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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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간의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정부와 기업은 청년 실업과 고용 불안을 초래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글로벌 인재 양성‘이라는 긍정적 화두로, 시대적 책무로 전환했다. 이 위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대학생-청년들에게 대기업에서 비용일체를 부담하는 글로벌 캠프는 자신의 커리어 경쟁력을 높이는 대외활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범람하는 의례는 참가자들이 ’글로벌 인재‘라는 요구에 기꺼이 퍼포먼스로 화답하는 장인 동시에 오랜 기간 쌓아온 마음의 결핍을 일시적으로 메우는 기회였다. 해외 자원봉사가 타국의 경제적 빈곤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 실존의 빈곤을 보듬는 ‘치유‘ 기제가 된 것이다. 자족적·단편적 분절적인 에피소드식 활동의 연쇄 속에서, 사회적 관계의 부재에 따른 불안은 일시적으로만 봉합되었고, 만족의 유예는 학생들로 하여금 또 다른 에피소드, 혹은 더 나은 에피소드를 찾아 동분서주하게 했다.
프로그램의 결과를 영상물로 남기는 것은 당시 모든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에서 유행이었는데, 열흘간의 일정을 5분여의 화면에 담아내는 과정은 일시적인 봉합의 측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에피소드가 탄생하지 못했다는 조급함은 영상물에 드러나지 않는다.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가장 짧고 선명하게 압축된 에피소드들, 가령 친구들과의 우정, 현지 아이들의 함박웃음, 젊음의 열정과 패기가 어우러진 일련의 스냅사진들이다. 한 참가자의 예측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것만 남아" 간명한 에피소드들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뒤이은 소셜미디어에서의 만남은 활동을 끝낸 참가자들이 추억을 되새기면서 잠재된 불안을 관리하는 일시적 환경을 제공했다. 언제 와해될지 모를 이 공동체가 "두려움을 느끼는 개인들이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그들의 두려움을 집단적으로 의지할 개별적 말뚝" (바우만 2009: 63)이 된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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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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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으로서의 집home as process’이 다시 내 시야에 잡힌 것은 살면서 거래자는커녕 거주자 자격도 획득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집에 대해 논하는 동영상을 봤을 때다.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이 서울역 맞은편에 자리 잡은 양동,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과 미래의 집에 관한 대화를 나눈 자리였다. 공공개발이 이뤄진다면 임대주택에 어떤 시설이 있는 게 좋겠냐는 질문을 받자, 주민들은 꽤 상세한 답변을 내놓았다. 집 내부에는 "조리할 수 있는 싱크대" "베란다"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문‘ (각자 쓸 수 있는 "수세식 변기" "세탁기를 들여다 놓을 공간"이 있기를 바랐다. 단지에는 운동 시설, 의료 시설, 휴식 공간, "모여서 회의도 할 수 있"고 "수급 서류 상담도 받을 수 있는" 자치 공간이 있기를 원했다. 30년 이상 노후화된 건물에 월평균 24만 원의 임대료를 내고 두 평도 안 되는 방에서 온갖 냄새와 소음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연명해온 사람들, 동네 골목, 각종 복지시설, 반빈곤운동 단체 사무실, 서울역, 남산 등으로 제집을 확장해야 간신히 숨통이 트였던 사람들이 생각해낸 기대목록이었다. 또 하나, 쪽방주민들도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청년들처럼 1인 가구의 집과 ‘원룸‘을 동일시하는 통념에 반대했다. 방이 최소한 두 개는 돼야 한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잠자는 방말고 "친구들 오면 같이 놀기도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이 필요했다. - P149

인류학자들은 집home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사람들은 집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물질성, 감정, 사회적 관계, 거주 실천의 교차 속에서" 부단히 만들고, 이 실천 속에서 소속, 안전, 가치의 감각을 조율한다.(Samananiand Lenhard 2019:7) 이는 홈리스, 이주자, 난민에게 분명 더 위태롭고 고된 노동이다. 이 장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과정으로서의 집‘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감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핀다. 집이 수많은 행위자의 실천이 매개된 결과라면, 과정으로서의 집을 기술하는 작업이란 이들의 실천이 더 너른공간과 더 긴 시간대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Brun and Fábos 2015) - P151

분노를 느끼지 않고, 체념하고, 반항하지 않는 태도는 박탈당한 사람들이 "순전히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 순응하는 경향이기도 하다. (센 2013 : 118)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이 빈곤을 단순히 낮은 수준의 소득이 아닌 "기본적 역량capability" (2013: 151)의 박탈로 정의한 이유다. 하지만 이 장에서 쑨위펀과의 동행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 것은, 빈자의 삶에서 급진적 변화에 대한 열망과 분노가 체념, 무관심, 순응에 선행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물어볼 엄두가 안 나고, 아무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은 태생적인 게 아니라, 묻고 따지고 소리지를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험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누적된 결과다.
쑨위펀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한때 나는 그의 ‘집‘이 계속 헷갈렸다. 태어난 고향인가, 시댁이 있는 빈현인가, 아니면 친정 식구가 모인 하얼빈인가? 지척에 농사지을 땅이 있는 가옥인가, 편리하고 현대적인 아파트인가? 쑨위펀은 토지를 찾으러 빈현에 갈 때도 "집에 돌아가고 싶다"더니, 토지를 포기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떠날 때도 "집에 돌아가자" 했다. 집은 결국 특정 장소로 가리킬 만한 ‘어디‘도, 건조물로 지칭할 만한 ‘무엇‘도 아니라, 세계 속 자기 ‘자리‘를 만드는 부단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언제 헐릴지, 쫓겨날지 모르는 상태를 벗어나 맘 편히 누울 자리, 섭씨 영하20도에 볼일을 보러 공중변소를 찾지 않아도 되는 편한 자리, 방이 단 한 칸이라 이 일 저 일 떠돌며 숙식을 해결하는 자식한테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조금 넓은 자리, 자식이 미래의 배우자 앞에서 좀더 당당해질 수 있는 신원 증명의 자리, 몸이 아프고 돈이 없어도 괜찮은 자리, 서로 돌보고 의지할 존재를 곁에 둔 자리………
하지만 쑨위펀이 자리를 만드는 과정은 (심지어 자기 자신한테조차) 자격을 의심받고, 자격 없음의 감각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토지의 권리, 집을 구매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면서도 일상의 마디마다 권리의 수정, 번복, 예외를 정당화하는 국가와 자본의 통치술만 문제가 아니다. 촌장, 진 정부와 주민위원회 간부, 부동산상담사의 노골적인 무시, 시댁 사람들의 은근한 경계, 가장 친밀한 가족들의 무관심과 체화된 수동성까지, ‘자격 없음‘의 판정은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심지어 가장 친밀한 사람들에 의해 계속됐다. 동행하면서 주저하기를 반복했던 나도, 거듭 노력하고 거듭 ’부적절한‘ 존재임을 확인받으며 점점 움츠러든 쑨위펀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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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전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로지르며 수행한 공장노동, 자원노동, 서비스노동의 궤적은, 도시가 단지 건물, 도로, 버스, 공원 등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환경이기만 한 게 아니라 "문화적 실천, 지적 회로, 정동적 네트워크, 사회적 제도들의 살아 있는 역동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자본과 전통적 노동조합의 명령으로부터 자율적인 노동계급을 지향했던 이탈리아 노동자주의 운동 이론가 마리오 트론티가 ‘사회적 공장social factory‘ 개념을 제안했던 맥락과도 닿아 있다. 잉여의 추출은 개별 공장을 넘어 다양한 작업장 안팎의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며, "인간의 노동력은 자본가에 의해 착취되는 것을 넘어 자본 내부에 통합"된다. 가사 영역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전방위적침투를 볼 수 있는 핵심 지대라는 페미니즘 논의를 상기한다면, 여성의 무임 재생산노동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부엌, 침실, 그리고 집" 역시 ‘사회적 공장‘의 예외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쭤메이를 폭스콘 노동자의 전형으로 묶어내는 대신 그가 폭스콘 공장 너머 사회적 공장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물적·정동적 가치에 주목했다. 강조할 것은, 생산이 전 사회에서 발생할 때, 착취뿐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 틈입할 여지도 커진다는 점이다. ‘공통적인 것‘, 즉 "언어와 정동, 네트워크를 발산하고 공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을 가질 기회는가난한 사람들한테 전적으로 닫혀 있지 않다. 쭤메이가 자원봉사를 수행하고 보험을 판매하면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넓히고, 스스로 설 자리를 새롭게 확보하려고 노력했듯 말이다. 하지만 이 장의 문화기술지가 보여주듯, ‘사회적 공장‘은 노동자들을 단순히 기계, 노예, 짐승으로 억압하는 대신 이들의 열망을 한껏 부추기는 방식으로 가치를 수탈한다. 쭤메이는 자원봉사는 물론 보험 판매에서 강조하는 자기계발조차 조립 공정에서 같은 동작만 반복하는 공장노동과 상반된 가치로, 자존감과 사회성을 발현하는 기제로 보면서 도시의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생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랬음에도 법적으로든 사회적 인정으로든 도시에서 농민공청년들이 통상 쓰는 표현대로) ‘과객‘으로 남았을 뿐이다.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량을 계발할 기회는 계속 축소되었고, 자원을 기대할 수 있는 대상은 결혼과 가족으로 압축되었다. 이 또한 혼례 당일 몸을 씻으러 남의 집을 찾아가야 할 만큼 취약했지만.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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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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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활보호법이 기초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주민들은(과거처럼) ‘노력‘을 해서 결과를 바꿔낼 여지가 거의 사라졌다는 데 당혹해했다. 기존의 생활보호법과 비교해서, 기초법은 일선 공무원의 관료-기계로서의 성격을 한층 강화했다. 레비 R.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관료기계는 일정한 양식에만 열려 있다. 양식은 그 자체로 입력물(질병, 장애, 집, 가족, 일, 빚 등)에 조작을 가하여 "어떤 조직적인 소통 매체로 변환하는 기계다. 사전에 규정된 특정 기준에 따라 양식에 적시된 것만 전달 가능하므로 "우리의 사람됨, 우리의 처지, 우리의 삶은 양식에 의해 사전에 규정된 범주에 따라 분쇄되고 걸러진다. (브라이언트 202093) 신청자의 구구절절한 말과 망가진 몸은 각종 서류 ‘양식‘을 통해 인증을 받고, ‘기계‘를 통과해야 심사 자격을 얻는다. - P45

"사회적 빈곤의 이미지는, 빈곤의 특정한 단계라기보다는,
그것이 가진 유동성과 무한성의 느낌들, 즉 이 모든 위협적 특징을 야기하는 도시 군중의 거대하고 모호한 인상을 강조한다." (프로카치2014: 237) 프로카치는 이 담론의 공격 대상이 (산업사회에서 자연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사실로 인정된) 불평등의 제거가 아닌 "차이의 제거"임을 역설한다. ‘차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강조했던 바는, 사회적 빈곤이 일련의 품행-즉사회화 기획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를 겨냥하면서 극빈을 "신체적·도덕적 습성들의 집합"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2014 240) 술에 절어 방탕하게 사는 사람,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사람, 구호금을 탕진하는 사람 등 자본주의 체제 노동자 기준에 미달하거나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이 품행이 의심스러운 빈민으로 내몰렸다. 경제적 의존을 도덕적·심리적 의존과 자의적으로 연결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 그 이상의잘못된 무언가가 있다"라는 암묵지를 만든 것이다.(Dean 1999: 62)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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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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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계에선 누구도 빈곤의 천태만상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는 위치에 있을 수 없다. …… 정부는 선별적 포섭, 보호, 배제를 제도화하면서 공공부조 수급자에서 난민·이주자에 이르기까지 빈자를 식별하고 등급화한다. 지구상의 공유부commons를 상품화하고, 인간생명을 인적 자본으로 취급하며 경쟁을 독려해온 기업은 고도로 산업화·전문화된 반빈곤네트워크의 젖줄이 됐다. 이들은 사회공헌, 윤리적 자본주의, 임팩트 투자, 환경·사회·거버넌스ESG 등 시기별로 다양한 구호를 변주해가면서 빈곤산업의 언어와 문법을 ‘혁신‘하고, 다수의 빈곤을 초래한 대가로 축적한 자본의 극히 일부를 정부, 대학, 비영리재단, 시민단체에 세련된 퍼포먼스와 함께 재분배한다. 나를 포함한 시민 대중도 빈곤의 연결망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알아서 살아남기를 강요하던 국가 통치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족 바깥의 삶에 대한 무심함을 내면화한 채 ‘쓸모없는’ 생명의 축출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공조자다. 주가와 부동산이 오를 수만 있다면 해고, 철거, 산업재해, 환경 파괴를 적당히 눈감고, 쓰레기 소각장, 축사, 심지어 복지 기관까지 ‘혐오 시설‘이라 부르며 빈곤과의 물리적 거리 두기에 안간힘을 쓴다. 아프리카 아동이 후원의 보답으로 보낸 손편지에 감동하면서도, 자녀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엔 신경이 쓰인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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