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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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는 슬픔과 기쁨, 그리고 용서로 가득한 길이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 길이 필요하다. 우리 이전의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 "슬픔"과 "용서", 이 두 단어는 이제 내게 길을 따라 걷는 삶과 동의어가 되었다. 성지순례는 유대감이다. 청년들은 노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그 길을 처음 걸었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시 그 길은 필요하다. - P55

나 자신이 모든 것의 바깥에 있음을 발견했어요. 나와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는 걷고 또 걸었어요. 나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었어요. 마치 하루에 몇 시간씩 명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죠. 처음 4주 동안은 발바닥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 매우 쓰리고 아팠지만, 이내 상태가 좋아졌어요. 나는 생각했지요. 걷고 또 걸어라. 이게 바로 인생이라고.
길은 모든 것을 의미했어요. 내가 온종일 바라보는 게 바로 그것이었죠. 어느 날, 그것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또 어느 날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전혀 없을 때도 있었어요. 또다른 날에는 온종일 돌길만 걷기도 했죠. 그러면 발바닥은 엉망이 되고 말아요. 그런 길은 정말 싫었어요. 나는 속으로 ‘이런 빌어먹을 길! 더이상 걸을 수 없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러고 나면 또 며칠 동안은 넓고 평평하고 돌이 전혀 없는 길이 이어졌어요. 그러면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렇게 말하곤 해요. "오늘은 길이 참 다정하네요." - P64

개울과 길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둘 다 동일한 작동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개울은 힘들이지 않고 지형을 헤치며 나아간다. 그리고 똑바로 일직선을 그리며 흐르지 않는다. 또한 가장 짧은 거리나 빠른 길을 골라 가지도 않는다. 개울은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는 길을 따라간다. 물은 평형상태를 추구한다.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흐른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울은 흐름을 멈출 것이다. 그래서 개울은 호수를 만나면 사라진다. 강 또한 바다를 만나면 흐름을 멈춘다. 물은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속도를 잃고 더이상 흐르지 않는다. 평형상태에 도달한 물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이것은 길도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제껏 함께 걸었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마다 자기 방향으로 흩어져가기 때문이다. - P105

세계적인 종교들은 모두 길을 은유로 사용한다. 힌두교에는 인간 해방에 이르는 네 개의 길이 있다. 불교에는 평온과 깨우침에 이르는 팔정도正道가 있다. 유대교에는 율법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할라카halacha라는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본디 "걸음걸이 또는 걷는 방식"을 뜻한다. 이슬람교의 다섯 개 기둥 가운데 다섯번째 마지막 의무인 핫즈hajj는 성지순례를 말한다. 성경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에 대한 은유적 암시들은 의미하는 바가 명백하고 이해하기쉽다. 어느 면에서 인생은 모두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날마다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자식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결국 선택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길을 은유한 것들은 우리에게 다수가 생각하는 것들과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성경(마태오의 복음서 7장 14절)에 따르면, "(・・・)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 P125

걷기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한 발이 땅바닥을 밟고 있는 상태다. 반면에 달리기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사이에 두 발이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걷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하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걷는 것 때문에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인간은 태어나서 1년쯤 지난 뒤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면 적어도 죽기 직전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걷기를 시도한다. 달리 말하자면,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평생토록 날마다 그 수익의 대가를 톡톡히 받을 장기 투자를 하는 것이다. 걷는 것은 특별히 운동을 하기로 결심할 것을 적극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존에 생활하고 있는 삶의 연장이자 날마다 이미 하고 있는 활동에 불과한 그런 유일한 운동 형태이다. - P176

내가 여행을 하는 것은 어딘가를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가는 것이다. 여행을 위한 여행이다. 중요한 것은 이동하는 것, 우리 삶의 다양한 욕구와 문제들을 더욱 가까이 느끼는 것, 이 문명의 안락함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발밑에 밟히는 화강암을 느끼며 지구가 날카롭게 쪼개진 단단한 돌들로 뒤덮여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 P243

길은 그것의 본질적 특성이나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측면에서 볼 때 옛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길은 어떤 한 사람이 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은 먼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닌 행동이 모두 모여 만들어진다. 그렇게 길은 이야기와 닮았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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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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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스스로 생겨났다. 길은 숨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산책로나 전시 공간으로 설계된 경치 좋은 통로가 아니었다. 길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길이 만들어질 때, 예비보고서나 타당성조사도 없었고 길의 등급을 정하거나 포장하기 위한 사전심사도 없었다.
길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길은 자연적으로 생겨나고 분해되며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그것이 통과하는 바로 그 자연계의일부다. 길은 일시적이다. 그것의 용도와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다. 길은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니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닌다. 따라서 길이 그대로 남아 있으려면 누군가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전설과 신화, 민요, 동화와 비슷하다. 그것들은 모두 집단창작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에 어느 특정 작가를 원작자로 지명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몸과 영혼이 일체다.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이다. 길은 단순한 통로 이상을 의미한다.
길은 일직선의 반대다. 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에, 일직선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이론적 구성체다. 일직선은 구체적인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물의 표면조차 일직선으로 평평하지 않다. 태양에서 발사되는 광선도 마찬가지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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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 워크숍 오늘의 젊은 작가 36
박지영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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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일어난 일의 반대는 무엇일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일어난 일의 반대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아버지는 말했다.
"일어난 일의 반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14년쯤 지난 후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티베리아스의 작은 생선 요리 식당에서 야르데나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나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야르데나는 대답 대신 빛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즐기는 여자아이들만이, 어떤 가능성이 있고 어떤 불운이 있는지 잘 아는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야르데나가 대답했다.
"일어난 일의 반대는 거짓말과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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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 워크숍 오늘의 젊은 작가 36
박지영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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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은 아직은 될 수 없지만 어떤 것은 아직은 될 수 있다. - P229

선배도 참 지겨웠겠구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잃어 가는 하루하루가, 저마다 피해자의 얼굴로 가해자의 얼굴을 감춘 채 무리의 습성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못됨을 처먹어 가는 일상이. 무엇보다도 타인의 불행 앞에서 다행을 챙기는 다행하지 않은 자신의 마음과 자꾸 마주해야 하는 공포가. - P246

고독사 워크숍을 시작하며 이수연이 깨달은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는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고독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고독의 코어를 단련해야 한다는 거였다. 고독이란 단순히 마음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균형과 근력의 문제였다. 친절과 배려가 탄수화물에서 나오듯 고독할 수 있는 힘 역시 강인한 체력과 단련된 근육에서 나왔다. 타인의 고독을 지켜 주는 힘 또한, 일 분이라도 혼자 플랭크 자세를 해 본 사람은 알게 된다. 혼자 버티며 산다는 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 수연 역시 반복된 훈련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의 고독은 대체로 단련될 수 있다는 걸.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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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 워크숍 오늘의 젊은 작가 36
박지영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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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가학은 친절과 배려의 옷을 입고 온다고 알리스는 생각했다. - P127

알리스가 부러운 것은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원하는 것을 소장할 경제력 이전에 그들의 취향이었다. 모든 게 그렇듯 취향의 세계 역시 일부에게만 너그러워서 이미 가진 자들만이 취향을 탐색하고 키워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다듬어진 취향은 곧 또 다른 능력이 되었다. 알리스의 경우에는 취향 없음을 숨기기 위해 타인의 취향을 훔쳐보며 다수의 취향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것 정도가 유일한 취향이었다. - P129

가끔 높이 뛸 때의 감각, 좋아하는 주희 선배에게 아주 가깝게 다가간 듯한 친밀감, 세상이 이해 가능한 반경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충만감이 그리울 때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열망은 사라졌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넨다는 건 허공의 높은 곳에 위태로운 선을 긋고 그만큼 높이, 아주 높이 뛰고 싶다는 마음과 유사했다. 그것은 추락과 부상에 대한 불안감을 이겨 낼 때만 가능한 도약이기도 했다. 한번 거부된 마음을 돌려받은 후 알리스는 겁쟁이가 되었다. 그걸 부정하거나 뛰어넘고 싶은 마음은 다시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좋았다. 그 후에는 누구도 그렇게 높이 뛰어야 할 만큼 좋아지지 않았다. 장대 없이도 넘을 수 있는 높이의 사랑만 했고 떨어져 다치더라도 치명적인 부상으로 남지 않는 연애만 했다. 어른이 되면서 중요한 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것 보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거였다. 평정심에서 나오는 상냥한 태도, 사려 깊은 경멸과 친절로 가장한 경계심. 그것이 알리스를 직업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사람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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