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인 자서전을 쓰는 동력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애적 유혹보다는 확실한 증거를 활용해 시간 속에 자신을 위치 지으려는 갈망에서 나오는 듯하다. 이런 갈망은 관광지에서 풍경이나 기념물을 직접 보는 대신 사진으로 남기느라 여념이 없는 관광객의 심정과 유사하다. 가벼운 사건과 찰나의 순간이 덧없음을 감안할 때, 지나간 체험을 분명한 믿음으로 바꾸어 남기기 위해서는 한 번이라도 대상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쉽게 기억을 빠져나가는 현재가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대상에 대한 기억이 이미 사라지고 있다는 걸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망각을 늦추는 경향이 있는 이른바 애도 작업과는 다르다. 타자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문제인 것이다. - P40
오늘날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건 당시 내가 느낀 보편적인 희열의 주관적인 본성과 부분적인 환상이 아니라 그 순간이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는 확실함 자체다. - P50
‘인식‘reconnaissance이라는 단어가 ‘재발견‘과 ‘감사‘라는 두 의미를 지니듯 독자들은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재발견 혹은 적어도 시간이 안기는 불안 속에서 자신의 양가성을 재발견하고 저자에게 감사하게 된다. 사실 우리 안에는 하나의 내적 목소리가 존재하는데, 때때로 속삭임과 중얼거림, 의성어, 찡그림으로, 더 드물게는 "우리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을 때" 명료한 단어 몇 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목소리는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현실에 참견하고 우리를 방해하며 때로는 가혹한 말로 우리를 평가("이런 바보멍청이 같으니!")하기도 한다. 요컨대 내적 목소리는 우리가 ‘구닥다리 노인네‘hors d‘age가 되었다는 의식을 언어로 표현한다. 즉 우리 삶의 과정에 동반되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게 만들며, 운명과 우연, 나이와 무관하게 자유로이 부유하는 관심의 일부를 우리 안에 보존하는 일상적인 성찰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다소간의 환멸조로 "아, 이런, 너무 늙어 버렸군. 이젠 더 이상 젊어 보이지 않아…………"라고 자신에게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에 대한 동일시 없이 스스로를인식하고 한쪽으로 밀어 두는 것이다. 마치 자신에게서 조금은 빠져나왔지만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은 등장인물을 그려 낸 작가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분열된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소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장치 (등장인물들의 주체성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작가)에 놀라지 않는 까닭을, 그리고 우리가 많은 소설에서 우리 삶에 관한 은유를 대략적으로나마 찾으려 하는 까닭을 설면해 줄지도 모른다. - P58
따라서 문제가 되는 건 물질로서의 시간이요, 우리가 기꺼이 다듬으면서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시간이며,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함께 노는 시간이다. 나이 든 친구들이 다시 만나 기억을 나눌 때 이들은 지난날의 운치를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게다가 이건 좋은 일이기도 한데, 예전의 기억들은 사실 따분하고 지루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을 나누는과정에서 노화와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즐거운 무언가를 재발견한다. - P61
계절이 그렇듯 세대들이 이어지며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서로가 인간이라는 종의 성원권을 공유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가족이나 생물학적 재생산과 같은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서 유전hérédité이라는요인으로부터 자유로운 물려받음héritage의 휴머니즘을 주창하는 것이다. - P82
간혹 나이라는 것이 우리 바깥에 위치한 다른 어딘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곳은 우리 뜻을 묻지도 않고 사물이 변화하며, 그로 인해 우리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장소다. - P92
물론 시간이 초래하는 변화가 반드시 쇠락의 징후를 뜻하는 건 아니다. 어떤 책이나 영화가 ‘나이 들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사실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기억이 시작하는 지점에 하나의 관계(우리 자신이 책이나 영화와 맺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변하는 것은 관계며 우리 자신이나 작품이 변하는 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서 더 풍요로워질수도 있다. 변화가 의미나 본질의 상실을 초래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 P96
이렇듯 텍스트와의 관계는 생동적이기에 우리는 읽고 또 읽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지 않는 책이란 독자로 하여금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기대를 품게 만드는 책이다. 그런 책은 독자에게 자신이 영원히 살아 있다고, 그렇기에 자신과 독자를 연결한 운명이 "평생토록 영원히" 이어진다고 속삭인다. - P102
좀 더 이르든 뒤늦든 간에 가차 없이 가면이 벗겨지고 나이에 관한 가혹한 진실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온다. 노쇠함이라는 최후의 몰락을 맞이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화려한 면모-한창 시기의 남성성과 여성성-를 잃어 가기 마련이다. 노화는 일찍 자각되기도 하지만, 고령에 따른 신체의 쇠약은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다. 결국 겉모습의 변화와 내부의 기능 장애를 통해 사람의 몸은 그를 ‘배신한다‘. 이러한 참패를 인식한 사람은 자신을 몸이 가한 고통의 피해자로 느끼고, 죽음을 향한 과정에서 몸이라는 연약한 껍데기가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 전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여기에도 ‘박해받고 있다‘는 의식이 존재하며, 이 의식은 얼굴 없는 운명(치명적인 힘인 나이)의 도구로서 각자에게 찾아오는 질병들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할 수 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신체적 노쇠 -어떻든 노화 자체의 증거인-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를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 겪게 되는데, 이런 이중적인 고통은 오직 자연의 무관심을 전할 뿐이기에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쇠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러한 노쇠를 훨씬 더 일찍, 때로는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다. 노쇠를 일찍 경험하는 이들은 굴욕감을 선사하는 고통스런 몸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느끼는 비통함을 경감시켜 겪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부모가 아픈 유아와 청소년을 자주 병원에 보내듯 불안감을 느끼는 성인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한 박해의 결과로 여겨지곤 하는 가장 ‘부당한‘ 운명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터다. 자기 인식을 확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여기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건 바로 타자에 대한 인식,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타자가 나를 박해할지도 모르는 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노화가 타자에 대한 문제인 경우, 우리는 타자를 그의 몸이나 몸이 만들어 낸 기호들 (열정에서부터 두려움에 이르는, 미소나 눈물이 표현하는 무한한 뉘앙스 차이)과 온전히 동일시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의 몸이 삶의 기호를 더 이상 제공하지 않는 순간, 그리고 삶의 모든 속성을 지녔던 누군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몸과 구별하고 몸을 심문하면서 저주하거나 아첨하도록 강제하는 환상은 계속해서 우리 눈앞에 어른거린다. 성찰적 의식의 술책, 즉 우리가 몸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실존한다는 환상은 타자가 죽음과 더불어 그 이전과 이후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면서 갑작스럽고도 최종적으로 사라진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깨질 수밖에 없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몸에서도 떠나면 더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고 무無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남는다고 믿고 싶었던 인간이 발명한 단어들 -특히 공포와 희망으로 가득 찬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 은 공허함만을 감출뿐이다. - P107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나이를 ‘만들건‘ faire 아니건 간에 우리는 우리의 나이를 ‘가진다‘avoir. 정확히 말하면 우리도 나이를 가지고 나이 역시 우리를 가진다. 나이를 가지는[나이가 드는] 것이 살아 있음을 뜻하듯 노화의 기호는 동시에 삶의 기호기도 하다. 일찍이 키케로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처럼, 자기 몸에 특히 신경 쓰는 사람들이 대는 구실의 배후에는 겉멋을 넘어 온전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많은 이에게 온전한 삶은 이른바 활동적인 삶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제약 탓에 불가능한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은 은퇴가 일종의 해방과 거듭남의 기회, 마침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간- 계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더는 나이를 고민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을 얻게 되는 기회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행운이라는 문제도 있다.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 비해 노년의 고통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거나 더 늦게 받는다. 그 결과 이들은 자연스럽게 ‘고양이의 지혜‘를 체득해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신의 몸을 활용하게 된다. 이들은 몸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영리하게 자신의 힘을 비축해 둔다. 따라서 그들은 노년의 재앙에 관한 모든 비관적인 이야기와 정반대되는 사례를 제공한다. 가끔 우리는 삶을 즐기는 법을 익히기 위해 끝까지 기다려 온 것만 같은 노인들이 들려주는 멋진 유머에 놀랄 때가 있다. 당연한 일을 가리킬 때 고전적인 예시로 자주 인용되는 격언이 이를 요약해 준다. "죽기 5분 전까지만 해도 라 팔리스 씨는 아직 살아 있었다"Cing minutes avant sa mort, Monsieur de La Palisse vivaitencore. 그렇다, 바로 그거다. - P112
자신의 과거와 관련해 우리는 모두 창조자이자 예술가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을 영원히 관찰하고 재구성하면서, 즉 뒤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 P116
나이가 든다는 건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만 이는 알고 있으면 좋을 특권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노년은 윗세대가 느꼈던 감정을 궁금해하면서 상상해 오기만 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합류해 세대 간의 거리를 좁힐 기회가 된다. 노년이 되면 결국 무언가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내가 어렸을 적에 노인들이 말해 준 것처럼 나이가 드는 게 크게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본 타자와 같다는 점에서 노년은 이국적 정취exotisme와 같다. 사실 노년이란 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를 때까지 쌓여 간 시간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더한 축적물이 아니다. 시간은 쓰여있던 글자 위에 다시 글자를 써 넣은 양피지와 같다. 거기 기록된 모든 일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지만, 때로는 가장 먼저 기록된 일이 가장 쉽게 표면에 드러나기도한다. 사실 알츠하이머병은 망각이라는 자연선택 과정에 가속이 붙은 현상일 따름인데, 말기까지 남는 가장 끈질긴 이미지-사실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아니더라도—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이미지다. 이런 관찰에는 잔인한 면이 있지만, 우리가 이를 반기든 개탄하든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 - P127
이 책의 첫 장 제목이기도 한 ‘고양이의 지혜‘는 바로 그런 고양이의 시간 감각이 우리 인간의 노년에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은유다. 오제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상상력의 원료가 되는 시간과 달리, 나이는 세월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만 보게 만들면서 우리에게 제약을 가한다. 그러니까 나이에 관한 인식은 추상적 관념인 시간을 시간 그 자체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선형적인 흐름 안에서만 이해하게 만들어 인간을 그 속 어딘가로 밀어 넣는다. 이런 인식하에 우리는 각각의 연령대에 맞추어 특정한 사회적 의무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면서 계속 나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세월의 흐름과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노화에 적응하면서 나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주는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양이의 삶이라는 은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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