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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녹이기
김서해 지음 / 슬로우리드 / 2026년 5월
평점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소설은 묘한 재미를 감추고 있다.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작가의 이야기를 때로는 누군가 이야기를 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서해의 소설 얼음 녹이기도 그런 문학의 본질적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책의 주인공 유성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창작연극워크숍 준비를 위해 퀴어 소설을 쓰는 작가의 책을 읽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소설 속 문장들은 주인공 자신의 삶과 교차하고, 책을 써 내려가는 작가의 존재와도 기묘하게 겹쳐진다. 독서는 단순히 글자를 읽는 행위를 넘어 현실과 타인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수현과 유성이 나누는 얼음에 관한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수현은 얼음에 열을 가해 물이 되었을 때, 본질적으로 얼음과 물은 같은 성질이기에 그 변화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그대로라는 회의적인 시선이다. 반면 유성은 물 또한 물 자체로서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수현의 말은 틀렸다고 반박한다. 상태의 변화 속에서 새로이 생겨나는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다. 이들의 이견은 단순한 물리 법칙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이자, 무언가 변화하고 남겨진 것에 대해 부여하는 가치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성찰이다.
이야기가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감정의 밀도는 더욱 촘촘해진다. 유성은 자신의 마음을 보일 듯 말 듯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수현은 그 마음을 분명히 감지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 에둘러 쳐낸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노골적인 밀고 당기기가 아니라, 상처받지 않으려는 이들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에 가깝다.
긴장감 속에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게 되지만, 끝내 예상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그 결과조차도 어쩌면 그들이 의도하고 선택한 침묵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유성의 주변을 맴도는 태영과 아영이라는 인물이 더해지며 관계의 스펙트럼은 더욱 넓어진다.
이 소설은 단순히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퀴어라는 단어가 내포한 경계의 모호함과 특별함을 넘어서,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애써 드러내지 않고 숨겨두는 관계의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의 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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