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때문에 비루해질 때 꿈은 내 체면을 세워주고, 꿈 때문에 허약해질 때 밥은 내가 세상과 더 적극적으로 만날 용기를 줬다. 그건 아마 두 단어가 단순히 업을 일컫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큰 조망이자 지향, 성찰과 이해를 모두 품은 말이라 그럴 거다. 그래서 실은 누구도 쉽게 답을 줄 수 없는 말. - P20

당신이 지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여전히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다움을 잃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보는 인간다움의 형태가 바뀌는 겁니다. 죄책감. 그것도 사랑의 방식입니다. 죄책감은 때때로 ‘살아있는 자‘가 ‘사라져가는 자‘를 품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에요. 인간의 존엄은 말할 수 있을 때, 움직일 수 있을 때, 일할 수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나를 아껴서 슬퍼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시간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아파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고, 좋아하던 음악을 생각해주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그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마지막이자 가장 깊은 사랑이에요. 당신은 정말 잘하고 계세요. - P28

우리 안의 어떤 믿음과 선의가 일부 죽을 때 그걸 ‘작은 죽음‘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 P107

인간은 대체로 진부하고 빤하지만 가만 보면 참 다채롭게 진부하고 제가끔 빤하다는 걸, 우리 삶과 노동이, 사랑과 일상이 얼마나 놀라운 구체성으로 이뤄졌는지 이해하고 살펴야 한다.  - P139

의미나 태도에 도취되기보다 다만 기술을 연마하다보니 절로 익히게 된 삶의 자세가 있다. 구호나 당위 이전에 한 인물의 삶을 통해 그 인물의 욕망과 좌절, 유예와 꾸물거림,
실패를 총체적으로, 육체적으로 함께 경험하며 닿은 이해가 있다.  - P142

한 사람의 무게는 한 시절의 성취가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그 사람의 모순과 결함, 실패와 헤맴까지 다 포함한 채 재어진다는 것도요. 우리는 그걸 인생이라 부르지요.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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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margin)에 있는 것들"이란 의미에서 파생된 마지네일리아는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한다. 중세 수도회나 근대 교육 기관에서 일종의 공부 관행으로 자리잡았던 마지네일리아는 독자의 독립적인 시선과 위치를반향하는 비평적 행위로, 또 중요한 외부 공간으로 부상하며 학문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해왔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초기에는 마지네일리아의 주체와 연구 대상이 남성 철학자와 작가, 그 계승자에 한정되었다. 그들이 마지네일리아를 사용하는 방식과 가치를 주요하게 유통하고 축적하는 동안 가장자리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은 새로운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 여백, 가장자리, 곁, 빔,
소외 등 마지네일리아가 내포하는 의미가 그것을 실천하는 위치와 맥락까지 결정하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언어에서 소외된 이들이 마지네일리아라는 공간에서 중심과 가장자리, 텍스트와 주석, 인쇄된 공적 매체와 손으로 쓴 사적 메모 등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 P9

읽기는 타자의 도움으로 나를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실천이다. 읽는 사람은 문장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진술할 수 있는 육체의 증인이다. 그걸 모르는 이들만이 무모한 리뷰를 쓴다. 이건 H의 말이다. 이 책 한 구석에 미리 쓰인 마지네일리아다. 읽고 쓰는 여성을 옭아매는 이중 억압이다. 어느 쪽이 더 공포스러울지 모르겠다. 거울이 아예 없는 것과 거울이 너무 많은 것 중에서. 공포와 함께 여기 여백은 충분하다.

당신은 독자이다
당신은 나의 먼 친족이다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다
내가 먼 친족인 것처럼
먼 친족에게 하듯이
오직 누군가의 설명을 통해서만 보고 들리는

당신도 나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당신이 나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P15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도 나는 끄떡없이 글을 쓴다. (386)

이것은 텅 빈 부재의 자리에서 고백하는, 세계를 향한 최선의 사랑이다. 클로디 원징게르의 「불에 탄 종이들」에서 재의 형태로 남은 검은 책 위에 하얗게 비치던 글씨처럼. 책임감의 의미에서 인간인 "우리는 그보다 훨씬 광대한 존재" (180) 이므로 더 크게 사랑해야 한다. 소피는 그사랑을 "나를 나보다 더 믿" (385)는 타자에게서 배웠다. 하나이지만 무수히 많은 존재로 우리에게 온 예스에게서. - P74

얼마 전 노예가 쓴 자서전을 읽었어.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고통스러운 상황 묘사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아. 오히려 어떤 수사적 허위들이 너무 없어서였다고 할까. 불쑥 튀어나온 순전함에 걸려 넘어지면 한동안 못 일어나는 거야. 그런 문장들. 할머니는 돈을 벌어 자식들을 사려고 애썼다. 같은. 이게 무슨 말이지? 잠시 그냥 있어. 어떤 사실이 오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이야 이게?" 하게 되는 거야. 비슷한 문장이 자꾸 나오고 그럴 때마다 나는 활자들의 표층을 뚫지 못하고 망연히 있어. 이런 문장은 어떻게 건너가?

역사는 액체다. 사방에서 사방으로 틈입한다. 이런 역사는 어떻게 건너가, 라고 물었던 셈인데 동시에 그들의 역사 일부는 이런 역사를 건너가려고 애쓴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걸 떠올린다. 토니 모리슨이 애초에 약탈과 폭력이 있었다는 말로 수업을 시작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흑인 역사를 시작하는 문장은 그렇게나 무거웠다. 무거운 걸 받아들고 나와 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본다. 친구의 답장은 간단했다. "나의 엄마와 엄마의 엄마가 건너갔듯이" - P92

노예였던 여성이 쓴 자서전에 그런 문장이 있었어. 노예 여성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잔인한 저주나 다름없다고. 백인 여성이라면 그 아름다움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노예 여성에게는 수치와 타락, 폭력을 부르는 이유가 된다고.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갈망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19세기의 교훈이 20세기에도 유효했던 거야. "그 아름다움"은 백인이 표준이라고 가르쳐줄 자매도, 엄마도 페콜라에게는 없어. 뭔가 너무 없어.

마지막 문장을 쓸 때는 명치로 열이 모인다. 뭔가 너무없는 어린 여자. 유색인과 "검둥이"는 다른 존재라는,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비명소리만 자기 것인 어린 여자. 겨울 다음에는 봄인데, 봄이 오면 이 뭔가 너무 없는 여자애가 조금은 살 만해지길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는데 친구의 답장 알람이 울린다. "곧 봄이라는데 여전히 추워. 어떤 문은 닫고 어떤 문은 열어둬. 너무 없는 사람에게 활짝, 이라는 건 없어." - P94

"나는 주변부에서 자랐고 그 가치 전부를 물려받았어요. 내가 살아오며 읽은 모든 것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가장자리에서 비범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변화도, 의식도, 마법도(더 나은 단어가 없네요) 전부 가장자리에서 일어나죠. 모든 가능성은 가장자리에 있어요." * - P141

자기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 (speaking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 (speaking nearby)를 제안한 트린 T. 민하는 제일 먼저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고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라고 제안한다. "근처에서 말하기"는 타자를 대표/ 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해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며, 우리는 그저 가까운 거리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이해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의미를 규정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멈추고 그 의미가 봉쇄되지 않도록 의미 형성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만 타자가 여백으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있게 된다는 것이다. 타자를 여백으로 초대하는 일, 상상하면 아름다운 일이다. - P167

괄호 열고 그 말이 첫말이었다 마침표 멀리서 온 여자가
있다 마침표 온 만큼 더 멀리 가고 싶은 여자가 마침표
말이 여자에게 묻는다 마침표 따옴표 열고 실제로
죽지 않고도 더 멀리 물음표 따옴표 닫고
부러지고 부서진 말이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마침표
텅 비워져 돌아온다면 쉼표 침묵으로 돌아온다면 말없음표 괄호닫고 - P184

"모든 여성은 그 안에 모든 여성들을 품고 있다. 모든 여성은 모든 여성들의 여성이다"의 세계와 ‘모든 여성은 다른 전선에 서 있다‘의 세계를 오가는 결속과 단절 사이에 움푹 파이는 틈, 때로 폐허처럼 버려진 그곳에서 미친 말이 태어난다. 죽을까 죽일까 사이에서, 버릴까 바랄까 사이에서. 그러나 어떤 선택이든 미친 말은 안정적인 목적지를 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보다 더 먼 곳에서 죽고, 언제나 처음과 다른 장소로 살아 돌아온다. [딕테는 그것을 가장 잘 증언하는 침묵과 동공의 장소이므로,

(그 말이 첫말이었다. 멀리서 온 여자가
있다. 온 만큼 더 멀리 가고 싶은 여자가.
말이 여자에게 묻는다. "실제로
죽지 않고도 더 멀리?"
부러지고 부서진 말이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텅 비워져 돌아온다면, 침묵으로 돌아온다면...)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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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룬다티 로이 -
"목소리 없는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고의로 침묵하게 되었거나 (deliberately silenced), 듣지 않고 싶어 해서 들리지 않게 된(preferably unheard) 자들이 있을 뿐이다." - P51

그는 낡은 세계를 끝낼 주체를 ‘사유하며 고통받는 인간‘과 ‘억압받으며 사유하는 인간‘에서 찾았다. 고통받는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서 그는 그쪽으로 걸었다. 억압받는 자의 편에서만 사유의 구원이 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사유란 고통의 머리이며 고통이란 사유의 심장이었다. - P57

철학자 니체는 선행을 통해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자들의 책략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선행을 베풀고 헌신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선행과 헌신으로 상대방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 P77

이 두 사람이 아니어도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생략된 것들, 빠진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략된 곳, 빠져나간 곳, 비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진실이 침묵 속에, 부재 속에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빈자리를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진실의 자리니까요. 빈자리를 메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빈자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P143

니체는 "시간의 이빨이 씹기에는 너무 딱딱해서 수천년이 지나도 소화되지 않은 채로 남는 문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시대의 양식으로 소비되면서도 음식 속 소금처럼 결코 무뎌지지 않은 훌륭한 경구들이 있다는 겁니다. 분명 삶의 어떤 진실을 담은 훌륭한 작가의 말, 수백 수천 년 동안 인류 정신을 일깨워 온 철학자의 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인류에게 시간을 넘어 남겨진 말들입니다. 남겨진 말, 그것을 유언(遺言)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점에서 훌륭한 철학자들의 말은 모두 유언입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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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 멈춰버린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
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희상 옮김 / 원더박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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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지지자를 책임 있는 임원의 자리에 두면서 장기적으로 역량을 키우는 일, 그렇게 해서 든든한 구조를 빚어내는 일, 이 모든 작업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 P27

오늘날 개인은 "유일한 경험", 곧 쉽게 하기 힘든 "고유한 문화가치"를 약속해주는 집단이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 설명한다. 놓치면 다시 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리고 독특하고 유일한 경험은 대중 시위와 같은 아주 특별한 사건에서 맛볼 수 있다. 레크비츠는 이런 경험을 하는 대중을 "독특한 단일 집단"이라 불렀다. "독특한 단일 집단은 실천 전략뿐만 아니라, 스토리와 상상력도 함께 공유하며 밀도 높은 감정을 맛본다." 함께 노래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면서, 악당을 비난하고, 영웅을 숭배하며, 좋은 미래를 상상하는 꿈을 서로 나누면서 우리는 가슴 뜨거워지는 감격을 경험한다. 이 꿈이 조금이라도 현실에서 실현될 때, 우리는 그 감격을 절대 잊지 못한다. 성공적인 저항, 확실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고, 역사책에 기록되거나 최소한 일간지 전면을 채운 저항에 동참했다는 기억은 이 저항을 "유일무이한 사건" 단 한 번뿐인 특별한 사건으로 만든다. - P47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개인이 집단에 가지는 소속감이라고 대다수 연구는 확인해준다. 흥미롭게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거라는 확신이다. 특히 주변의 가족, 친구, 이웃, 동료가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 안에서 편안하면서도 고양된 기분을 맛본다. 홀로 저항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결실을 거두기 힘들 뿐 아니라, 고립되어 쉽사리 공격받을 수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 이뤄낼 때의 기분, 자신이 속한 집단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확인,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는 확신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함께할 때 흔쾌히 행동에 나선다. - P59

여기 제시된 성공적인 저항 사례들이 처음에는 절망적이고 극도로 암담했던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사회를 지탱해주는 기둥을 흔들려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돌덩이에 부딪혀야만 한다. 기존 제도 안에서 작은 성과를 거두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 제도를 싹 뒤엎는 거대한 변혁을 이루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겉보기로는) 실패해야만 한다. 제한적인 힘으로 되도록 많은 기둥을 가능한 한 꾸준하게 흔들려고 하는 사람은 저항운동의 초기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드문 성공에 조바심이 나고 속이 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란 두꺼운 널빤지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말에 빗대 말하자면 저항운동이 뚫어야 하는 두꺼운 널빤지는기둥들이다. 기둥을 흔드는 지난한 작업에서 겪는 패배, 정치적이든 사법적이든 문화적이든 실패와 좌절은 저항이 애초부터 희망이 없다는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패배는 일종의 시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결과로 우리는 어떤 기둥(그리고 사안에 따라 어떤 운동가)이 어느 정도 불안정한지, 어디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이 달라지면 누가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일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변하지 않을지 등의 소중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 P91

관심의 생태를 의식해야만 하는 저항은, 제아무리 도발적이고 대담하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는 사안을 놓고 토론하기 위해 되도록 정밀하게 사회체계의 언어와 매체에 적응해야만 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저항은 사회체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문제가 되는 사안을 해석할 스토리(누가 무엇을 주장하는가? 누가 그 적수인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가?)를 제공하지 못하는 저항은 사회 구성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고, 집단의 마음속에 희망을 심어줄 수 없으며, 결국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저항운동이 관심의 생태와 관련해 풀어야 하는 중요한 물음은 이렇다. 저항은 그 목적과 대상을 어떤 이야기에 담아 들려주어야 할까?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악당은 누구인가? - P142

오로지 자본이라는 가치에만 매달리는 통에 인간이 수동적이며 일차원적으로 전락한다고 마르쿠제는 냉철하게 진단한다. 그런 인간은 오로지 "부족해"와 "더 많이"만 되뇐다. 인간은 부족함을 걱정하며 과잉을 추구한다. 인간은 부자를 질투하고 빈자를 경멸한다. 이런 물질주의의 기준을 넘어선 다른 세계, 훨씬 더 나은 세상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약속해주는 내일을 떠올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마르쿠제의 글을 읽으며 나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설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정확한 진단임을 깨달았다. 변화하려는 힘과 이 변화를 막으려는 힘의 충돌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우선, 평화 저항은 세상을 빠르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지금 당장은 부족할 게없는 괜찮은 상황이기에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싸우려 하지않는다. 기후 위기가 코앞에 닥쳐왔음에도 기름을 펑펑 쓰면서풍요를 만끽하고 있는 탓에 우리는 투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민주사회의 대다수 국민이 갈등으로 얼룩진 정치를멀리하는 이유는 이미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풍요와 자유는 숱한 갈등을 피하지 않고 해결하려 노력한 선대의 정치 투쟁 덕분임을 우리는 잊고 있다.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파업과 시위와 점거 같은투쟁으로 마련해준 미지근한 욕조에 누워 있다. 아직은 나가서싸울 만큼 물이 차갑지는 않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이제 곧 이런 호사가 끝날 거라는 사실을 잘 안다.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물은 차가워질 뿐만 아니라, 아예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점을. 자신에게 닥칠 위기에도 나서지 않고 수수방관만 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우리를 심각하게 좌절시킨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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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루치의 낙담
박선영 지음 / 반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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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전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내가 한 것이 실망도, 절망도, 비관도, 포기도, 체념도 아닌 낙담이었기 때문이다. ‘낙담: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몹시 상함‘ 떨어질 落에 쓸개 膽을 쓴다. 쓸개가 떨어지는 기분. 사막의 낙타가 흘리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어떤 뜨듯하고 축축한 액상의 정서가 이 단어에는 배어 있다. [낙땀]. 비슷한 뜻을 지닌 그 모든 단어들 중에서 낙담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럽고 대견한 단어다. 시무룩한 얼굴과 축 처진 어깨, 저무는 석양처럼 한쪽으로기울어진 고개를 한 채, 떨어진 쓸개를 주워담으며 하는 말. 에이, 다시 한번 해보자. 쓸개를 떨어뜨린 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단어에서 풍기는 한시성은 마음껏 낙담하도록 거대한 자유를 준다. 작은 일을 도모하며 작게 실패한 사람이 금세 딛고 일어나 다시 이뤄낼 그 작은 무언가를, 낙담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상상한다. 손에 든 지갑을 실수로 잠시 땅에 떨어뜨린 것처럼 용기와 줏대가 잠시 소강하는 것뿐.
다시 집어올리면 그만이다. 때로는 후두둑 눈물이 떨어질 때도있지만, 손등으로 재빨리 훔치며 슬쩍 웃어본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절망하지도 않았고,
비관하지도 않았고, 체념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치의 낙담을하고, 다음 날이면 다시 하루치의 작은 기대를 품으며 사소하고 한심한 일들을 계속한다. - P14

미학의 정점에는 윤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윤리적이지 못한 존재들이 그래도 윤리적이고자 온 힘을 쥐어짤 때, 부끄럽기 싫어서, 차마 부끄러울 수 없어서, 눈 질끈 감고 옳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어떤 숭고의 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누가 보든 말든(봐주면 더 보람차겠지만) 내게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이익이 되면 더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직하게 하는 사람들, 하기로 약속한 일은 어쨌든 끝내 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보상도 없다. 그 일을 우직하게 계속하고 있을 유인이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태생이 우직하므로 그렇게 우직하게 일생을 산다. 그들은 승리하지 못한다. 보상도 없이, 보람도 없이, 패배감 속에서, 그렇지만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렇게 산다. 나는 우직하고 싶지만 마냥 우직하기엔 약아빠진 인간이라서, 언젠가는 흉내 내는 이 짓마저도 때려치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라서, 이런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때면 울면서 달려가 부둥켜안고만 싶다. 당신들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것이 없네요. - P52

중요한 건 지금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느냐가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안 하고 있는 얘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대체로 진실은 거기에 있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있는 사람들. 그들이 하지 않는말. 모두가 대세를 얘기할 때, 말없이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고있는 사람들. 그러다 찰랑찰랑 컵 위로 넘칠 듯 말 듯한 물이 표면장력 붕괴와 함께 범람하기 시작할 때, 그때가 불멸인 것처럼 보이던 그 승리자의 목을 치는 순간이다. 그들은 당황하며 항변할 것이다. 갑자기 왜 이래? 아니, 갑자기가 아니야. 절대로, 갑자기가 아니야. 하지 않은 말들의 기미를 알아차리려 귀를 쫑긋 세우기를 멈추는 순간, 당신의 몰락은 예정돼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늦은 것이다. - P60

실금이 가지 않는 관계라는 게 가능할까. 오래 사용한 모든 것들엔 실금이 간다. 지속적 관계와 실금이 없는 관계라는 건 상호 모순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이제 시간의 횡포한 위력을 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아르놀트 하우저가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과 『감정교육』에 대해 논하면서 말했듯,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큰 재난이 아니라 작은 재난들"이다. 하우저는 이 소설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마담 보봐리와 프레데릭이 아니라 ‘시간‘이라며,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고 말한다. 세계문학전집의 저 지루한 명작들은 "삶을 좀먹어 들어가는 시간의 개념"에서 양태된 것이기에, "인간을 단 한 번의 결정타로 파멸시키는 초시간적 운명의 개념"에서 빚어진 고대 그리스 비극과 본질적으로 판이하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서글픈 사실이다. 이러한 점진적이고 눈에 안 띄고 그러면서도 막을 길 없는 쇠진의 경험, 거창한 파국이 지닌 놀라운 효과조차 만들어주지 않는 조용한 삶의 침식의 경험은 감정교육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 현대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나는 하우저의 이 문장을 20년이 넘도록 잊지 않고 있다. 쓰고나면 언제나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문장. 거창한 파국이 지닌놀라운 효과조차 만들어주지 않는 조용한 삶의 침식. - P83

전형적인 백인 상류층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 로스쿨에 다니고 있던 25세의 미남 청년이 우울증과 투쟁을 벌여왔고, 새해 전야에 한 장의 짧은 노트를 남긴 채 떠나갔다는 팩트는 흔히 보던 부고 기사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유서가 나를 무너뜨렸다. "부디 저를 용서하세요. 오늘은 병이 저를 이겼어요. 저를 위해 서로를, 동물들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세요. 모든 사랑을 담아, 토미." 한 문장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읽고 또 읽고 가만히 소리내 따라 읽어보았다.

오늘은 병이 저를 이겼어요.

그가 가까스로 병을 이겼던 많은 나날들. 그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가 입었을 무수한 부상과 상처들. 용맹하게 싸웠으리라. 부단히도 싸웠으리라. 헌신적으로 사랑해주는 가족이있고, 지지해주는 많은 친구들이 있고, 남 보기엔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인데도 그는 그날 지고 말았다. 병이란 그런 것이다.  - P103

타인의 고통에 대한 척도로서가 아니라면 자기연민은 얼마나 추잡한 감정이란 말인가. - P124

삶이란 게 타인을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곰곰 다시 생각해본 후 역시 또 오해하는 것이라고 필립 로스가 <미국의 목가>에 썼었지. 오해도, 이해도 하지 않고, 그냥 좀 살아볼 순 없을까? 의미를 추출하려는 의지는 아마도 미래를 예측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투자에 앞서 수지타산을 맞춰보려는 것. 아닌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손절해버리려는 조급함. 손해 보지 않으려는 얄팍한 계산속. 그런 마음으로 보면될성불러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꾸 의미를 찾으려는병증은 내 가난한 마음의 소산이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최종적인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너무도 성급한조바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의미의 씨앗도 심기 전에 의미의 과실을 예측하려는 태도로 삶을 살아왔다. 의미란 그렇게 사전 예측되는 것이 아닌데, 매사 실행하기보단 예측하려고만 들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에야 우리는 그 이야기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너의 의미」는 너와의 여정이 모두 끝난 후에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부여하는 의미는 그저 오해일 뿐이다. 의미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시작도 하기 전에 의미부터 찾으려는 이런 삶의 태도 역시 과대망상증이라는 걸 나는 기타교습소에서 뒤늦게 배웠다. 의미를 예측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모하다. 의미란 사후적으로 추출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이 일의 의미는 이 일을 다한 이후에야 파악할 수 있다. 다 할 때까지는 그냥 하는 것이다.
그래, 의미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 나는 그동안 의미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다. 이제 그런 인문적 게으름은 내다 버리도, 공학적 성실을 몸에 익히고 싶다. - P148

고통이란 속인주의가 아닌 속지주의가 적용되는 영역이라, 지금 그 고통의 강에 한 발이라도 담그고 있지 않다면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다. 고통의 속지주의. 나는 그것을 신봉한다. - P181

그러나 두 번째 성찰은 나 같은 범인도 삶의 태도로 한번 도전해봄직하다. 베토벤의 약한 이행부들처럼 삶의 시시한 순간들은 지복의 순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깨달음. 이것은 단지 예술 작품의 구성 원리인 것만은 아니다. 삶의 자세로 익히고 기억해두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지금 베토벤의 약한 이행부들을 연주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의 시시하고 지루한 부분들을 묵묵히 통과해가는 거다. 클라이맥스로만 구성된 이야기는 놀랍기는커녕 아마도 포르노처럼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늘 잘하는사람의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그가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본인으로서도 딱히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다. 일말의 자부심은 있을지언정, 내려앉는 순간에 대한 불안과 전전긍긍으로 지루한 고공곡예를 계속해야 한다. 슬프게도 늘 잘하는 사람은 끝내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치고 올라가는 반전의 동력이 확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하기 위해서는 못해야 한다는 것.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루하고 시시해야 한다는 것. 이런 생각은 우리에게 놀랍도록 큰 해방감을 준다. - P213

클로저란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다. 마무리, 결말, 종료, 결론...... 모두 어딘가 부족하다. 느닷없이 비극이 나를 찾아와 가격할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하는 것.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고 직면하는 것. 왜 하필 나란 말인가, 라는 끝도 없이 솟구치는 질문에 마침내 ‘그럴수도 있다‘며 세계의 부조리를 수용하는 것.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결말이라고 인정하는 것. 이만하면 되었다, 울면서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 그러나 살아야 하므로 두 발 파묻힌 콘크리트 바닥을 가차 없이 곡괭이로 내리치는 것. 더 이상은 ‘왜‘와 ‘만약‘에 시달리지 않으며, 슬프지만 현명해진 얼굴로 깨진 콘트리트 속에서 한 발씩 꺼내 마침내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렇게 지속되는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클로저라는 저 한 단어에 모두 응축돼 있을 것이다. - P227

종결감sense of closure. 내가 느낀 기쁨이 그것이었다. ‘종결‘이 클로저의 가장 그럴듯한 번역어일 것이다. 종결 없이 끝내버린 생애사의 주요 사건들은 어딘가에 매복해 있다 돌연 우리를 가격한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산채로 묻혀 있다 훗날 더 추악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비겁하게 도망친 관계, 제대로 애도하지 않은 상실, 직면하지 않고 회피한 생의 진실은 원한 서린 귀신처럼 어느 모퉁이에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원혼을 달래는 진혼굿처럼 우리에게는, 아무리 힘겨울지라도, 클로저의 여정이 필요하다. - P235

무엇이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는 것일까. 잃게 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것, 누구도 내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덕성과 지성이다. 우는 이도 웃게 하는 유머와 함께 울어주는 눈물이다. 타인의 환난을 외면하지 않는 착한 마음과 부당함에 함께 맞서는 용기다. 자신의 오류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수정하는 성찰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겸손, 지성을 흠모하고 진리를 수행하는 지혜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의덕성이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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