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 현대 물리학의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한 도발적인 답변
자비네 호젠펠더 지음, 배지은 옮김 / 해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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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양자역학 때문이라던가, 할머니가 살아계시긴 하는데 다만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을 뿐이라네요. 그 말이 맞나요?  


간단히 답하자면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정보는 파괴될 수 없다. 차 키를 어딘가에 두고 잊어버렸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할머니의 친절함, 지혜, 유머 감각들은 돌이킬 수 없지만, 정보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주 전체에 퍼져 있지만 어딘가에, 어떤 식으로든 영원히 보존된다.


물리학이란 사의 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어려운 개념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현재 물리학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도 알려준다. 


< 물리학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책을 왜 쓰게 되었느냐 하면  물리학자들은 문제의 답을 기가 막히게 잘 찾지만, 그렇게 찾은 답에 사람들이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물리학은 수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물리학의 목적은 자연현상의 관측을 서술하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어떤 거시적 성질이 불변인 계의 가능한 구성들을 공식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밀가루 반죽을 예로 설명해 주니 훨씬 이해가 잘 된다. 그릇 안의 설탕, 밀가루, 달걀 등의 분자들은 계의 미시 상태라고 부른다. 미시 상태는 구성에 관한 완전한 정보다. 즉 모든 분자 하나하나의 위치와 속도가 미시 상태에 해당한다. 


반면 매끄러운 반죽은 거시 상태라고 부른다. 평균적으로 변하지 않는 상태이다. 반죽하기 전 초기 상태의 분자들은 버터 옆에 달걀이 있고, 밀가루 위에 설탕이 있듯 올바른 각자의 영역에 순서대로 잘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섞인 후에는,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더 이상 순서대로 놓여 있지 않는다. 엔트로피의 증가를 질서의 파괴라고도 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안 섞인 반죽은 엔트로피가 낮고 섞인 반죽은 엔트로피가 높다. 


초기 상태의 우주는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과거 가설은 그냥 그렇다고 가정하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설명은 아직 없다. 왜 초기 상태가 그랬는지는 현재 이론들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힌다. 또한 로저 펜로즈의 등각 순환 우주론으로 과거 가설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보 역시 영원히 파괴된다는 점을 감수해야 한다. 줄리언 바버는 우주가 '야누스 포인트'에서 시작되는데 이 지점에서 시간의 방향이 바뀐다고 가정한다. 이런 생각들은 다 좋지만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현재로서는 이들이 단지 추정일 뿐이다. 현재 물리학은 딱 여기까지 설명해 줄 수 있다.


학자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용어로 빈약한 통찰을 값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사회학자 스티브 풀러가 말했다. 나도 어떤 분야든 초등학생도 이해할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게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저자는 최대한 많은 예를 들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지만, 워낙 어려운 개념이다 보니 어떤 것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지만 이해를 못 한 것도 많았다.


총 9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질문을 던지고 현재 물리학이 어디까지 설명을 해줄 수 있는지를 밝힌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다르고, 각각의 기본 입자에 과연 우주가 깃들어 있을까? 자연법칙이 우리의 판단을 결정할까? 이런 의문들에 최종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과학자들이 현재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과학과 추측이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지 알려준다. 또한 증거를 바탕으로 수립된 이론만 채택한다.


독자들이 오로지 저자의 의견만 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서 몇몇 전문가와의 인터뷰도 더했다. 책 말미에는 중요 전문 용어집을 수록했다. 이 용어들이 본문에 처음 등장할 때는 볼드체로 표시했는데 책을 읽다가 볼드체 부분 중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것은 용어집에서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으로 영적인 개념 중 어떤 것이 현대 물리학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고, 어떤 것은 현대 물리학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물리학이 우리와 우주의 관계에 관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은하 필라멘트는 뇌 신경망을 닮았다. 이 책에 나온 사진을 보면 정말 뉴런이 연결된 모습과 비슷했다. 하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우주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주 자체가 의식이 있다고? 정말 궁금하다. 만약 우주가 정말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생각을 아주 많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해도 우주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인해 사고량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크기는 중요하다. 크기에 따라 물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일 생각을 많이 하고 싶다면 모든 것을 작고 조밀하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우주의 종말에 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조바심을 내봐야 의미가 없다. 우주의 종말에 관한 물리학자들의 예측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럴 바엔 차라리 초파리에게 내일 날씨를 물어보는 편이 낫다. 초기 우주에 관한 이론과 우주의 종말에 관한 것은 아는 게 전혀 없으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믿자. 


팽창하는 우주는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낼 수 있으면 새로운 우주의 성장에 시동을 걸 수 있다. 급팽창 이론은 부정확할 수도 있고, 정확하더라도 이에 필요한 기술은 현재로서는 구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어느 날 실험실에서 우주를 창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미래의 누군가가 실험실에서 우주를 창조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지구 역시 나와 같은 누군가가 과거에 실험실에서 우주를 창조해서 우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누군가를 창조주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이 책에서 코흐 눈송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만약 이 삼각형을 우주의 입자라고 생각한다면 그 입자 하나하나에 우주 전체가 들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안에 우주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내 안에 우주가 있다는 말을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거대한 물음을 서슴없이 떠올리고, 그 답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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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가족의 정서가 행복과 불행의 터전이었다 - 오늘날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강인경 지음, 윤정 감수 / 북보자기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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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정서는 인성의 뿌리다. 인성의 또 다른 이름을 인품이라고 한다.  


저자는 윤정 신경정신분석연구소에서 임상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정신분석 치료 과정에 4년간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적인 삶의 영역이 가정이다. 이런 운명으로 엮인 가족의 정서는 생명의 본질을 담은 우연의 산물이다.


가족의 정서는 자아를 생성하는 근원이다. 늑대 굴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심한 스트레스로 9년 만에 죽었고, 병아리와 함께 자란 오리를 어미 오리와 함께 지내게 했어도 닭소리만 냈다,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 성인의 80%에 해당하는 뇌의 발달을 가져온다는 사실로 <어릴 적 가족의 정서가 행복과 불행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알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어릴 적 가족의 정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곱 분의 사례를 읽어가다 보면 독자들은 물론 앞으로 가정을 꾸릴 젊은 세대에게도 치유와 삶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일곱 분의 사례는 [ 기억이 부르는 날  선택의 삶 → 내면의 거울  외면의 거울  바이러스 가슴으로 고백하는 날 ]의 순서로 되어있다. 저자는 자신의 삶의 기억을 먼저 떠올리면서, 사례자의 삶과 정서를 이야기해 준다. 내면과 외면의 거울로 이성적 판단을 지닌 자아의 선택을 비추어 보고, 바이러스로 자아의 방어기제를 살펴본다. 가슴으로 고백하는 날에서는 사례자 분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수용하면서 변화한 삶의 기록을 남겼다.


1. 도망자(회피)는 이혼, 우울증, 폭식과, 술로의 도피는 모두 자신이 택한 것임을 직시하고 치유해 가는 여성 이야기다.


2. 독단주의자(합리화)는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기에 남들에게 인정은 받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던 직장인 이야기다. 그래서 정신 분석과 함께 스스로 사랑과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3. 사랑 받았던 사랑은 사랑이 아닐 수 있다(거부)는 큰 소리를 지르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과거의 유학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여성이 스스로 치유해 가는 여정을 그린다.


4. 어른 아이(퇴행)는 안정적인 가정을 원하는 40대 초반의 두 아이를 둔 여성 이야기이다. 화가 나면 예전의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폭력과 폭언을 쓰고, 힘들면 어머니에게 위로 받는 전형적인 어른 아이의 모습에서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5. 이성의 환상(승화)은 부부 갈등으로 고민하는 40대 중반의 남성 이야기다. 모든 갈등은 합리적인 사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우월의식을 가장한 것이었다. 우월한 자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했지만 행복은 없었다. 치료를 통해 이제 행복을 느끼는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6. 이념의 환상(도피)은 50대 후반의 혼전 임신의 아픔을 안고 사는 여성의 이야기인데 그녀의 딸도 힘든 과정을 똑같이 겪고 있다. 그녀가 살아온 삶으로 딸을 억압한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이데올로기로 억압 당하면서 조울증을 가지고 살았다.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상처를 통해 생을 시작함을 깨닫고 자녀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어머니의 삶으로 돌아온다. 


7. 도취(자기애)에서는 70대 후반의 나르시시스트 여성이 나온다. 항상 자신이 스타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정신 분석을 통해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고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의지의 삶을 실천한다. 그녀는 결국 정신 분석 치료와 최면 의학 치료를 통해 스스로 우울증과 공황 장애를 극복했다. 


공감과 동감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살짝 달랐다. 공감(Empathy)은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삶이지만, 동감( Sympathy)은 함께 그 감정 속에 머물러 있는 삶이었다. 공감은 동적이고 동감은 정적이다. 공감은 치료의 승화이고 삶의 미학이며 상처와 함께 새롭게 살아내는 생명의 삶이었다. 나는 동감 말고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쁨과 즐거움도 고통이라고 해서 이게 무슨 말이지 싶었다. 알고 보니 기쁨과 즐거움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고통이었다. 기쁨이 중단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고통이 된다.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화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멈추어야 덜 고통스럽다. 


불교에서는 생로병사를 사고(四苦), 사람이 가지고 있는 7가지 감정을 칠정(七情)이라고 한다. 7정이란 희노애락애오욕 즉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사랑, 증오, 욕구를 말한다. 이런 감정이 다 고통인 것이다. 그 뜻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사랑도 기쁨도 즐거움도 중단될까 봐 사라질까 봐 근심하기에 고통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고민하지 말고, 고통을 안고 살아보라고 한다. 고통은 사랑을 키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삶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상처를 통해 묻고 자신의 답을 찾아내야 한다. 서로 다르기에 아프지만 그 아픔은 새로운 답을 열어줄 문이다. 상처 입은 아픔은 쉴 날이 없다. 젊은 날의 살갗에 달라붙어 아직도 여러 개의 못이 박혀 몸살을 한다. 내 인생의 열쇠는 내 손에 있으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의존하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의존은 자신의 삶을 가꾸지 못하게 한다. 선택의 순간마다 의존하는 삶 속에 스스로의 행복은 머물지 않는다. 


어쩌면 힘들다고 술을 마시고 화가 난다고 폭식을 하는 것 역시 무엇인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내는 독립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신분석의 삶이란 상처를 알고, 상처를 느끼면서, 그 상처를 안고, 스스로 살아내는 삶이다.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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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생명의 사랑을 기다리며 산다 - 나는 나를 초대하여 정신분석 삶을 고백하다?
김현미 지음, 윤정 감수 / 북보자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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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삶이란 서로 다른 삶을 보면서 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살아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처의 노래를 부른다. 상처의 노래는 삶을 살아낸 일상의 순간순간들이다. 상처는 삶으로 살아내기에 사랑이고 생명이다.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지. 상처는 사랑의 생명을 내어준다. 상처는 생명을 기다리는 희망이다. 


윤정 신경정신분석연구소 9년 차인 저자는 프로이트와 라캉을 연구하고 정신분석가 윤정의 '정신적 바이러스'로 자아를 해석하는 정신분석 치료 세계를 공부했다. 일치할 수 없는 정신분석학의 시선 응시의 세계는 끊임없는 분열속에서 자아가 하나의 의미 있는 가치로 전이한다. 본인의 고백이 새로운 여명을 여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상처는 생명의 사랑을 기다리며 산다>의 구성은 매우 독특하다. 스스로의 정신분석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소설이나 수필형식이 아닌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구성했다. 시선→ 응시 → 분열 → 전이 그리고 상처의 노래이다. 상처의 노래는 저자의 마음을 담은 시(詩)다. 이렇게 스스로를 분석하며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함께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살아 있음 자체가, 생명이 소중하고 감사해 진다.


부모를 향한 원망과 불만을 가지고 겉으로는 밝게 웃으며 끊임없이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저자의 고백에 나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늘 과하게 웃었던 나도 부모를 향한 불만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안정적인 가정에서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는 밝게 웃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는 편한 웃는 모습이라고 한다. 


진실을 왜곡하며 살아야 했기에 늘 행복한 삶을 동경하며 생을 학대하고 다른 이들에게 아픔을 주었다. 나 역시 나의 아픔을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 투영하며 산 것이었다. 생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는 것을 보며 행복할 줄 아는 순간순간임을 알게 된 저자는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부모를 선택할 수 없지만 무능력한 아버지 밑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야 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동생이 중학교에 가려면 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구청 민원실에서 사무보조로 일하게 된다. 여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교복이 부러워 교복 비슷한 옷을 입고 구청에 출근하면서 남에게 보이는 삶이 시작된다. 평범하게 교복 입고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하지만 그런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삶이 없었다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없었다고 한다. 


구청에서 일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야간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 후 성적이 좋아서인지 학급 대표가 되어 책임지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3년간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학생으로 생활한 것이 학문의 열정과 사회 구성원으로 책임지는 삶으로 전이되어 안정된 보금자리를 얻었고, 특히 자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책임지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설 회사에 취직하여 회계 업무 담당 부서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노동의 가치와 돈에 대한 의미를 알아가며 성공한 삶에 대해 고민한다. 교회를 다니며 아동 복지선교 단체를 소개받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사무 간사로 일한다. 존경스러운 인물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그 삶을 선망하면서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꿈을 키워간다.


교회에서는 즐겁게 웃다가 집에서는 늘 불만을 갖고 원망과 비참함을 부모에게 투사하고 살았다. 겉으로만 웃는 척하며 살았던 것이다. 새로운 빛을 얻기까진 긴 여정의 시간이 필요했다. 인정받고 싶은 나를 상상하는 삶 속에 부모의 외로움과 아픔은 없었다. 오로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했다.


종교 단체에서 기획하는 세미나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처음으로 남편을 바라보면서 세심하고 배려 있는 인상을 받았던 이유가 아버지에게 느낄 수 없었던 삶의 부분이었기에 더 기대를 하면서 결혼했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모든 불만은 남편에게 향했을 것이다. 14년 가까이 일하던 여성 운동 단체가 개편되면서 퇴사하고 구직 여성들을 위한 직업 교육과 취업을 지원하는 실무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견디지 못한 저자는 갑자기 질병을 얻게 된다. 공황장애였다. 


불행은 상처를 바라보게 하고, 살아내는 의지가 얼마나 값진 행복인지 알게 해 준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을수록 상처는 새 삶을 열어주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았다. 정신분석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세계를 '응시의 세계'라고 한다. 응시 속에서 자신에게 혼잣말을 건넨다. 사람은 이 응시의 세계를 있기에 자신의 문제를 기억하면서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영혼이란 어쩌면 기억과 이미지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느 여름날 해바라기 속에 비친다. 이런 '비침'은, 내 의식 위로 어떤 기억이 떠올라 내 삶의 모습에 투영되는 것이다. '비침'의 응시는 끝끝내 상실하지 않게 해주는 신성한 신의 선물이자 새로운 삶을 바라보게 하는 위대한 신이다.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 남몰래 입었던 교복의 '비침' 속에 거짓된 모방이 머물러 있었다. 그 모방은 교육을 대신하는 '상징적 대타자'였다. 이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주체'이다. 이제 저자는 거짓된 모방을 부끄럽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미워했던 아버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 책이 생명의 고백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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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실, 외갓집 가는 길 -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발간 기금 사업 선정
김경순 지음 / 바른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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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 돌아갈 수는 없어도 지금 내 삶이 이렇게 빛나는 것은 그동안의 하루들이 모여 소중한 결실이 되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마치 또 다른 인생을 만나 본 기분이다. 


<흐느실, 외갓집 가는 길>은 이 책의 마지막 수필 제목이자 책 제목이기도 하다. 나도 작가님의 외갓집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이 책으로도 함께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책이었다. 우리나라 말에 이렇게 예쁜 말이 있었나? 이런 꽃이 있었나? 동네 이름도 생소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예쁜 카페와 맛집, 그리고 다양한 축제와 사람들 이야기가 문자만으로 이렇게 친숙하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울자울, 어마지두, 달뜨다, 내남없이, 세신사, 눅잦히다, 은사시나무, 윤슬, 수나롭다, 능놀다, 어우렁 더우렁, 겯고틀기, 옹글다, 봉당, 알짬, 틀거지... 꽃이름은 제외하고라도 이렇게 생소한 말들이 전부 우리나라 말이라니 내가 한국어는 잘한다고 하기가 무색해진다. 은사시나무는 검색해서 사진을 보니 나무가 온통 은빛으로 반짝여서 천상의 나무 같았다.


이 책에 나온 음성은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더니, 좋은 곳이 너무 많아서 이런 곳에서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곳이다. 나는 서울이 고향인데다가 부모님이 이북 분이라 외갓집이 없다. 어린 시절 추억은 엄마랑 약수터 간 것 정도다. 작가님의 어머니가 가슴에 사과 하나를 품고 기차역에서 큰오빠를 기다리는 풍경은 영화 속 장면같았다. 이런 추억과 자연이 지금의 작가님을 길러 낸 것이 아닐까. 음성에 가면 누구나 작가와 시인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강원 상회 할아버지가 시끄럽게 짖어 대는 견공 청이에게 "그놈 참, 집 잘 지키네."라는 말을 할 때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지금은 애완견 소음 때문에 강아지 성대 수술도 하는데, 시끄럽다가 아니라 집을 잘 지킨다고 칭찬을 한다. 하물며 동물도 칭찬을 받으면 춤을 추는데 나도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칭찬이나 해줘야겠다.


저자는 충주에 있는 여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2년도 채 안 돼 고향인 음성으로 내려왔다. 복잡한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사람에게 고향이란 참 중요한 것 같다.


음성군에서도 아기를 낳으면 출산장려금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기를 편하게 기를 수 있고, 자녀 교육이 경제적 부담이 되지 않도록 국가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것이 어디 음성군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까.


계절의 변화를 장날에 느낄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나도 옛날 집 근처에 방림 시장이 있어서 엄마랑 신발도 사고 문구점에도 갔었는데 시장에서는 계절을 느낄 수는 없었다. 장날에 온갖 모종이 다 나와서 작은 텃밭과 드넓은 밭에 심어지다니 너무 평화로운 느낌이다. 요새는 마트와 인터넷으로 쇼핑을 하고 사시사철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계절은 바깥 온도로 체감하게 되는 것 같다.


빨간 코 김장수 아저씨와 사계절 내내 언제나 당신이 만드신 장아찌와 산나물, 묵나물을 파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말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은 또다시 가야 하듯 사람도 계절처럼 돌고 도는 것은 아닌가 싶다. 불교의 윤회설도 계절을 보면 틀린말도 아닌것 같다. 


오정동 동네 입구에 큰 다리가 있었는데 아침이면 개들의 사체가 다리 난간에 매달려 있어 그 모습이 끔찍했다는 이야기에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일명 개천여고라고 불리던 학교를 나왔는데 그때 개천 변에 나타난다는 바바리맨 때문에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보신탕 집 개의 사체나 바바리맨이나 지금은 다 추억 속 무서웠던 추억으로만 남아있지만.


폐교된 초등학교를 캠핑장으로 개발한 것도 참 좋은 아이디어 같다. 흉물로 남아 있는 초등학교가 아이들도 뛰놀고 캠핑도 하고 낚시도 하는 가족 여행지가 되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은행나무, 느티나무, 플라타너스 나무, 향나무를 베어내지 않아도 되고, 어른들도 추억은 소환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도 기회가 되면 가족 여행을 가보고 싶은 곳이다.


음성에는 저수지가 많다고 한다. 삼 형제 저수지 중 하나인 백야 저수지는 바다에 온 듯 넓고 저수지 좌우로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펜션을 하나 빌려서 아침에 산책을 하면 한 폭의 풍경화가 될 것 같다. 칡덩굴의 배웅을 받으며 둘레길을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는 것만으로도 가족이든 연인이든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흔행이 고개는 역말에서 신천리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고개인데 지금은 이 고개가 큰 대로변으로 바뀌어 옛날의 흔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괴담이나 흉가를 체험하는 방송에서 흔행이 고개가 나온다고. 그 고개는 근처의 덕생 고개. 예전에 쓰레기 매립장이 있었던 산길인데 밤중에 촬영을 하니 귀신이 나올듯하지만 흔행이 고개가 아니다. 흔행이 고개는 먼 추억 속에서 어린 소녀가 엄마와 장터를 가기 위해 넘었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고개이므로 저자는 이 고개가 가십거리로 세상의 바다에서 떠돌지 않기를 바란다. 


음성에서도 커피가 생산되다니 깜짝 놀랐다. 또한 품바 축제도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요즘 음성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고. 특히 세계 피아노 연주의 거장 유키 구라모토를 비롯한 백건우, 조수미, 금난새 등과 같은 세계적인 유명 예술인들의 공연은 물론이고,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연극과 음악회까지 음성 문화예술회관에서도 열린다고 하니 나도 너무 부럽다.


특히 썰매타기 추억은 눈썰매도 타 본적이 없는 나에게는 가장 멋진 추억이다. 비료 포대에 지푸라기를 욱여 넣어서 돌부리나 뾰족한 나뭇가지로부터 엉덩이를 지켜내는 썰매를 만들어서 탔다고 한다. 게다가 무덤 주위의 나무 그늘에서 놀고 썰매로 무덤까지 타고 놀았다고 하니, 무덤이 귀신 나오는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이 조금 덜 무서운 곳으로 바뀌었다. 


세월도 사람도 흘러가지만 오래된 추억은 추억하는 사람의 가슴속에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님의 바람대로, 이 책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에게 따듯하게 스며들기를, 그리하여 주술처럼 영혼의 안식이 깃들기를...


♥ 바른북스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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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1부 下 - 영광된 미래의 초석 개벽
박모은 지음 / 맑은샘(김양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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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사는 게 덤인 것을 무엇을 초조해하는가. 이왕 죽을 거 대한민국 국회의원답게, 이서경답게 죽자. 

이 책은 3부로 된 한국 판타지 소설이다. 전체 3부로 된 이 책은 1부 상하 권으로 구성되었다. 1부는 인간계, 2부는 신계, 3부는 질서의 재편이다. 나는 1부 인간계에서 -영광된 미래의 초석을 읽었다.

하권은 김무영이 엄마와 함께 미국 워싱턴에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엄마는 간판이 중요하니 미국 유학을 시키려 하고 무영은 이런 논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 엄마는 결국 아들의 판단을 믿겠다고 캠퍼스 투어는 포기한다. 잠시 엄마랑 성진 스님과 들린 카페에서 수호신을 통해 아랍인들의 말을 번역기 없이 해석하는 장면이 신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사에서 '세계 음식 박람회'를 개최하는 날 아랍권 괴한 4명이 컨트롤 타워 경비원을 죽이고 진입에 성공해서 3개의 캐비닛을 열고 작은 상자를 얻는다. 그리고 3명은 죽고 작은 상자를 가지고 나온 아랍인은 우주선 모형 전시관으로 몸을 숨긴다. 작은 상자 안에 있던 병을 열어서 병이 제 기능을 못 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병은 변기 뒤에 버리고 체포되는데 묘사가 박진감 있고 리얼해서 상 권과는 달리 영화를 보듯 가슴이 콩콩거렸다. 


성진 스님과 무영은 다시 화장실로 가서 뚜껑이 열린 둥근 병을 회수한다. 햇빛에 반사된 검은색이 붉은색을 띠기도 하고 불사조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랍계 괴한들 덕분에 얻게 된 엄청난 소득이었다. 책에서는 이것을 병이나 단지 또는 항아리로 표현하는데 단지는 좀 큰 느낌이 들어서 나는 단지를 병으로 통일해서 쓰겠다. 


컨트롤 타워를 바라보던 윤검군과 서금화는 침입자들과 한 패거리라고 오해받아 경비실 감옥에 갇힌다. 미국은 총기 소지가 가능해서 시민들도 경찰에게 총질을 해 대는 경우가 있어 경찰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시민들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한다. 


경비실 감옥에 갇힌 윤검군과 서금화는 옆에 총상을 입고 들어온 아랍계 괴한에게 그 불사조가 그려진 검붉은 병에 대한 전설을 듣는다. 알렉산더 대왕이 무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 33세에 죽고,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들었던 로마인이 그 병을 훔쳐 로마로 가져가서 로마제국이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다는 전설이었다. 그 이후 이 병은 영국으로 은밀히 옮겨졌고 세계의 패권은 영국으로 흘러간다.


영국에는 석공(메이슨) 조합인 프리메이슨이 생겼는데 가톨릭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자 지하단체가 되었다. 그 간부 중 하나가 일루미나티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든다. 미국이 건국하고 자리를 잡을 때 일루미나티는 영국에 있던 검붉은 병을 빼내 미국으로 옮긴다. 일루미나티가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자, 당시 나사의 최고 수장이 일루미나티여서 그 검붉은 병을 자신이 일하는 나사 건물 지하로 옮기고 지킨 것이다. 


이것을 아랍계 괴한이 훔치고 잡힐 것 같자  화장실에 둔 것을 무영과 성진 스님이 가지고 나와 한국으로  온 것이다. 이서경 의원과 셋이서 산에 이 검붉은 병에 좋은 기를 담아 묻었다. 미국은 이 병을 찾기 위해 먼저 화장실에서 이 병을 소매에 숨겨 가지고 나온 성진 스님을 데려다 고문한다. 하지만 스님은 발설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스님이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서경 의원은 비서 이경수를 시켜 윤검군 이사 와 서금화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 시키려다 교통사고가 나고 비서까지 모두 평택 미군 기지 안으로 사라진다.


결국 비서만 살아나오고 주인공까지 5명이 모두 죽게 된다. 그 과정이 리얼하게 책 속에 묘사되어 있다. 드라마나 영화로 보면 엄청 긴장되고 빨리 다음 편을 보고 싶어질 것 같다. 특히 주인공 김무영은 명상을 하던 중에 빛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그것이 신계인 것 같다.


이제 2부에서는 신계에서 김무영의 활약이 펼쳐질 것 같고, 3부에서 개벽이 일어나 전 세계가 평화로워지는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와 같은 신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2부와 3부의 내용이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신계에서 이 5명이 꼭 다시 만날 것 같다. 빨리 2부가 나왔으면 좋겠다.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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