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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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에 나오는 외부(타인)지향성에 대한 재해석과 탈감정은 밀접하게 연결된다. 외로운 군중의 특징은 타자 지향성 (other-direction)이다. 타자 지향성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이 맥락에서는 내부(자기) 지향성의 상대어로 쓰인다. 타자 지향성이란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대중은 부정의에 대한 분노를 타자 지향적 방식으로 처리한다. 자신은 정치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치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정치를 ‘말해주는‘ 사람에게 의존한다. 감정을 직접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다양한 문화 장치(미디어)가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타자 지향적인 개인들에게는 희생할 만한 초월적 가치가 없다. 남아 있는 유일한 가치는 생존이다. - P197

외롭고 지겨운 노동의 연속.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이다. 슬픔은 삶에 어쩌다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외면한다. 그것을 상기하는 사람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예외인 양 방어한다. 나는 다음 구절에서 스메들리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느꼈다. "왜 이리 인생이 모순일까. 매우 비참한 상황인데도 나는 종종 웃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258쪽)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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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275쪽) 의미에서도 아니고, 타인의 시선 때문에 숨기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는 거의 중독에 가까우며 매일 이 문제와 사투를 벌이며 분열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인류가 만들어낸 그 어떤 지식보다 수월(越)하다. 정치적, 이론적, 학문적으로 다른 어떤 언설보다 세련되고 앞서 있으며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사상 체계다. 지식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면, 또 지식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지식이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면 최소한 페미니즘을 따라올 지식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페미니즘은 지난 모든 언어에 대한 의문과 개입에서 시작됐으며, 이 과정에서 저절로 기존의 지식을 조감(overview)하는 능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다(多)학제적이기 때문에 지식 전반에 걸쳐 박식하고, 다른 분야와 연결되어 폭발적인 재해석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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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 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 P102

거듭 강조하건대 모든 생물체는 문화와 환경에 따라 자신의 몸을 변형하며 그 변화는 다시 자연상태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이 생물학이다. 생물학과 생물학적 사고(생물학적 본질주의)는 반대말이다. 젠더, 퀴어, 섹슈얼리티 문제가 정치학으로 간주되기 가장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연화(化) 때문이다.
가장 사회적인 구성물을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이 세상 어디에도 자연의 법칙은 없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간주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문제는 ‘무엇을 자연이라고 보는가‘, ‘자연의 범주는 누가 정하는가‘이다. 그것이 권력이고 지식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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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지녀야 한다.", "실력을 키워야 한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어느 시대에나 나타나는 지배 세력의 지상 명령이고, 비극의 씨앗이다. 인간의 모든 소유욕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물리적 자원, 능력, 관계, 힘, 사랑………… 이 모든 것은 영향력으로서 권력이다. 이러한 권력 개념에서 갈등과 분쟁, 전쟁, 부패는 필연적이다. 현실 정치에 대한 혐오는 여기서 나온다. 집권(執權), 권력 투쟁, 권불십년,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 같은 표현은 모두 권력을 구체적인 영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결국 권력의 최종은 무기(폭력)이고, 이 개념 앞에서 인간의 모든 지성과 윤리는 중단된다. - P73

권력이 힘과 영향력과 통제력이 아니라 책임감과 보살핌 노동이라면 지금처럼 사람들이 권력을 원하겠는가. 이때 권력은 ‘귀찮은 노동‘이다. 권력을 책임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리를 고사한다. 책임감으로서 권력일 때 우리는 그것을 소명, 사명감이라고 부른다. - P80

나는 인간과 사회의 ‘질‘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음과 지성의 용량(capacity)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P85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각자의 몸이다.
이 모순, 아니 양면을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영원히 이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아무리 아파도 내 고통을 대신할 사람은 없다.",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길"…………. 미국 정신의학자 어빈 얄롬은 이렇게 위로한다(그가 실존주의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든 이들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 그러나 배에 혼자 타고 있더라도 다른 배들의 불빛을 가까이 할 수 있다면 한결 안심이 된다." 조금 다르게 쓰면 삶의 유일한 위안은 우리 모두 비록 깜깜하고추운 밤바다를 혼자 표류하고 있지만, 반짝이는 등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나마 소통하고 있다는 데 있다. - P86

이 책의 부제는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이다. 나는 성찰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단어 자체가 남발되는 것도 문제지만 ‘아름다운 다짐‘으로 읽히는 어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영어 ‘reflexive‘의 번역어인 성찰(省察)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반성(反省)이 아니다.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되돌아옴(그리고 다시 출발), 재귀(再)의 연속을 말한다. 영어의 ’self‘로 끝나는 ‘재귀대명사‘의 ‘재귀‘가 그것이다. 재귀가 반복될 때 우리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상태를 산다. 즉 삶은 항상적인 상태가 없다(無常). 언제나 갱신 중이라는 의미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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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는 육체적, 정치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위계이다. 모든 고통은 같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기 상처가 제일 큰법이다. 나도 내 상처가 제일 크다. 나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 나는 ‘사회 정의‘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생각에서 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 오해받거나 배신을 당한다. 시간, 돈, 평판 등에서 ‘큰 손해를 본다. → 배신감, 상처, 자책감에 시달린다. → 분노로 시간을 낭비한다. → 복수할 방법에 골몰한다. → 해결 방안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붕괴가 지속된다. → 어쩔 수 없이 생활전선에 복귀한다. → 몸에 부상을 입은 채 잊는다, 잊게 된다, 잊힌다.
내게 용서는 저절로 잊히는 것이지, 용서를 위해 고민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겐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고 참을 수 없는 부정의다.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관련된 사건을 잊는 것이다. 사건을 무시한다(ignore). 살기 위해 나 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일을 잊는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가 일반 법칙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 결벽증, 비사회성에 상응하는 능력은 없지만, 일중독과 자기 몰입성향이 ‘용서‘ 따위를 잊게 해주는 것 같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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