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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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어떤 시간들, 특히 당시에 우리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직전까지 갔던 어떤 순간들을 완전히 지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을 지난 후에야 얻게 된 역량이 필요하다. 얀은 스무살 이후에 걸을 수 없고, 점점 근육이 소실되어서 마침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한계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 속에서 살며 그가 배운 것들 덕분에, 비로소 그는 그 한계를 통과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스무 살이라는 한계 안에서 살 때, 즉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 즈음에 그 힘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방법이 있다. 그 한계를 통과하며 얻은 우리의 역량으로 바로 지금 그 한계 가득한 ‘과거‘를 진정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얀은 그렇게 서른여섯 살의 시점에서 스무 살이었던 ‘과거‘를 통과한다. - P14

그러나 이 책은 ‘지원 기관‘으로 대표되는 임상적, 관료적 시선이 개개인의 구체적인 몸을 이해하고 돕기보다는, 일반화된 질병에 대한 ‘임상적 사례‘로 개인을 분류하고, 당사자보다 마치 그 개인을 더 많이 안다는 듯이 신체와 삶에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관해서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원 기관 앞에서의 얀은 "정기적으로고장 나는 기계에 불과할 뿐이다." - P16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 - P36

어린이의 삶을 산다는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여유롭게 세상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가시적 대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외부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이것은 어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바로 그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고 있는 동안 ‘특별히 하는 건 없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즉, 타인의눈, 성인 어른들의 눈앞에선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말이다.

타인의 시선은 훈육과 통제를 의미한다.

타인의 시선, 성인의 시선은 시간을 더욱 가시적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여기까지의 시간. 학교의 수업과 수업 간의 시간. 쉬는 시간은 대기 시간이다. 대기 시간은 수많은 분과 초로 이루어져 있다. 책상과 벽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시간은 흐르지만, 흐르는 시간을 인지할 수 없다. 세상을 여유롭게 대하는 꿈을 꾼다.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 P57

내게 책임감이라는 것은 너무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밝힐 필요가 없다. 푸코에 의하면 책임감은 담론적으로 그 주체를 지배한다고 했다. 즉, 책임감은 그 주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방식에 조건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책임감은 항상 선제적인 조건을 포함하기에 내가 굳이 따로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는 행위, 내가 해야 하는 행위는 모두 책임감에서 나온다.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자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기 싫은 곳에 가야만 할 때, 낯설고 외딴곳에서 강의를 해야할 때, 불편하고 거북한 곳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해야 할 때면 그 전날 밤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몸이 반항할지라도 결국엔 책임감이 이기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P71

о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Erving Goffman)은 낙인을 뜻하는 스티그마(Stigma), 즉 신뢰할 수 없는 가시적 표식에 관해 글을 썼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피부를 불에 지져 표식을 남기는 것을 뜻했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탈옥자이거나,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삶, 즉 ‘폴리스(Polis)‘에 발을 들여놓기에 적절치 않은 사람이라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표식을 지닌 이와는 말을 나누거나 함께 어떤 일을 하는 것을 기피했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벌거벗은 삶이며 보호받지 못하는 삶이다." - P84

1794년, 프랑스에서 혁명력으로 테르미도르 열 번째 날이었던 7월 28일, 급진적인 자코뱅파의 리더 조르주 오귀스트 쿠통(Georges Auguste Couthon)은 단두대로 끌려갔다. 그를 동아줄로 결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의 몸은 근육 수축과 마비로 인해 일반인과 달랐기 때문이다.

쿠통의 휠체어는 현재 파리의 카르나발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살롱 의자 위에 속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쿠션을 얹고, 팔걸이를 덧댄 것이었다. 앞쪽에커다란 바퀴 두 개와 뒤쪽에 작은 바퀴 하나가 달린 것이 특징으로, 앞바퀴 두 개는 안쪽의 볼트를 축으로 각각 돌아가며, 이 두 개의 원시적 회전 메커니즘은 팔걸이와 같은 높이에 자리한 손잡이에 의해 조종된다.

쿠통은 이 기계를 스스로 조종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엄청난 힘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움직일 경우 기계는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손잡이 두 개를 동시에 움직여야만 앞뒤로 기계를 조종할 수 있었다. 그만큼 많은 힘이 필요했다.

짐작건대 그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밧줄로 묶은 자동차를 이로 끌어당기는 것과 비슷한 힘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바퀴는 통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조종 장치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휠체어는 마찻길이나 진흙길, 즉바깥에서 사용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왜 휠체어를 만들었는지, 그것이 그에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과 연민이 아니었을까. 그는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지 확인하기 위해 엄청난 힘과 노력을 들여 몸을 돌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방 안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움직였으며, 여기저기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쿠통은 자코뱅파에 속했으며, 공안위원회의 일원으로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의 리더 대다수는 그와 같은 날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쿠통의 처형은 조금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그 당시 의미심장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를 인도적인 방법으로 처형하기 위해 15분이라는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그의 특수한 신체 상태를 고려했을 때 요구되는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01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 가능한 유일한 방식인 문자는 권위적이고 이념적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데올로기, 즉 이념의 기능은 사회적 현실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불변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 P103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긴장 속에서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오다 보니"이만하면 충분해"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좋다. "이 일은 할 필요가 없어." 그렇다. 나는 내게 닫혀 있는 문을 억지로 열어야 할 필요도 없고, 내 자리가 없는 곳에서 억지로 내 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이런 반응을 내게서 이끌어 냈다. 왜냐하면 나는 러시아에서 몇몇 특정 한계를 느끼고 인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며 기초 과목을 섭렵하고 주요 과목을 선택하기 직전, 불현듯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일을 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가는 비슷한 종류의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곳, 그 나라는 내게 투쟁만 제공할 뿐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라는 말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동시에, 다른 세상을 향한 동경을 포기한다는 의미와도 같기에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모든 상실의 경험이 고통을 수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실의 경험은 슬픔을 동반한다. 슬픔은 더는 가능하지 않은 일, 더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 때문에 생겨난다. 슬픔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과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생겨난다. 이때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일수도 있다.

자아는 주어지는 것일 뿐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어빙 고프먼)

나는 러시아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경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평생을 바쳐도 될 만큼의 값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였다.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또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때 이후 나를 원하는 곳, 나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서서히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P125

보르헤스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서로 다른 미래와 서로 다른 과거는 동일한 순간을 시작점으로 생성된다고 말했다. - P147

당신은 걷고 있어요. 항상 넘어지지만, 그것을 매번 깨닫진 못하죠.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당신은 앞으로 살짝 넘어지지만 얼른 몸을 추슬러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죠. 걷는다는 것은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일이랍니다. (로리 앤더슨) - P173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렇다면 그 생각은 과연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 그림자를 내게 던지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낙인이 찍힌 개인도 우리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한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어빙 고프먼)

정체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닮기 위해 배우는 것이며, 동시에 각 개인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배우는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은 지금의 내 모습과 과거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차이를 보이는지 그 간격을 재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얼마나 그 모습에 가까워졌는지 알아보고 싶다.

낙인 또는 스티그마에 관한 고프먼의 개념은 수치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수치심은 실존적 변이와 연결되어 있다. 낙인 개념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낙인의 대상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 사회 및 일반 구성원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동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수치심은 기본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잘못된 조건하에서 사는 삶인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수치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는 글을 쓰며 수치심을 고찰하고 표출하며, 글과 함께 수치심을 내려놓고자 한다.

낙인은 행위를 통해 위장하고 억제할 수는 있지만 행위를 통해 제거할 수는 없다. 낙인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는 그 사람이 주변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따라 그가 하는 모든 행위를 해석하는 틀이 형성된다. 이 틀 안에서는 가장 순수하고 무고한 행위조차도 수치심이 초래될 수 있다. 내가 옷을 신중하게 골라 입고, 휠체어를 깨끗하게닦고,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나마 내가 보내는 다른 신호, 다른 표시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해석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내가 과거에 시도해 본 기존의 입증된 방식과 규정에 순응하는 방식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울분을 쏟아 내며 활동가로 살수도 있었다. 스스로를 쇠사슬에 묶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성가시게 할 생각은 없다.

저항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언어, 또 다른 태도이다.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다르다. 나는 나만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 말들과 이 책으로 세상 속에 나를 위한 자리를 만든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나는 세상의 한 부분을 재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과 이 책으로. - P191

가끔은 그처럼 쉽게 해결될 때도 있다. 사람들은 기꺼이 도움을 주려 한다. 그들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지만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안아 들어 올리는 일을 문제없이 해낼 수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거리를 두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고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뻣뻣하게 긴장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도움을 줄 때 내가 얼마나 약한지 또는 얼마나 강한지, 내가 어느 방향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언제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지 자세히 알기 위해 내게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우연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집에 조그만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도와줄 때면 나도 매우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 숨을 들이쉬어 보자.

물론 상황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도 있다. 다 큰 어른들은 낯선 이들에게 좀처럼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그들이 자신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만큼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면 꺼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명백한 원인이 존재하는 한계를 넘게 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장의 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내게 달려 있었다. 항상 그랬다. 수동성 또한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는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행동의 제약이 많지만, 그 때문에 수동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잠시 살았던 것은 이것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곳에서 미소 짓는것을 배웠고, 내 목소리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내 삶을 직접 연출하는 것을 배웠다. 숨을 내쉬어 보자. - P200

우리는 표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하며, 어떠한 보장도 없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P206

슬픔은 파도일 뿐 아니라 반향을 일으키는 파문이며, 폭풍 뒤에 오는 고요함이기도 하다. 이처럼 슬픔은 역설적이다. 슬픔은 내가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스스로 벗어난 것들에 대한 생각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슬픔은 시간이 흐르는것을 깨닫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목소리, "결코 다시는 안돼"라고 말하는 목소리다.

오래된 진료 기록을 읽을 때, 어린아이였던 나를 관찰하는 임상적 문서들을 읽을 때, 나의 미래를 예견하는 비관적이고 암울한 기록들을 읽을 때면, 내 삶은 생존에 관한 역사이며 나는 불행에서 구제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나는 나를 닮은 사람들, 나를 닮았던 사람들, 그리고 불행에서 구제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슬픔은 직접 가 보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다. (조앤 디디온)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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