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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ㅣ 고전의 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김만권 옮김 / 책세상 / 2025년 3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왜 <자유론>의 제1장 머리말에 나와 있는 이 말을 읽는데 가장 먼저 제사가 생각났을까? 이 확실한 명령 같은 말에 억울한 감정이 쏟아져 한동안 마구마구 글로 풀어냈다. 서평을 쓰면서 이렇게 많이 울분을 터뜨리고 이렇게 많이 쓰고 이렇게 격분하다가 전부 다 지워 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어려운 고전으로 내 안에 묻혀 있던 제사라는 단어가 다시 터져 나올 줄은 상상을 못했다. 그래서 자유론과 제사를 내 나름대로 이해한 것만큼만 연결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어떤 사람의 자유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보호뿐이다. 제사를 강요하는 것이 자기보호 때문인가? 제사를 안 지내면 조상신이 노하셔서 불행을 가져올 것 같은 불안함? 하지만 진짜 조상 잘 만나 조상 덕 본 사람들은 다 해외여행 간다. 조상 덕 부모 덕 1도 못 본 나 같은 며느리가 죽어라 제사 음식 만들고 남편이랑 싸운다.
하지만 자기보호를 위해 상의도 의논도 없이 당연히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며느리의 자유에 개입하는 것은 옳은가? 둘 다 자기보호라면, 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의견은 옳고 제사를 지내기 싫다는 의견은 틀린가?
다시 말해 누구에게라도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목적은, 타인에게 가해질 해악을 막는 데 있다. 제사가 자기보호 때문에 정당한 것이라면, 제사를 지내기 싫다는 며느리인의 의견 역시 정당하다. 타인에게 가해질 해악을 막는데 권력을 써야 한다! 며느리도 타인이다. 그러면 며느리인 나에게 제사는 해악이니까 제사를 안 지내게 해주려고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나에게 제사를 강요함으로써 해악을 막은 것이 아니라 해악을 가했다.
개인 자신의 이익은 정당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강제하거나, 그가 다르게 행동한다고 하여 불이익을 줄 이유는 될 수 없다. 여기서 개인은 누굴까? 나는 시아버지도 나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사를 지내라는 시아버지와 안 지내겠다는 나, 이 두 개인의 이익은 모두 정당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할 말이 없는 게 시아버지가 제사를 지내라고 강요한다고만 느꼈는데, 나는 제사를 안 지내겠다고 시아버지에게 강요를 한 것은 아닐까? 일단 남편의 아버지니까 20년 이상을 참고 제사를 지냈다. 그럼 잘한 건가? 나만 불이익을 당했으니? 그냥 내가 참고 말지, 내가 져주고 양보해야지, 이런 게 진정한 효도이고 미덕일까?
인플루언서 인디캣님의 서평을 읽는데, 최해직의 <죽어도 컨티뉴>라는 책에 "내면 성장은 스스로 여유를 갖는 것을 말한다. 남을 돕는 따뜻함은 그 다음이다. 자기보다 먼저 남을 돕는 것은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자기를 버리는 행위가 된다. 성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자기를 버리고 산 사람이 딱 나구나 싶었다.
김만권 교수님은 해제 250페이지에서 밀의 말을 인용한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비난을 받거나, 모두가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때로는 정신병자 취급까지 당한다며 우려한다는 말이다. 여론의 횡포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지만, 나는 이것을 제사에 대입해 보았다. 제사가 너무 싫어서 딱 2번 아프다는 핑계로 안 했는데, 며느리가 시어머니 제사 안 지낸다는 게 말이 되냐고 비난을 받았다. 모두가 하는 제사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은 사람이도 나다.
그러면 그렇게 당연히 해야 하는 며느리의 임무인 제사가 실버하우스 가자마자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제사였던 것인가? 나는 제사가 싫어요!라고 외치던 어린아이였던거다. 아무런 논리도 없고 이유도 없이 그냥 하기 싫다는 칭얼거림 뿐이었던 거다. 내가 왜 제사를 지내야 하냐고 따지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내가 제사를 거부할 자유가 있다면 시아버지는 제사를 강제할 사회적인 의무가 있다 했을거다.
나는 어쩌면 밀이 말한 배부른 돼지로 산 것이 아닐까? 나 자신은 물론, 내 가족을 힘들게 하는 이 비합리적인 제사를 그냥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책을 읽고 힘을 키웠어야 했다. 그래서 나처럼 제사에 희생되고 있으면서도 당연히 해야 한다고 느끼는 고통 받는 모든 아내와 며느리들에게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근거를 더하고, 각자의 고충사항을 알리고, 힘을 키워서 제사를 없애는 것이 옳다는 나의 주장을 관철해 나갔어야 했다.
그래서 기일에는 제사 대신 가족여행이나 외식을 하며, 가족만의 추억을 만드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했어야 했다. 그러면,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도 이것이 맞으니까 제사라는 유교 문화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다.
나도 어떤 분 블로그에서 형제들이 다 같이 모여 회의를 해서 부모님의 제사를 없애기로 결정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대신 가족끼리 함께 모여 추모 겸 가족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아이들도 즐겁고 어른들도 즐거워서 엄마 아빠 기일과 구정과 추석은 함께 놀 생각에 기다리게 된단다.
무엇이 두려워서 누구 눈치를 보느라고 이런 행복한 추억 대신 TV에 병풍 사진을 띠워놓고 의미 없는 제사를 지내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제사를 지내고 말고는 내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그 자유가 내 가족 중 단 한 사람이라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을 열고 물어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러는 나는 친정 엄마 제사도 안 지내냐고? 안 지낸다. 울 엄니 언제 돌아가셨는지 네이버 캘린더 봐야 안다. 그러나 엄마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있다. 며느리의 입장에서 제사를 없애는 것이 진리라고 할 수 있냐고? 그냥 제사 음식 사서라도 부모님 뜻에 따라드리는 게 효도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도 진리와 효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진리란 무엇일까? 밀이 25살부터 평생 사랑한 여인 해리엣 테일러는 유부녀였다. 그녀의 남편 사망 후 둘은 결혼을 했고 7년 후 프랑스 여행 중 그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밀은 해리엣의 무덤에서 멀지 않은 오두막에 머물며 그녀를 그리워하고, 이듬해 대부분이 그녀의 업적인 <자유론>을 출판해 그녀의 영전에 바친다. 이 책은 밀에게는 절대로 손대고 싶지 않은, 그 자체로 사랑의 기억이었다.
유교적인 가치관에 의하면 밀은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게 진리인가?
밀은 거짓 의견도 탄압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 거짓 의견에 대한 반론과 증거를 제시하면 진실을 더 빛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불합리한 명령에는 합리적인 의견을 내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결국 이런저런 반박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빛나야 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서 나라에 따라서 대다수의 의견이나 관습에 따라서 바뀐다면 진리가 아니다.
효도는 진리인가? 내가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부모님은 공경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효도는 진리가 아니다. 제사와 같이 사회가 만들어낸 개인의 자유를 압박하는 구속일 뿐이다. 만약 효도가 진리라면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가페적인 부모의 사랑도 효도도 모두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제사가 진리라는 것인가? 그래서 제사와 효도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선택의 문제는 마지막에 한 번 더 이야기하겠다.
밀은 만약 내가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국가가 이것을 제한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술 마시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음주 운전을 한다면 국가는 강력하게 단속해야 한다. 타인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 외에는? 가족은 타인이 아니니까 피해를 줘도 된다는 말인가?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음주 운전을 해도 된다는 말 아닌가? 가족도 타인이다. 나 아닌 사람은 모두 타인이다. 가족도 나에 해당된다면 내가 내 가족을 치어 죽였어도 국가가 처벌하면 안 되는데 내가 내 자식을 죽이면 처벌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Freedom이 아닌 Liberty에 관한 책이다. 나는 가장 먼저 정치철학자 김만권 교수님의 '해제'를 읽었다. 자유라는 말을 나는 Freedom이라고 배웠다. <자유론>하면 Freedom Theory 정도가 아닐까 했는데, 원제를 보면 On Liberty다. 둘이 뭐가 틀린가 했더니 Freedom은 개인의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자유로 개인에 국한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밀은 이런 개인의 능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 하는 Freedom의 공적인 조건을 다룬다. 이 공적인 조건이 정부 권력에 대한 제한인 Liberty다. Liberty 하면 자유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erty)이 생각난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새로운 땅으로 온 이민자들에게 손에 든 횃불은 희망과 자유의 상징이었고, 책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다. 나는 여신상 발밑에 끊어진 쇠사슬이 있는 건 몰랐다. 압박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한다. 이 개인의 Freedom을 얻기 위한 모든 것들이 Liberty가 아닐까?
밀이 <자유론>에서 말하는 자유의 핵심은 공권력 행사에 제한을 두고, 그 제한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헌법이 제정되었다. 근대 헌법은 기본권과 권력구조로 되어있다. 기본권이란 인간이 존엄과 가치 및 행복 추구권, 법 앞에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평등권, 국가의 간섭 없이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자유권 등이 있다. 권력구조는 흔히 권력 분립을 통해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했다.
누군가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원래 이 표현의 자유란 공권력의 억압을 견제하고 대항하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억압적 공권력에 맞서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이를 왜곡하여 내가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일에 국가가 간섭하지 말라는 목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이용한다. 그렇다면 내가 제사를 지내지 말자고 표현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분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까?
왜 이렇게 질문을 해 보냐 하면 밀이 말한 오류 가능성이라는 말 때문이다. 오류 가능성은 당신도 나도 다 틀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는 태도는 극단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극단주의는 타자의 말을 경청하는 일을 거부하기에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강요와 폭력을 조장한다. 내가 뭐 강요와 폭력까지 조장하겠냐마는 내 억울함 때문에 극단으로 치달아 시아버지의 말을 경청하기를 거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인류를 바꾼 것은 낙관론자들이었다. 이건 안돼, 어려워, 못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닌, 이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바뀌어야 진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인류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테스 형에게 세상이 왜 이러냐고 물을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꿈이 없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세상 속에서 내가 올바르고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는 게 먼저다. 그래야 사회가 바뀐다.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이 더 이상 악인에게 당하지 않는 세상은, 착하고 똑똑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산다. 성취하기 위해서도,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닌,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산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꼭 그런 말 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내가 택배를 하다가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걸어가는 할머니를 본다. 그동안 먹고살라고 억지로 일했는데 이 할머니를 보며 갑지가 이렇게 무르팍도 안 아프고 젊다는 게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인지 깨닫는다. 집을 사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걱정 대신 행복감이 몰려든다. 이 순간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이다.
사르트르의 Life is C between B and D라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 인생은 B와 D 사이(Birth and Death)에서의 끊임없는 선택(Choice)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백지의 상태로 태어나 자유 의지에 의해 나의 본질을 만들어간다.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고 나의 자유를 박탈할 수 없다. 이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현대 철학은 나는 나의 주인이며 주체다. 따라서 세상이 정해놓은 룰과 정답에 따를 것이 아니라 나만의 정답을 찾겠다는 것이다.
나의 선택은 내가 지켜야 할 사람,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선택인가? 어쩌면 진정한 자유란 당신과 내가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나만 자유롭고 행복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더 넓고 이타적인 목표에서 오는 게 아닐까?
우리를 지금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사고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한 해방의 철학은 <자유론>이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내게는 제사였다. 밀의 <자유론>에서 내게 도움이 되는 포인트를 찾고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보았다. 내 의견이 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내 글의 오류 가능성을 열어둔다.
끝으로 옮긴이 김만권 교수님은 인생의 모든 일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저서도 무려 11권이나 된다. 그래서 그는 삶의 목표를 행운으로 누리며 얻은 지식을 사회에 실천으로 돌려주는 일로 삼았다.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고, 연대 국제학 대학원 객원교수로도 일하고 있지만 그의 교실은 누구라도 불러주는 곳, 그 어디에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