 복용했을 때 슬픔을 바로 멈춰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행복이 느껴지지도 않았다는 말을 들으니, 마치 고혈압 약이나 고지혈증 약으로, 증상만 완화시키는 미봉책 같은 것이 정신과 약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낫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을 모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 격렬한 광기의 순간을 피해야 삶의 의미든 뭐든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약물이 그때뿐일지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막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별이나 이별의 슬픔 또한 이런 광기와 마찬가지로 해결되거나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걸 안고서 살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익숙해지거나 익숙해지지 않거나 그게 전부다. 그리고 그것 또한 나라는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수잰에게 엄마의 죽음은 엄마를 보며 형성되던 자아를 상실한 일이었고, 엄마와 연결되었던 끈이 끊어진 일이었다. 그녀를 알아주고 사랑해 주던, 엄마를 통해 인식했던, 자기 자신을 잃은 일이었다.
독서와 글쓰기로 자기 자신을 되찾은 그녀는 이제 엄마가 돌아가신 그때의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엄마를 통해 자기 자신을 찾지 않는다.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본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는, 이제 사진 속에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사랑하는 것은 초월이 아니라 삶에 전념(Committed)하는 일이고, 버티며 살아내는 일임을. 그 전념의 방법으로써의 독서와 글쓰기는 나를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태어나 처음으로 나만의 시선으로 내 스스로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의미는 한 사람이 건강하게 존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수잰의 주위에 엄마 잃은 슬픈 마음을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그녀는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너무 어렸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절망 속에서도,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방문을 열고 나오게 만드는, 그런 따뜻한 어른이 되어 스스로를 돌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책으로 정신병원의 실체를 밝히고, 그곳을 뛰쳐나와 작가가 되었다. 고통을 읽기와 글쓰기로 승화한 진정한 인생의 의미들을 찾은 수잰에게 박수를.
p.503 당신이 왜 그리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요. 그 의사의 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