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동경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질투하고 증오할꺼. 그래서 갖고 싶어 하고,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고 싶러 하곹 불쌍해하다가 미워하고, 안타까워하다가 꺾어버리고 싶어할까. - P69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 순간을바라보는 일.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나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면 자유로워진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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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단노 도모후미.오쿠노 슈지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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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려도 혼자 고민하지 말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목소리를 내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가족은 물론,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전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족에게 상담하기 어려워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그런 파트너를 하나씩 늘림으로써 평범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간병인이 아니라 같이 뭔가를 하는 파트너이자 불가능해진 것을 도와주는 활동 지원자인 셈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돕고 할 수 있는 것은 같이한다."
이것이 치매인으로서 내가 세상에 바라는 것입니다. - P20

처음 가는 장소나 강연회장에 갈 때도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길 안내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회식 때도 가게 이름만 알면 갈 수 있습니다. 혼자 쇼핑을 하러 가면 헤맬까 봐 걱정이지만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안심합니다. 이렇듯 스마트폰은 치매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도구입니다. 다만 내가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치매가 되기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치매 진단을 받은 뒤에 사용법을 배우려면 쉽지 않습니다. 치매가 되기 전에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둬야 합니다. 그러면 치매에 걸려도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평범한 일상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 P84

카드를 가지고 있을 때와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다릅니다. 카드를 보여주기만 해도 이해한다는 표정이 돌아옵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앞으로는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을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이 카드를 사용하자고 결심했습니다.
낯선 사람들도 도움을 청하면 모두 다정하게 알려줍니다.
이름을 잊어버려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했을 때 옆에 앉은 여성이 "저도 그 역에서 내리니까 같이 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도와주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할 수 없는지 알려줘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이 병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 P92

불안, 공포, 동요, 불쾌감 등으로 마음이 안정돼 있지 않으면 실수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여기서 ‘환경‘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 P116

질문할 때에는 단답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열린 질문이라고 영업 때 자주 사용했던 방법을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열린 올림픽 야구 경기를 보셨나요?"라고 물으면 "봤어요"나 "안 봤어요"로 끝나지만 "옛날에는 어떤 스포츠를 하셨나요?"라고 물으면 "야구를 했죠"처럼 이야기가 확대됩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울은 전골이 좋지요?"
라고 물으면 "네" 하고 끝나지만 "겨울 음식은 뭘 좋아해요?"라고 말하고 "전골이나 군고구마, 정말 많지요"라고 덧붙여 먼저 얘기합니다. 상대가 "전골이 좋아요"라고 말하면 "어떤 전골이 좋아요?"라고 묻고 "두부전골"이라고 답하면 "아! 두부전골을 좋아하는군요" 하고 마지막은 확인하는 의미에서 예나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게 합니다. 영업에서는 되도록 고객의 얘기를 끌어낼 수 있도록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없게 질문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치매인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외로 이야기가 잘될 겁니다. 치매인 중에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쉽게 대답할 수 있도록 예, 아니오로 대답하게 하면 유도 심문이 돼버립니다. - P239

이제까지 오렌지도어는 안식처가 아니라 ‘입구‘라고 얘기해왔습니다. 입구라는 말을 계속하지 않으면 즐거우니까 모두 이곳을 안식처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맙니다. 오렌지도어는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즐거우니까 오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오렌지도어는 첫걸음을 내딛기 위한 입구이고일본워킹그룹은 국가에 우리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입니다. 그 점을 명확하게 해두지 않으면 근간이흔들립니다.
그럼 왜 지역 워킹그룹이 필요할까요? 가까운 곳부터 바꿔야한다는 것을 스코틀랜드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라가바뀝니다. 국가가 바꾸려고 해도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필요로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역을 바꾸는 것이 바로 국가를바꾸는 것입니다. - P244

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갈까요? 다른사람과 만나면 즐겁기에 가는 겁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나 장소가 있으면 시간을 내서라도 가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강연회도 굳이 시간을 내서 가는 것은 뭔가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잡지도 자신에게 좋은 정보가 있을 것 같아 돈을 내고 삽니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갔는데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치매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해당할 겁니다. - P251

자립을 생각할 때는 ‘자기 결정‘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생활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생활 지원자의 힘을 빌려 과제를 수행하는 겁니다. 보호를 받아 기능이떨어지는 것보다 어느 정도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이게 더 즐겁게 생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P255

일본의 케어 매니저도 지역지원센터 사람도 왜 치매인에게 직접 묻지 않고 가족에게만 질문할까요?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그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선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같이 할 수 있을까, 치매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그야 당연하지!‘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당연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최근 치매인 여덟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얘기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케어 매니저를 아세요?"라고 물었더니 모두 "알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지만 얘기를 나눈 적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케어 매니저 대부분은 치매인에게 살짝 인사한 뒤 "건강은 어때요?"라고 묻는 게 다입니다. 다음은 가족과 상담하니 치매인과 가까워지거나 신뢰가 쌓일 리가 없죠. - P261

스코틀랜드의 치매 카페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축구만 얘기하는 축구장 미팅룸 같은 곳도 있습니다. 잉글랜드 북동부의 요크시 교외에 있는 아로마 카페에도 가봤습니다. 여기도 치매 카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이곳들은 처음부터 치매인만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주 평범한 카페였다고 합니다. 치매인 대여섯 명이 여러 카페를 돌아보고 치매에 친화적이라고 판단되는 곳에 ‘치매 친화시설(Dementia Friendly)‘이라는 마크를 붙여 선정하는 방식입니다. 치매에 친화적인 시설인지 아닌지를 당사자가 결정하는 겁니다.
물론 카페에는 치매를 공부한 사람과 자원해 일하는 치매인도있는데 도대체 왜 치매 카페인지 모를 정도로 평범해 보였습니다. 클래식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느긋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치매인이 일반인과 섞여 평범하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일본처럼 간병인이 데리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동행한 야마사키 선생님이 "이곳에는 한 달에 치매인이 몇 명이 오나요?"라고 책임자에게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런 걸 알면 이걸 하는 의미가 없어요. 모르니까 좋은거아닌가요?"
여기서는 누가 치매인지 묻지 않습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치매인이 곤란하면 도와준다, 그 정도입니다. 그래야 치매인이 안심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카페와 같으니까치매인도 느긋하게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치매가 아닌 사람도 옵니다. 그런데 일본은 반대입니다. 치매인만 모이게 합니다. 이상하죠. 그러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안식처가 재미있지 않기 때문에 가족도, 치매인도 가고 싶지않은 겁니다. 하지만 가족은 치매인이 집에 있으면 힘드니까 간병보험을 이용해 데이 서비스를 보냅니다.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교적인 사람은 그래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일반사람이 가서 재미있으면 치매인도 재미있습니다. 치매인들의 안식처가 정말 치매인이 가고 싶어하는 장소인지, 다시 생각해볼 때입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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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없는 시간 - 나이 듦과 자기의 민족지
마르크 오제 지음, 정헌목 옮김 / 플레이타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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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자서전을 쓰는 동력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애적 유혹보다는 확실한 증거를 활용해 시간 속에 자신을 위치 지으려는 갈망에서 나오는 듯하다. 이런 갈망은 관광지에서 풍경이나 기념물을 직접 보는 대신 사진으로 남기느라 여념이 없는 관광객의 심정과 유사하다. 가벼운 사건과 찰나의 순간이 덧없음을 감안할 때, 지나간 체험을 분명한 믿음으로 바꾸어 남기기 위해서는 한 번이라도 대상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쉽게 기억을 빠져나가는 현재가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대상에 대한 기억이 이미 사라지고 있다는 걸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망각을 늦추는 경향이 있는 이른바 애도 작업과는 다르다. 타자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문제인 것이다. - P40

오늘날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건 당시 내가 느낀 보편적인 희열의 주관적인 본성과 부분적인 환상이 아니라 그 순간이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는 확실함 자체다. - P50

‘인식‘reconnaissance이라는 단어가 ‘재발견‘과 ‘감사‘라는 두 의미를 지니듯 독자들은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재발견 혹은 적어도 시간이 안기는 불안 속에서 자신의 양가성을 재발견하고 저자에게 감사하게 된다. 사실 우리 안에는 하나의 내적 목소리가 존재하는데, 때때로 속삭임과 중얼거림, 의성어, 찡그림으로, 더 드물게는 "우리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을 때" 명료한 단어 몇 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목소리는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현실에 참견하고 우리를 방해하며 때로는 가혹한 말로 우리를 평가("이런 바보멍청이 같으니!")하기도 한다. 요컨대 내적 목소리는 우리가 ‘구닥다리 노인네‘hors d‘age가 되었다는 의식을 언어로 표현한다. 즉 우리 삶의 과정에 동반되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게 만들며, 운명과 우연, 나이와 무관하게 자유로이 부유하는 관심의 일부를 우리 안에 보존하는 일상적인 성찰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다소간의 환멸조로 "아, 이런, 너무 늙어 버렸군. 이젠 더 이상 젊어 보이지 않아…………"라고 자신에게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에 대한 동일시 없이 스스로를인식하고 한쪽으로 밀어 두는 것이다. 마치 자신에게서 조금은 빠져나왔지만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은 등장인물을 그려 낸 작가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분열된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소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장치 (등장인물들의 주체성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작가)에 놀라지 않는 까닭을, 그리고 우리가 많은 소설에서 우리 삶에 관한 은유를 대략적으로나마 찾으려 하는 까닭을 설면해 줄지도 모른다. - P58

따라서 문제가 되는 건 물질로서의 시간이요, 우리가 기꺼이 다듬으면서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시간이며,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함께 노는 시간이다. 나이 든 친구들이 다시 만나 기억을 나눌 때 이들은 지난날의 운치를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게다가 이건 좋은 일이기도 한데, 예전의 기억들은 사실 따분하고 지루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을 나누는과정에서 노화와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즐거운 무언가를 재발견한다. - P61

계절이 그렇듯 세대들이 이어지며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서로가 인간이라는 종의 성원권을 공유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가족이나 생물학적 재생산과 같은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서 유전hérédité이라는요인으로부터 자유로운 물려받음héritage의 휴머니즘을 주창하는 것이다. - P82

간혹 나이라는 것이 우리 바깥에 위치한 다른 어딘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곳은 우리 뜻을 묻지도 않고 사물이 변화하며, 그로 인해 우리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장소다. - P92

물론 시간이 초래하는 변화가 반드시 쇠락의 징후를 뜻하는 건 아니다. 어떤 책이나 영화가 ‘나이 들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사실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기억이 시작하는 지점에 하나의 관계(우리 자신이 책이나 영화와 맺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변하는 것은 관계며 우리 자신이나 작품이 변하는 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서 더 풍요로워질수도 있다. 변화가 의미나 본질의 상실을 초래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 P96

이렇듯 텍스트와의 관계는 생동적이기에 우리는 읽고 또 읽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지 않는 책이란 독자로 하여금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기대를 품게 만드는 책이다. 그런 책은 독자에게 자신이 영원히 살아 있다고, 그렇기에 자신과 독자를 연결한 운명이 "평생토록 영원히" 이어진다고 속삭인다. - P102

좀 더 이르든 뒤늦든 간에 가차 없이 가면이 벗겨지고 나이에 관한 가혹한 진실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온다. 노쇠함이라는 최후의 몰락을 맞이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화려한 면모-한창 시기의 남성성과 여성성-를 잃어 가기 마련이다. 노화는 일찍 자각되기도 하지만, 고령에 따른 신체의 쇠약은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다. 결국 겉모습의 변화와 내부의 기능 장애를 통해 사람의 몸은 그를 ‘배신한다‘. 이러한 참패를 인식한 사람은 자신을 몸이 가한 고통의 피해자로 느끼고, 죽음을 향한 과정에서 몸이라는 연약한 껍데기가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 전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여기에도 ‘박해받고 있다‘는 의식이 존재하며, 이 의식은 얼굴 없는 운명(치명적인 힘인 나이)의 도구로서 각자에게 찾아오는 질병들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할 수 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신체적 노쇠 -어떻든 노화 자체의 증거인-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를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 겪게 되는데, 이런 이중적인 고통은 오직 자연의 무관심을 전할 뿐이기에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쇠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러한 노쇠를 훨씬 더 일찍, 때로는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다. 노쇠를 일찍 경험하는 이들은 굴욕감을 선사하는 고통스런 몸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느끼는 비통함을 경감시켜 겪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부모가 아픈 유아와 청소년을 자주 병원에 보내듯 불안감을 느끼는 성인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한 박해의 결과로 여겨지곤 하는 가장 ‘부당한‘ 운명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터다.
자기 인식을 확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여기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건 바로 타자에 대한 인식,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타자가 나를 박해할지도 모르는 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노화가 타자에 대한 문제인 경우, 우리는 타자를 그의 몸이나 몸이 만들어 낸 기호들 (열정에서부터 두려움에 이르는, 미소나 눈물이 표현하는 무한한 뉘앙스 차이)과 온전히 동일시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의 몸이 삶의 기호를 더 이상 제공하지 않는 순간, 그리고 삶의 모든 속성을 지녔던 누군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몸과 구별하고 몸을 심문하면서 저주하거나 아첨하도록 강제하는 환상은 계속해서 우리 눈앞에 어른거린다. 성찰적 의식의 술책, 즉 우리가 몸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실존한다는 환상은 타자가 죽음과 더불어 그 이전과 이후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면서 갑작스럽고도 최종적으로 사라진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깨질 수밖에 없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몸에서도 떠나면 더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고 무無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남는다고 믿고 싶었던 인간이 발명한 단어들 -특히 공포와 희망으로 가득 찬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 은 공허함만을 감출뿐이다. - P107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나이를 ‘만들건‘ faire 아니건 간에 우리는 우리의 나이를 ‘가진다‘avoir. 정확히 말하면 우리도 나이를 가지고 나이 역시 우리를 가진다. 나이를 가지는[나이가 드는] 것이 살아 있음을 뜻하듯 노화의 기호는 동시에 삶의 기호기도 하다. 일찍이 키케로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처럼, 자기 몸에 특히 신경 쓰는 사람들이 대는 구실의 배후에는 겉멋을 넘어 온전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많은 이에게 온전한 삶은 이른바 활동적인 삶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제약 탓에 불가능한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은 은퇴가 일종의 해방과 거듭남의 기회, 마침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간- 계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더는 나이를 고민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을 얻게 되는 기회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행운이라는 문제도 있다.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 비해 노년의 고통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거나 더 늦게 받는다. 그 결과 이들은 자연스럽게 ‘고양이의 지혜‘를 체득해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신의 몸을 활용하게 된다. 이들은 몸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영리하게 자신의 힘을 비축해 둔다. 따라서 그들은 노년의 재앙에 관한 모든 비관적인 이야기와 정반대되는 사례를 제공한다. 가끔 우리는 삶을 즐기는 법을 익히기 위해 끝까지 기다려 온 것만 같은 노인들이 들려주는 멋진 유머에 놀랄 때가 있다. 당연한 일을 가리킬 때 고전적인 예시로 자주 인용되는 격언이 이를 요약해 준다. "죽기 5분 전까지만 해도 라 팔리스 씨는 아직 살아 있었다"Cing minutes avant sa mort, Monsieur de La Palisse vivaitencore. 그렇다, 바로 그거다. - P112

자신의 과거와 관련해 우리는 모두 창조자이자 예술가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을 영원히 관찰하고 재구성하면서, 즉 뒤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 P116

나이가 든다는 건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만 이는 알고 있으면 좋을 특권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노년은 윗세대가 느꼈던 감정을 궁금해하면서 상상해 오기만 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합류해 세대 간의 거리를 좁힐 기회가 된다. 노년이 되면 결국 무언가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내가 어렸을 적에 노인들이 말해 준 것처럼 나이가 드는 게 크게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본 타자와 같다는 점에서 노년은 이국적 정취exotisme와 같다. 사실 노년이란 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를 때까지 쌓여 간 시간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더한 축적물이 아니다. 시간은 쓰여있던 글자 위에 다시 글자를 써 넣은 양피지와 같다. 거기 기록된 모든 일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지만, 때로는 가장 먼저 기록된 일이 가장 쉽게 표면에 드러나기도한다. 사실 알츠하이머병은 망각이라는 자연선택 과정에 가속이 붙은 현상일 따름인데, 말기까지 남는 가장 끈질긴 이미지-사실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아니더라도—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이미지다. 이런 관찰에는 잔인한 면이 있지만, 우리가 이를 반기든 개탄하든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 - P127

이 책의 첫 장 제목이기도 한 ‘고양이의 지혜‘는 바로 그런 고양이의 시간 감각이 우리 인간의 노년에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은유다. 오제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상상력의 원료가 되는 시간과 달리, 나이는 세월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만 보게 만들면서 우리에게 제약을 가한다. 그러니까 나이에 관한 인식은 추상적 관념인 시간을 시간 그 자체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선형적인 흐름 안에서만 이해하게 만들어 인간을 그 속 어딘가로 밀어 넣는다. 이런 인식하에 우리는 각각의 연령대에 맞추어 특정한 사회적 의무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면서 계속 나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세월의 흐름과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노화에 적응하면서 나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주는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양이의 삶이라는 은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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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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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어떤 시간들, 특히 당시에 우리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직전까지 갔던 어떤 순간들을 완전히 지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을 지난 후에야 얻게 된 역량이 필요하다. 얀은 스무살 이후에 걸을 수 없고, 점점 근육이 소실되어서 마침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한계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 속에서 살며 그가 배운 것들 덕분에, 비로소 그는 그 한계를 통과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스무 살이라는 한계 안에서 살 때, 즉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 즈음에 그 힘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방법이 있다. 그 한계를 통과하며 얻은 우리의 역량으로 바로 지금 그 한계 가득한 ‘과거‘를 진정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얀은 그렇게 서른여섯 살의 시점에서 스무 살이었던 ‘과거‘를 통과한다. - P14

그러나 이 책은 ‘지원 기관‘으로 대표되는 임상적, 관료적 시선이 개개인의 구체적인 몸을 이해하고 돕기보다는, 일반화된 질병에 대한 ‘임상적 사례‘로 개인을 분류하고, 당사자보다 마치 그 개인을 더 많이 안다는 듯이 신체와 삶에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관해서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원 기관 앞에서의 얀은 "정기적으로고장 나는 기계에 불과할 뿐이다." - P16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 - P36

어린이의 삶을 산다는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여유롭게 세상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가시적 대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외부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이것은 어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바로 그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고 있는 동안 ‘특별히 하는 건 없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즉, 타인의눈, 성인 어른들의 눈앞에선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말이다.

타인의 시선은 훈육과 통제를 의미한다.

타인의 시선, 성인의 시선은 시간을 더욱 가시적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여기까지의 시간. 학교의 수업과 수업 간의 시간. 쉬는 시간은 대기 시간이다. 대기 시간은 수많은 분과 초로 이루어져 있다. 책상과 벽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시간은 흐르지만, 흐르는 시간을 인지할 수 없다. 세상을 여유롭게 대하는 꿈을 꾼다.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 P57

내게 책임감이라는 것은 너무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밝힐 필요가 없다. 푸코에 의하면 책임감은 담론적으로 그 주체를 지배한다고 했다. 즉, 책임감은 그 주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방식에 조건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책임감은 항상 선제적인 조건을 포함하기에 내가 굳이 따로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는 행위, 내가 해야 하는 행위는 모두 책임감에서 나온다.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자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기 싫은 곳에 가야만 할 때, 낯설고 외딴곳에서 강의를 해야할 때, 불편하고 거북한 곳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해야 할 때면 그 전날 밤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몸이 반항할지라도 결국엔 책임감이 이기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P71

о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Erving Goffman)은 낙인을 뜻하는 스티그마(Stigma), 즉 신뢰할 수 없는 가시적 표식에 관해 글을 썼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피부를 불에 지져 표식을 남기는 것을 뜻했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탈옥자이거나,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삶, 즉 ‘폴리스(Polis)‘에 발을 들여놓기에 적절치 않은 사람이라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표식을 지닌 이와는 말을 나누거나 함께 어떤 일을 하는 것을 기피했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벌거벗은 삶이며 보호받지 못하는 삶이다." - P84

1794년, 프랑스에서 혁명력으로 테르미도르 열 번째 날이었던 7월 28일, 급진적인 자코뱅파의 리더 조르주 오귀스트 쿠통(Georges Auguste Couthon)은 단두대로 끌려갔다. 그를 동아줄로 결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의 몸은 근육 수축과 마비로 인해 일반인과 달랐기 때문이다.

쿠통의 휠체어는 현재 파리의 카르나발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살롱 의자 위에 속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쿠션을 얹고, 팔걸이를 덧댄 것이었다. 앞쪽에커다란 바퀴 두 개와 뒤쪽에 작은 바퀴 하나가 달린 것이 특징으로, 앞바퀴 두 개는 안쪽의 볼트를 축으로 각각 돌아가며, 이 두 개의 원시적 회전 메커니즘은 팔걸이와 같은 높이에 자리한 손잡이에 의해 조종된다.

쿠통은 이 기계를 스스로 조종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엄청난 힘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움직일 경우 기계는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손잡이 두 개를 동시에 움직여야만 앞뒤로 기계를 조종할 수 있었다. 그만큼 많은 힘이 필요했다.

짐작건대 그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밧줄로 묶은 자동차를 이로 끌어당기는 것과 비슷한 힘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바퀴는 통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조종 장치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휠체어는 마찻길이나 진흙길, 즉바깥에서 사용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왜 휠체어를 만들었는지, 그것이 그에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과 연민이 아니었을까. 그는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지 확인하기 위해 엄청난 힘과 노력을 들여 몸을 돌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방 안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움직였으며, 여기저기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쿠통은 자코뱅파에 속했으며, 공안위원회의 일원으로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의 리더 대다수는 그와 같은 날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쿠통의 처형은 조금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그 당시 의미심장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를 인도적인 방법으로 처형하기 위해 15분이라는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그의 특수한 신체 상태를 고려했을 때 요구되는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01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 가능한 유일한 방식인 문자는 권위적이고 이념적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데올로기, 즉 이념의 기능은 사회적 현실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불변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 P103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긴장 속에서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오다 보니"이만하면 충분해"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좋다. "이 일은 할 필요가 없어." 그렇다. 나는 내게 닫혀 있는 문을 억지로 열어야 할 필요도 없고, 내 자리가 없는 곳에서 억지로 내 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이런 반응을 내게서 이끌어 냈다. 왜냐하면 나는 러시아에서 몇몇 특정 한계를 느끼고 인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며 기초 과목을 섭렵하고 주요 과목을 선택하기 직전, 불현듯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일을 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가는 비슷한 종류의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곳, 그 나라는 내게 투쟁만 제공할 뿐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라는 말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동시에, 다른 세상을 향한 동경을 포기한다는 의미와도 같기에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모든 상실의 경험이 고통을 수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실의 경험은 슬픔을 동반한다. 슬픔은 더는 가능하지 않은 일, 더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 때문에 생겨난다. 슬픔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과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생겨난다. 이때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일수도 있다.

자아는 주어지는 것일 뿐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어빙 고프먼)

나는 러시아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경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평생을 바쳐도 될 만큼의 값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였다.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또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때 이후 나를 원하는 곳, 나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서서히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P125

보르헤스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서로 다른 미래와 서로 다른 과거는 동일한 순간을 시작점으로 생성된다고 말했다. - P147

당신은 걷고 있어요. 항상 넘어지지만, 그것을 매번 깨닫진 못하죠.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당신은 앞으로 살짝 넘어지지만 얼른 몸을 추슬러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죠. 걷는다는 것은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일이랍니다. (로리 앤더슨) - P173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렇다면 그 생각은 과연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 그림자를 내게 던지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낙인이 찍힌 개인도 우리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한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어빙 고프먼)

정체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닮기 위해 배우는 것이며, 동시에 각 개인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배우는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은 지금의 내 모습과 과거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차이를 보이는지 그 간격을 재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얼마나 그 모습에 가까워졌는지 알아보고 싶다.

낙인 또는 스티그마에 관한 고프먼의 개념은 수치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수치심은 실존적 변이와 연결되어 있다. 낙인 개념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낙인의 대상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 사회 및 일반 구성원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동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수치심은 기본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잘못된 조건하에서 사는 삶인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수치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는 글을 쓰며 수치심을 고찰하고 표출하며, 글과 함께 수치심을 내려놓고자 한다.

낙인은 행위를 통해 위장하고 억제할 수는 있지만 행위를 통해 제거할 수는 없다. 낙인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는 그 사람이 주변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따라 그가 하는 모든 행위를 해석하는 틀이 형성된다. 이 틀 안에서는 가장 순수하고 무고한 행위조차도 수치심이 초래될 수 있다. 내가 옷을 신중하게 골라 입고, 휠체어를 깨끗하게닦고,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나마 내가 보내는 다른 신호, 다른 표시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해석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내가 과거에 시도해 본 기존의 입증된 방식과 규정에 순응하는 방식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울분을 쏟아 내며 활동가로 살수도 있었다. 스스로를 쇠사슬에 묶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성가시게 할 생각은 없다.

저항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언어, 또 다른 태도이다.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다르다. 나는 나만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 말들과 이 책으로 세상 속에 나를 위한 자리를 만든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나는 세상의 한 부분을 재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과 이 책으로. - P191

가끔은 그처럼 쉽게 해결될 때도 있다. 사람들은 기꺼이 도움을 주려 한다. 그들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지만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안아 들어 올리는 일을 문제없이 해낼 수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거리를 두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고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뻣뻣하게 긴장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도움을 줄 때 내가 얼마나 약한지 또는 얼마나 강한지, 내가 어느 방향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언제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지 자세히 알기 위해 내게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우연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집에 조그만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도와줄 때면 나도 매우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 숨을 들이쉬어 보자.

물론 상황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도 있다. 다 큰 어른들은 낯선 이들에게 좀처럼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그들이 자신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만큼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면 꺼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명백한 원인이 존재하는 한계를 넘게 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장의 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내게 달려 있었다. 항상 그랬다. 수동성 또한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는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행동의 제약이 많지만, 그 때문에 수동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잠시 살았던 것은 이것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곳에서 미소 짓는것을 배웠고, 내 목소리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내 삶을 직접 연출하는 것을 배웠다. 숨을 내쉬어 보자. - P200

우리는 표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하며, 어떠한 보장도 없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P206

슬픔은 파도일 뿐 아니라 반향을 일으키는 파문이며, 폭풍 뒤에 오는 고요함이기도 하다. 이처럼 슬픔은 역설적이다. 슬픔은 내가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스스로 벗어난 것들에 대한 생각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슬픔은 시간이 흐르는것을 깨닫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목소리, "결코 다시는 안돼"라고 말하는 목소리다.

오래된 진료 기록을 읽을 때, 어린아이였던 나를 관찰하는 임상적 문서들을 읽을 때, 나의 미래를 예견하는 비관적이고 암울한 기록들을 읽을 때면, 내 삶은 생존에 관한 역사이며 나는 불행에서 구제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나는 나를 닮은 사람들, 나를 닮았던 사람들, 그리고 불행에서 구제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슬픔은 직접 가 보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다. (조앤 디디온)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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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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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표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하며, 어떠한 보장도 없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206쪽) 있으면서 가장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표본이 되기를 거부하고 예외적 존재가 되는 그 경계면으로, 가장자리로 한 발을 내딛는 용기는 우리 시대 모두가 직면한 과제다. 물론 그 경계의 끝에서 한 발을 더 나아가는 일에는 많은 고난이 따를 것이다. 얀이 모든 가장자리에서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말하자면 ‘서구‘의 가장자리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실패를 해야만 그 실패의 순간을 지나갈 힘을, 그 과거를 다시 통과할 몸을 우리가 가지게 된다는 점을 다시 유의하자.

…… 각 범주의 ‘표본’은 두 가지 길을 간다. 범주적 한계 앞에서 온전히 굴복하거나 한계를 극복한 예외 사례가 되거나. 굴복과 극복은 표면상 상반되어 보이지만 모두 임상적 시선에, 다수의 기대에, 권력의 통제 안에서 언제나 예정된 길이라는 점에사는 동일하다. 그렇기에 우리 존재와 삶이 특정한 기준에 의해 분류된 ‘표본‘에 그치지 않는 길은 굴복과 극복이 아닌 다른 선택지에 있을 텐데, 이 책의 독자라면 그 길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계 지어진 과거와 그 한계를 지나온 현재 사이를 가로지르며, 현재의 힘으로 과거를 다시 쓰기. 과거에 내 몸에 새겨진 흔적을 발굴하고, 인정하며, 현재를 끌어안기.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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