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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실, 외갓집 가는 길 -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발간 기금 사업 선정
김경순 지음 / 바른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 돌아갈 수는 없어도 지금 내 삶이 이렇게 빛나는 것은 그동안의 하루들이 모여 소중한 결실이 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마치 또 다른 인생을 만나 본 기분이다.
<흐느실, 외갓집 가는 길>은 이 책의 마지막 수필 제목이자 책 제목이기도 하다. 나도 작가님의 외갓집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이 책으로도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책이었다. 우리나라 말에 이렇게 예쁜 말이 있었나? 이런 꽃이 있었나? 동네 이름도 생소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예쁜 카페와 맛집, 그리고 다양한 축제와 사람들 이야기가 문자만으로 이렇게 친숙하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울자울, 어마지두, 달뜨다, 내남없이, 세신사, 눅잦히다, 은사시나무, 윤슬, 수나롭다, 능놀다, 어우렁 더우렁, 겯고틀기, 옹글다, 봉당, 알짬, 틀거지... 꽃이름은 제외하고라도 이렇게 생소한 말들이 전부 우리나라 말이라니 내가 한국어는 잘한다고 하기가 무색해진다. 은사시나무는 검색해서 사진을 보니 나무가 온통 은빛으로 반짝여서 천상의 나무 같았다.
이 책에 나온 음성은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더니, 좋은 곳이 너무 많아서 이런 곳에서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곳이다. 나는 서울이 고향인데다가 부모님이 이북 분이라 외갓집이 없다. 어린 시절 추억은 엄마랑 약수터 간 것 정도다. 작가님의 어머니가 가슴에 사과 하나를 품고 기차역에서 큰오빠를 기다리는 풍경은 영화 속 장면같았다. 이런 추억과 자연이 지금의 작가님을 길러 낸 것이 아닐까. 음성에 가면 누구나 작가와 시인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강원 상회 할아버지가 시끄럽게 짖어 대는 견공 청이에게 "그놈 참, 집 잘 지키네."라는 말을 할 때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지금은 애완견 소음 때문에 강아지 성대 수술도 하는데, 시끄럽다가 아니라 집을 잘 지킨다고 칭찬을 한다. 하물며 동물도 칭찬을 받으면 춤을 추는데 나도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칭찬이나 해줘야겠다.
저자는 충주에 있는 여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2년도 채 안 돼 고향인 음성으로 내려왔다. 복잡한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사람에게 고향이란 참 중요한 것 같다.
음성군에서도 아기를 낳으면 출산장려금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기를 편하게 기를 수 있고, 자녀 교육이 경제적 부담이 되지 않도록 국가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것이 어디 음성군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까.
계절의 변화를 장날에 느낄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나도 옛날 집 근처에 방림 시장이 있어서 엄마랑 신발도 사고 문구점에도 갔었는데 시장에서는 계절을 느낄 수는 없었다. 장날에 온갖 모종이 다 나와서 작은 텃밭과 드넓은 밭에 심어지다니 너무 평화로운 느낌이다. 요새는 마트와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고 사시사철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계절은 바깥 온도로 체감하게 되는 것 같다.
빨간 코 김장수 아저씨와 사계절 내내 언제나 당신이 만드신 장아찌와 산나물, 묵나물을 파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은 또다시 가야 하듯 사람도 계절처럼 돌고 도는 것은 아닌가 싶다. 불교의 윤회설도 계절을 보면 틀린말도 아닌것 같다.
오정동 동네 입구에 큰 다리가 있었는데 아침이면 개들의 사체가 다리 난간에 매달려 있어 그 모습이 끔찍했다는 이야기에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일명 개천여고라고 불리던 학교를 나왔는데 그때 개천 변에 나타난다는 바바리맨 때문에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보신탕 집 개의 사체나 바바리맨이나 지금은 다 추억 속 무서웠던 추억으로만 남아있지만.
폐교된 초등학교를 캠핑장으로 개발한 것도 참 좋은 아이디어 같다. 흉물로 남아 있는 초등학교가 아이들도 뛰놀고 캠핑도 하고 낚시도 하는 가족 여행지가 되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은행나무, 느티나무, 플라타너스 나무, 향나무를 베어내지 않아도 되고, 어른들도 추억은 소환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도 기회가 되면 가족 여행을 가보고 싶은 곳이다.
음성에는 저수지가 많다고 한다. 삼 형제 저수지 중 하나인 백야 저수지는 바다에 온 듯 넓고 저수지 좌우로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펜션을 하나 빌려서 아침에 산책을 하면 한 폭의 풍경화가 될 것 같다. 칡덩굴의 배웅을 받으며 둘레길을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는 것만으로도 가족이든 연인이든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흔행이 고개는 역말에서 신천리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인데 지금은 이 고개가 큰 대로변으로 바뀌어 옛날의 흔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괴담이나 흉가를 체험하는 방송에서 흔행이 고개가 나온다고. 그 고개는 근처의 덕생 고개. 예전에 쓰레기 매립장이 있었던 산길인데 밤중에 촬영을 하니 귀신이 나올듯하지만 흔행이 고개가 아니다. 흔행이 고개는 먼 추억 속에서 어린 소녀가 엄마와 장터를 가기 위해 넘었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고개이므로 저자는 이 고개가 가십거리로 세상의 바다에서 떠돌지 않기를 바란다.
음성에서도 커피가 생산되다니 깜짝 놀랐다. 또한 품바 축제도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요즘 음성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고. 특히 세계 피아노 연주의 거장 유키 구라모토를 비롯한 백건우, 조수미, 금난새 등과 같은 세계적인 유명 예술인들의 공연은 물론이고,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연극과 음악회까지 음성 문화예술회관에서도 열린다고 하니 나도 너무 부럽다.
특히 썰매타기 추억은 눈썰매도 타 본적이 없는 나에게는 가장 멋진 추억이다. 비료 포대에 지푸라기를 욱여 넣어서 돌부리나 뾰족한 나뭇가지로부터 엉덩이를 지켜내는 썰매를 만들어서 탔다고 한다. 게다가 무덤 주위의 나무 그늘에서 놀고 썰매로 무덤까지 타고 놀았다고 하니, 무덤이 귀신 나오는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이 조금 덜 무서운 곳으로 바뀌었다.
세월도 사람도 흘러가지만 오래된 추억은 추억하는 사람의 가슴속에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님의 바람대로, 이 책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에게 따듯하게 스며들기를, 그리하여 주술처럼 영혼의 안식이 깃들기를...
♥ 바른북스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