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 - 비비르 비엔, 탈성장, 커먼즈, 생태여성주의, 어머니지구의 권리, 탈세계화, 상호보완성
파블로 솔론 외 지음, 김신양 외 옮김 / 착한책가게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탈성장은 실제로 성장의 반대나 마이너스 성장이 아니며, 경제학 연구에 근거하고 경제학에서 기원했지만 사실 경제학적 개념은 아니다. 탈성장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생물물리학적 제약과 생태계의 재생 역량에 조응하여 자연자원과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는 것
*성장과 발전 이데올로기의 기반과 반대되는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전망을 수립하는 것
*자율적이고 검약하는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사상, 경험과 전략들의 여러 조류가 함께하는 다중적이고 다양한 사회운동을 추진하는 것
*성장을 넘어 나아가고 무절제를 거부하는 다양한 방식
*다시 한 번,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대신에 "어떻게 우리가 함께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 것인가?"라는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운동 - P74

탈성장이 경제적 개념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탈성장은 사회가 가진 표상과 가치를 포함, 사회 전체와 관련된 개념이다. 탈성장은 진보에 대한 서구적 개념과 그것이 이 행성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의문을 제기한다. 탈성장은 인간 활동의 재배치, 부의 재분배, 노동의 의미 복원, 공생적인 소프트 테크놀로지, 속도 늦추기와 풀뿌리 지역공동체로의 권력 반환에 기반을 둔다.
탈성장은 몇 가지 비판적 사상 조류들의 표현이다. 시장과 세계화에대한, 기술과 기술과학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와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호모이코노미쿠스와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한도를 넘어섬에 대한 비판이다.
탈성장은 삶의 속도 증가, 경제 및 금융의 세계화, 자연자원의 대규모개발, 에너지 문제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 광고와 소비주의, 사회와 환경부정의를 거부하는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된다. - P80

이러한 성찰을 특출난 개인과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깨인 엘리트들의 손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러한 엘리트주의적 비전이라면 아무리 생태적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관계와 경험들이 우리 성찰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대안의 원천은 다양하며 그것들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 중 하나이다. 이미 언급한 이들에 더하여, 1980년대의 주류적 경향을 거슬러서 발전과 생산주의의 경제적 이미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작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Castoriadis, 1998).
그는 자신의 비판을 자본주의 및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결시켰고, 그 결과로 ‘필요한 검소necessary frugality‘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검소한 사회를 민주사회의 조건으로 삼는다. 그에게 있어 민주사회는 공동으로 규정한 한계 내에서 공동으로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발견하는 사회다. 카스토리아디스는 사회관계, 사회운동과 정치를 분석의 한가운데에 놓는다. 그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검소는 기술과학의 지배와 신자유주의가 부여한 타율성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준다. -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대중 생활의 역사 속으로 떠난 이 작은 소풍은 협력에 관해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던진다. 하나는, 낯선 사람들과의 극적이고도 솔직한 대화가 타인들과 분명하고도 능동적인 협력을 이루게 하는 반면, 보들레르와 짐멜이 보여준 만남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 없이 그저 시각적으로만 이루어지는 만남에서는 협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잖은가? 구글웨이브의 프로그래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스크린을 사용한 것은 협력을 전화 통화보다 더 생생하고 더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사회적으로 실패했다. 본래 시선이 목소리보다 덜 사회적이기 때문일까? - P142

두 기술학교에서는 매일 일과를 끝내면 기도 시간을 가졌다. 기도를 통해 구성원 개개인이 그날 성취한 바를 공개적으로 알렸다. 세련된 외부인들에게야 하찮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구성원 개개인이 그날 뭔가를 달성했다고 거명되는 자리였다. 기도문의 공식은 "우리 자매 메리가 오늘 치즈 10파운드를 만든 일을 축하합시다"라는 식이었다. 작업장의 역사를 보면 이와 같은 종류의 의례가 오래전부터 능력의 차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왔음을 알 수 있다. 중세의 모든 길드의 모든 작업장에서는 하루 일과를 끝낼 때 이런 기도문과 비슷한 것을 읊었다. 매일 일과가 끝날 때 각 개인이 공동체에서 공동의 선을 위해 기여한 바를 의례를 통해 부각시킨 것이다.
부커 워싱턴은 사람들이 저마다 뭔가 제공할 것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더 낫거나 못하다고 말하는 고통"을, 즉 차별화하는 비교인 개인적 경쟁의 쓰라림을 극복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협력이 강화되었다. 기술학교 학생들이 서로에게, 혹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뭔가 특별한 것을 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의례는 기술학교가 수행하는 작업의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외부 인사들은 이런 결과를 진지하게 주목하고 받아들였다. 로버트 오웬이 세운 뉴하모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각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 실용적인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 P143

첫 번째는 다소 역설적이다. 의례가 강렬해지려면 반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반복을 똑같은 일정, 감각이 둔해질 때까지 어떤 일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서론에서 논의한 리허설 과정이 보여주듯이, 반복은 다른 경로를 택할 수도 있다. 어떤 악구를 여러번 거듭 연주하면 그 구체적인 점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며, 소릿값이나 가사와 신체 동작이 깊이 새겨진다. 의례에서도 이와 동일한 각인 과정이 일어난다. 성찬식 등의 종교적 의례가 의도하는 것은 이런 성과다. 천 번쯤 반복 실행하면 그것이 우리 삶에 각인될 것이다. 그 위력은 한번만 했을 때보다 천 배 더 커질 것이다. 세속적 의례에서도 마찬가지다. 시험이 끝난 뒤에 악수를 하는 의례는 그것이 계속 다시 시행되면 더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경험의 패턴이 확립되는 것이다. - P155

두 번째, 의례는 대상을, 즉 신체 동작이나 지루한 단어를 상징으로 변형시킨다. 악수를 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피부 촉감을 느끼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 혹은 유월절 만찬의 음식은 영양가 있는 음식 그 이상의 무엇이다. - P156

의례의 세 번째 구성 요소는 표현, 특히 연극적인 표현과 관련된다. 결혼식에서 교회의 중앙 통로를 걸어가는 신랑 신부의 행진은 길거리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설사 당신의 걸음걸이가 물리적으로는 비슷하다고 해도, 결혼식에서 당신은 사람들이 보는 대상이 되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구글웨이브에는 교환이 감정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정보를 공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컴퓨터의 연극적 내용이 빈약했던 것이다. - P157

직업 음악가나 배우들의 공연과 달리 일상의 의례는 접근 가능해야 하고 배우기 쉬워야 한다. 그래야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세계에서는 대개 자잘한 이벤트, 즉 영혼을 걸고 참여할 필요까지는 결코 없는 티타임 같은 사소한 일들이 그런 의례에 속한다. 그렇기는 해도 티타임의 잡담이라는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냥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기보다는 그들의 관심을 붙잡고 싶어 한다. 그러려면 잡담을 잘하는 법이나, 그 자체로는 극적이지 않은 일을 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 나름대로 공연자가되는 것이다.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 삶과 죽음에 대한 스피노자의 지혜
스티븐 내들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밀히 말해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신 또는 자연뿐이다. 오직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은 신 또는 자연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야기하는 것은 모두 자연의 본질적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뿐 아니라 신 또는 자연 외에 신 또는 자연에게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외부의 유한한 다른 사물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받아 변화하는 자연 속의 유한한 개체들은 자유로울 수도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는 유한한 개체들의 자기 결정력이 클 수도 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57

다시 말해 자유는 전적으류 자신의 인식에 따라 행동하는지 아니면 외부 사물에 의해 생긴 감정이나 그런 우연적 경험으로 형성된 견해에 따라 행동하는지에 관한 문제다. 자유는 다양한 정도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부적합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작용을 받는다. 그 부적합한 관념이 그의 선택을 좌우한다면, 그의 행동은 오직 자신의 본성에서만 비롯되지 않고 자신의 본성과 외부 원인들의 본성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강렬한 신체적 쾌감을 주는 무언가를 좇는 일은 자신의 본성만큼 그 대상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행동이 외부 사물로부터 자극받아 변화된 방식이 아닌 자신의 적합한 관념에 의해 결정된다면,그는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의 행동은 그의 본성 (자신의 적합한 관념에서 나오므로 틀림없이 존재의 지속을 위한 본성의 노력에 부합하고 유용하다. - P58

그러므로 사람은 적합한 관념이 정념, 즉 부적합한 관념보다 정서적으로 더 강력할 때 자유롭다. 그래야만 적합한 관념이 지배적 욕망과 행동의 결정 요인을 형성하고, 그제야 비로소 그의 본성에서 행동이 나오게 된다.

"본성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본성에서 비롯되는 욕망은 그것이 적합한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되는 한 정신과 관련된 것들이다. 다른 욕망들은 정신이 사물을 부적합하게 파악하는 한에서만 정신과 관계가 있으며, 그것들의 힘과 성장은 반드시 인간의 힘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사물의 힘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매우 불완전하게만 자유롭다. 심지어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로울 때가 거의 없다. 대개 정념에 휘둘리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분을 좋게 할 만한 것들을 좇고 고통이나 불편함의 원인처럼 보이는 것들을 회피하므로 우리의 욕망은 너무나 자주 부적합한 관념, 즉 감각과 표상에서 비롯된 신념에 좌우된다. 인식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여 적합한 관념을 상당히 획득한 사람들조차 언제나 적합한 관념에만 근거해 행동하지는 않는다. - P60

자유인이 향유하는 "정서를 지배하는 정신의 힘"은 정념을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없애거나 의지라고 부르는 상상의 능력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념으로 작용하는 것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능력에 있다. 자유인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 특히 연장된 사물인 자신의 신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지녔기 때문에 부적합한 관념들을 저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적합한 관념들의 원인을 이해하여 명석판명한 인식을 획득함으로써 오히려 능동적인 정서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유인은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인은 언제나 자신에게 진정으로 유용하다고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그는 이 세상의 선과 악을 알고 그것을 아주 잘 헤쳐 나간다. 스피노자가 처음 자유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말했듯이 이성에 이끌려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바람에 순응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을 행한다."
그러니 자유인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그의 행동이 일관되게 적합한 관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자유인에게도 정념이나 부적합한 관념이 있지만, 그는 절대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자유인은 언제나 적합한 관념의 정서적 힘이 부적합한 관념의 그것보다 강하므로 그의 욕망은 항상 인식을 따른다. 이처럼 예외 없이 일관되게 이성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점이 바로 귀감이 되는 인간의 전형과, 대개는 이성의 지시를 따르지만 반드시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평범한 사람 사이의 차이다.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완전히 능동적"(이 말이 수동성이 아예 없다는 의미라면)이라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한다‘의 진짜 의미는 그저 인간이 "외부 사물들의 일반적인 성질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찰된 자기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도록 결정된다는 의미다."
궁극적으로 자유인의 자유는 신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는 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신과 같은 자유다. 이것은 고유의 유한한 방식으로 신 또는 자연이 누리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기 결정 능력과 유사하거나 그에 근접한 실제 인간을 위한 자기 결정 능력이다. - P78

"탁월한 모든 것은 어려운 만큼 드물다." 다른 무엇보다 자유인이 되는 일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품을 수 있는 최고의 바람은 더욱더 자유로워지는 것,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이성의 지배 아래서 존재를 지속하는 것, 그래서 자유인이라는 이상적이지만 완벽하게 인간적인 상태에 최대한 근접하는 것이다. -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여러 민족의 이민, 그중에서도 주로 동유럽 출신의 매우 가난한 유대인들이 독일 한복판으로 몰려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짐멜은 낯선 사람들의 개입이 원래 주민들의 이 재미있고 사교적인 즐거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했다. 그는 외국인들 속에서 산다는 것이 사회성을 억압한다면, 그들의 존재가 사회적 인식을 심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이들의 도래는 원래 주민들이 자신들이 당연시해오던 가치들에 대해 재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P74

짐멜에게 사회성sociality이 갖는 미덕은 일상적인 인상에 그치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사회성과 페어빈둥 Verbindung을 대비시켜 이 점을 설명한다. 페어빈둥은 한데 묶고, 다시 온전하게 만들고 치유한다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사회성은 상호간의 경험이 남긴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인식될 때 비극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미국의 불운한 전쟁이 끝난 지 20년 뒤 하노이로 돌아온 미국인들에게 베트남인 택시 운전사가 한 말은 짐멜이 생각했던 것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우린 당신들을 잊지 않았소." 그는 단지 그렇게만 말함으로써 치유가 되는 말을 해주기보다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관계를 인정했을 뿐이었다. 나와 동행한 지인은 현명하게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회성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타인에게 능동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은 연대와 대비된다. - P75

개혁가들은 교육의 공백이나 가족생활의 관리, 주택 문제, 도시로 새로 진입하는 계층의 고립 같은 사회적 질문에 관심을 보였다. 사회적 좌파 진영의 공동체와 노동 조직가들은 이런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바닥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연합주의 associationism라고 불리는 19세기의 유서 깊은 운동을 자신들의 운동의 뿌리로 삼았다. 현대의 풀뿌리 조직은 바로 그 연합주의에서 유래한다. 이 운동은 타인들과의 협력이라는 순수한 행동을 전략적 도구가 아니라 목적 자체로 강조했다. - P81

1900년까지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는 대략 이런 식으로 줄곧 이어진 경계선을 따라 나뉘었다. 이론적으로는 두 진영 모두 공동의 불의와 대적하고 있었으므로 함께 섞여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향식과 상향식 노선 사이의 차이는 기질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분리가 현대에 우리에게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렇다. 그런 기질적 차이는 좌파 내부의 투쟁보다 더 넓은 나침반에 따라 움직인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 개혁가들 역시 외관상 이런 분리선을 경험했다. 요점 정리 형식으로 발언하는 정책 두뇌들로 채워진 싱크탱크들은 모두 옛날의 정치적 좌파의 정신을 물려받은 상속자이다. 때로는 상충하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는 상이한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풀뿌리 조직은 옛날의 사회적 좌파 정신의 상속자이다. 한쪽 길은 공유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변증법의 목표이다. 다른 길은 대화적 과정을 강조하는데, 여기서는 상호 교환이 어떤 결과물도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있다. 한쪽 길을 따라가면 협력은 도구이고 수단이지만, 다른 쪽 길에서는 그것이 목표 그 자체이다. - P85

앨린스키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노조 조직가와 공동체 활동가가 각기 탄압받는 자들과 어울리는 방식의 차이였다. 그는 이 차이를 퉁명스럽게 설명한다. "알고 보니 노조 조직가들은 공동체 조직가로서의 실력은 없었다." 남 앞에 단합된 모습을 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밀실제휴의 습관 덕분에 도시의 이웃들 사이에서는 강력한 연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합하여 투쟁하기‘라는 공식은 재고되어야 했다. 명료성과 정확성으로는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94

애덤스는 차이와 참여의 문제에 놀랄 만큼 단순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즉 부모 노릇, 학교생활, 장보기 등 일상의 경험에 집중한 것이다. 그녀는 사회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의 공식이 아니라 일상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솔 앨린스키의 선구자였다. 연합 행동은 정책 공약 같은 결과물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으로 시험되어야 한다. 일상의 경험을 이룬다라는 문제에서 직접 부딪히게 되는 협력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애덤스가 여기서 내놓은 대답 역시 앨린스키가 한 대답의 어머니 격이다. 애덤스가 세운 헐 하우스는 엄격한 교환이 아니라 느슨한 교환을 강조했으며, 비공식성을 장점으로 삼았다. - P97

공동체 조직가는 외국인이건 자본주의 게임에서 패한 사람들이건, 마비된 것 같은 기분에 빠진 빈민들을 공동체 활동에 참여시켜야 했다. 조작가는 수동적인 상태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자본주의의 악덕을 극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에 집중해야 했다. 큰 그림속에서만 상황을 보다 보면 열에 아홉은 참여해도 소용없다는 느낌이 더 깊이 새겨지게 된다.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해 조직가가 헐 하우스의 영어 수업에서처럼 암묵적인 교전 규칙, 즉 교환을 위한 관례와 의례를 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시카고의 사회활동가이며 제인 애덤스의 문하생인 샬럿 타월Charlotte Towle은 직원들에게 격식 없음의 논리를 지침으로 제시했다. "돕기는 하되 지시하지 말라"는 지침은 제인 애덤스에서 솔 앨린스키에 이르는 공동체 조직의 전통을 요약해주는 말이다. 게다가 타월의 지침을 실행하려면 조직 자신이 격식 없음을 즐겨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대감은 사교성sociability의 경험으로 바뀌는데, 이것이야말로 공동체 조직이 전통적으로 희망해온 것이다. - P98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격식 없음은 항상 무질서로 전락할 위험이 따른다. 또 이렇게 말하면 복지관의 복도와 방안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복지관 생활이 바깥 세상에서 누릴 삶의 지침이 되지 않고 그저 이따금씩 맛보는 좋은 경험에 그칠 위험도 있다. 공동체적 협력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런 우려가 적중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좋은 경험은 되지만 삶의 방식은 아니다. 협력하니까 기분은 좋았지, 그래서 어쩌라고? 오늘날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전문가인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솔 앨린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공동체에서 연대의 결과는 어딘가에 연결되어야 한다. 행동은 구조를 필요로 하며, 지속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 P100

사회적으로 오웬은 움직이는 연대의식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구상하여, 작업장의 뿌리를 한 공동체에만 고정시키지 않으려 했다. 생산의 네트워크란 곧 노동이 이리저리 움직여 다닐 수 있다는 뜻이며, 노동의 내용이 실험에 의해 진화하고 변형되는 것처럼 작업장 내의 협력도 유연해져야 하며 이동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협력의 기술은 원래 노동자의 자아 속에 쌓여 여러 장소로 옮겨 다닐 수 있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순회 연주자 스타일의 협력이다. 순회 연주자들은 구성원과 장소가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다. - P1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 삶과 죽음에 대한 스피노자의 지혜
스티븐 내들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연에 있는 모든 개물을 형성하는 능력의 유한한 일부를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라 부르는데, 이는 추구, 경향, 노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활동 능력" 또는 개체의 "존재하려는 힘"이라고도 부른다. 각각의 유한한 사물에서 이 능력은 스스로를 그 사물로서 유지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 P34

인간에게 코나투스란 개인이 다하는 모든 노력의 근원에 자리하는 실천력을 의미한다. 성취하거나 획득하거나 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인간이 욕망하고 행하는 것은 모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자신의 능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노력에 의해 자기 본위로 추동된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에 대한 혐오이자, 자신이 아는 한 자신의 행복을 증진하고 능력을 보존 및 증대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에서 이보다 인간의 행동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없다. - P37

수동적 정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다른 정념들은 모두 이 세 가지 정서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동적 정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기쁨, 슬픔, 욕망이다. 기쁨(laetitia)은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념", 즉 개체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의해 야기된 더 큰 활동 능력으로의 이행이다. 이것은 자신의 상태가 다른 사물에 의해 개선되었다는 느낌이다. 정신-신체의 복합체에서 기쁨에 상응하는 정서는 쾌감(titillatio)이다. 한편 슬픔(tristitia)은 "(정신이) 더 낮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념"으로, 자신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느낌이다. 이에 상응하는 정신-신체의 정서는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바로 고통(dolores)이다. - P41

이 ‘완전한 인간‘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도달하려고 애쓰는 인간 본성의 전형, 즉 최선의 삶의 방식의 모범으로서 <에티카>에서도 계속 살아 숨 쉰다. 하지만 그 이름은 다르다. 이제 그의 이름은 "자유인"이다.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