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margin)에 있는 것들"이란 의미에서 파생된 마지네일리아는 책의 여백에 남기는 표식, 주석, 메모, 삽화, 분류할 수 없는 반응의 흔적들을 총칭한다. 중세 수도회나 근대 교육 기관에서 일종의 공부 관행으로 자리잡았던 마지네일리아는 독자의 독립적인 시선과 위치를반향하는 비평적 행위로, 또 중요한 외부 공간으로 부상하며 학문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해왔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초기에는 마지네일리아의 주체와 연구 대상이 남성 철학자와 작가, 그 계승자에 한정되었다. 그들이 마지네일리아를 사용하는 방식과 가치를 주요하게 유통하고 축적하는 동안 가장자리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은 새로운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 여백, 가장자리, 곁, 빔,
소외 등 마지네일리아가 내포하는 의미가 그것을 실천하는 위치와 맥락까지 결정하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언어에서 소외된 이들이 마지네일리아라는 공간에서 중심과 가장자리, 텍스트와 주석, 인쇄된 공적 매체와 손으로 쓴 사적 메모 등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 P9

읽기는 타자의 도움으로 나를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실천이다. 읽는 사람은 문장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진술할 수 있는 육체의 증인이다. 그걸 모르는 이들만이 무모한 리뷰를 쓴다. 이건 H의 말이다. 이 책 한 구석에 미리 쓰인 마지네일리아다. 읽고 쓰는 여성을 옭아매는 이중 억압이다. 어느 쪽이 더 공포스러울지 모르겠다. 거울이 아예 없는 것과 거울이 너무 많은 것 중에서. 공포와 함께 여기 여백은 충분하다.

당신은 독자이다
당신은 나의 먼 친족이다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다
내가 먼 친족인 것처럼
먼 친족에게 하듯이
오직 누군가의 설명을 통해서만 보고 들리는

당신도 나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내 말을 듣고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당신이 나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P15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도 나는 끄떡없이 글을 쓴다. (386)

이것은 텅 빈 부재의 자리에서 고백하는, 세계를 향한 최선의 사랑이다. 클로디 원징게르의 「불에 탄 종이들」에서 재의 형태로 남은 검은 책 위에 하얗게 비치던 글씨처럼. 책임감의 의미에서 인간인 "우리는 그보다 훨씬 광대한 존재" (180) 이므로 더 크게 사랑해야 한다. 소피는 그사랑을 "나를 나보다 더 믿" (385)는 타자에게서 배웠다. 하나이지만 무수히 많은 존재로 우리에게 온 예스에게서. - P74

얼마 전 노예가 쓴 자서전을 읽었어.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고통스러운 상황 묘사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아. 오히려 어떤 수사적 허위들이 너무 없어서였다고 할까. 불쑥 튀어나온 순전함에 걸려 넘어지면 한동안 못 일어나는 거야. 그런 문장들. 할머니는 돈을 벌어 자식들을 사려고 애썼다. 같은. 이게 무슨 말이지? 잠시 그냥 있어. 어떤 사실이 오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이야 이게?" 하게 되는 거야. 비슷한 문장이 자꾸 나오고 그럴 때마다 나는 활자들의 표층을 뚫지 못하고 망연히 있어. 이런 문장은 어떻게 건너가?

역사는 액체다. 사방에서 사방으로 틈입한다. 이런 역사는 어떻게 건너가, 라고 물었던 셈인데 동시에 그들의 역사 일부는 이런 역사를 건너가려고 애쓴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걸 떠올린다. 토니 모리슨이 애초에 약탈과 폭력이 있었다는 말로 수업을 시작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흑인 역사를 시작하는 문장은 그렇게나 무거웠다. 무거운 걸 받아들고 나와 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본다. 친구의 답장은 간단했다. "나의 엄마와 엄마의 엄마가 건너갔듯이" - P92

노예였던 여성이 쓴 자서전에 그런 문장이 있었어. 노예 여성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잔인한 저주나 다름없다고. 백인 여성이라면 그 아름다움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노예 여성에게는 수치와 타락, 폭력을 부르는 이유가 된다고.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갈망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19세기의 교훈이 20세기에도 유효했던 거야. "그 아름다움"은 백인이 표준이라고 가르쳐줄 자매도, 엄마도 페콜라에게는 없어. 뭔가 너무 없어.

마지막 문장을 쓸 때는 명치로 열이 모인다. 뭔가 너무없는 어린 여자. 유색인과 "검둥이"는 다른 존재라는,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비명소리만 자기 것인 어린 여자. 겨울 다음에는 봄인데, 봄이 오면 이 뭔가 너무 없는 여자애가 조금은 살 만해지길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는데 친구의 답장 알람이 울린다. "곧 봄이라는데 여전히 추워. 어떤 문은 닫고 어떤 문은 열어둬. 너무 없는 사람에게 활짝, 이라는 건 없어." - P94

"나는 주변부에서 자랐고 그 가치 전부를 물려받았어요. 내가 살아오며 읽은 모든 것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가장자리에서 비범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변화도, 의식도, 마법도(더 나은 단어가 없네요) 전부 가장자리에서 일어나죠. 모든 가능성은 가장자리에 있어요." * - P141

자기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 (speaking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 (speaking nearby)를 제안한 트린 T. 민하는 제일 먼저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고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라고 제안한다. "근처에서 말하기"는 타자를 대표/ 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해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이며, 우리는 그저 가까운 거리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이해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의미를 규정하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멈추고 그 의미가 봉쇄되지 않도록 의미 형성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만 타자가 여백으로 들어와 그 자리를 원하는 방식으로 메울 수있게 된다는 것이다. 타자를 여백으로 초대하는 일, 상상하면 아름다운 일이다. - P167

괄호 열고 그 말이 첫말이었다 마침표 멀리서 온 여자가
있다 마침표 온 만큼 더 멀리 가고 싶은 여자가 마침표
말이 여자에게 묻는다 마침표 따옴표 열고 실제로
죽지 않고도 더 멀리 물음표 따옴표 닫고
부러지고 부서진 말이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마침표
텅 비워져 돌아온다면 쉼표 침묵으로 돌아온다면 말없음표 괄호닫고 - P184

"모든 여성은 그 안에 모든 여성들을 품고 있다. 모든 여성은 모든 여성들의 여성이다"의 세계와 ‘모든 여성은 다른 전선에 서 있다‘의 세계를 오가는 결속과 단절 사이에 움푹 파이는 틈, 때로 폐허처럼 버려진 그곳에서 미친 말이 태어난다. 죽을까 죽일까 사이에서, 버릴까 바랄까 사이에서. 그러나 어떤 선택이든 미친 말은 안정적인 목적지를 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보다 더 먼 곳에서 죽고, 언제나 처음과 다른 장소로 살아 돌아온다. [딕테는 그것을 가장 잘 증언하는 침묵과 동공의 장소이므로,

(그 말이 첫말이었다. 멀리서 온 여자가
있다. 온 만큼 더 멀리 가고 싶은 여자가.
말이 여자에게 묻는다. "실제로
죽지 않고도 더 멀리?"
부러지고 부서진 말이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텅 비워져 돌아온다면, 침묵으로 돌아온다면...)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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