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나무 - 인간적 경제를 위한 10가지 이야기
루이지노 브루니 지음, 강영선 옮김 / 상상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직은 정작 그들에게 필요하고 가치 있는 미덕을 원하는 만큼 갖출 수 없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애초에 직원들에게 기대했던 덕성과 실제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 덕성 사이의 간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쉬운 대체 방법을 찾기보다 어쩔 수 없이 부족한 품성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우면서 직원들이 그 상태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성장하도록 돕는다. 모든 조직이 지녀야 할 첫 번째 지혜는 구성원들의 영혼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각각의 덕은 무엇보다 먼저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P31

우리가 지닌 충성의 능력은 액면가가 보장된 주식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 삶의 질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비롯된 인간관계의 수준에 따라 변한다. 지금 여기에 충성하겠다는 나의 선택은 내면에서 느끼는 정신적 보상에 달려 있을 것이다.
때로는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특정 기업이나 공동체에 충실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인식에 달려있을 수도 있다. 기업은 충성심을 창출할 수 없음에도 이는 전적으로 그레고 오로지 인간의 자유로운 선물일 뿐이다. - P37

인간은 제도나 기업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적이며 풍요롭고 신비로운 존재이다. 때때로 우리는 하찮게 보이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월등한 존재이다. 우리는 언제나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은 능률을 기대하지만 우리는 종종 마음속에서 효율적으로 일하는 데 장애가 되는 감정과 정서를 느낀다. 마침내 절대 채워지지않을 인정과 존중 욕구를 충족시키려 애쓰면서 우리는 헛되이 힘을 낭비한다. 기업이 우리를 위축시키면서 마음의 열정을 꺼버리지 않는 한, 그리하여 영혼의 위대함을 지워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 있고 창조적일 것이다. 영혼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기업의 구원이 깃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 P40

겸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덕목이고,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다. 좋은 시민적 삶의 문법을 구성하는 상호성의 행위 안에서 우리의 겸손은 오직 타인들만이 식별할 수 있고 그들의 겸손 또한 우리 쪽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
우리가 그다지 겸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겸손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겸손이 무엇인지 식별할 줄은 안다. 겸손해지기 바란다면 그 자체가 이미 겸손이다. 겸손의 열매는 다른 것과 혼동할 수가 없다. 겸손의 첫 번째 열매는 삶과 타인들 그리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재능과 장점, 아름다움이 선물이자 사랑이며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 겸손은 세상과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는 행위이므로 의지적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겸손은 어느 날 저절로 환히 드러나서 알아보게되는 것이다. 존재하고 소유하는 모든 것이 삶의 관대함으로부터 단순히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닌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 중에서 우리 손으로 이룬 것은 실로 보잘것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무상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자연스럽고 근본적인 감사의 마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윤리적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은 성숙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지며, 이 세상을 떠날 때 마침내 겸손한 감사의 마지막 행위로 끝을 맺는다. 겸손은 더욱 심오한 진리에 다다르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겸손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선물이다.
겸손한 사람은 항상 고마워한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 그의 ‘감사‘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오직 겸손한 이들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인간과 세계의 보다 심오하고 더욱 아름다움이 있다. 겸손한 이들만이 기도할 줄 안다. - P48

겸손과 유사한 온화함, 연민, 너그러움과 같은 덕목들을 존중하기 시작한다면, 리더십의 기술적인 면과 함께 리더십을 고취하는 문화의 내부에서 완전한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겸손은 누군가를 따르는 법을 가르친다. 타인들, 각양각색의 사람들, 가난한 이들, 자기 자신보다 우수하고 진실한 사람들을 뒤따르도록 양성되지 않은 책임자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좋은 안내자(리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존재의 온전한 가치는 그가 도달한 겸손으로 측정된다. 겸손은 큰 시련의 시기를 견디며 살아내기 위한 토대와 같다. 삶이 우리를 땅humus에 내팽개치고 진창에 빠뜨릴지라도, 땅과 친하게 지내는 법을 배워 땅의 친구가 되었다면, 우리는 크게 다치지 않고 다시 일어날수 있다. 겸손이 없다면 누구도 인간의 고귀함에 도달할수 없고, 어떠한 일도 제대로 터득할 수 없다. 나아가 결코 진정한 어른으로 성숙할 수도 없다. 겸손은 피조물의입에서 나올 수 있는 궁극의 언어이다. - P53

우리의 너그러움은 나이가 들면서 줄어든다.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면서 자연히 너그러움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미래의 지평선이 목전에 다가오거나 예기치 못하게 끝나버려서-너그러움의 첫 번째 ‘밑천‘인-시간이 부족하게 된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절대 충분치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때문에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너그러움을 간직하고, 젊은이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고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너그러움은 덕으로 변화한다. 시간이 흘러도 너그러움을 잃지 않으려면 더 많은 사랑과 고통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 P60

가는 힘이 있을 뿐 아니라 순결을 불러들인다. 너그러운 사람은 ‘독식‘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소진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놓아둔다. 너그러운 회사 조직은 우수한 노동자들의시간과 영혼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나아가 우수하거나 특별한 자질을 지닌 노동자의 영혼과 시간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기업의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이들에게 달려 있다. 만일 회사가직원을 완전히 움켜쥐려고 하면 사람은 탁월함과 특별함이 깃든 아름다운 면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아름다움을 지닌 상태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잉여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알거나 직관적으로 감지해야 한다. - P65

성과주의 이데올로기 안에 숨겨진 함정은 미묘하며 일반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업은 성과의 다양함을 오직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만으로 축소해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를 성과에 보답할 능력을 지닌 곳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화가의 그림을 그리는 재능은 기업의 입장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의 손이 지닌 가치는 볼트를 조이는 능력으로만 측정된다. 경제적 성과는 보상하기 쉽다. 판단하고 측정하고 보상하기 위한 성과와 과오는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제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의 성과는 판단하기 훨씬 어렵고 측정하기는 한층 더 어렵다. 이럴 경우에 큰 위험이 드러난다. 기업은 측정 가능성의 손쉬움을 고려하여 ‘가시적‘ 성과만을 인정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것만을 측정하여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동시에 두 가지 결과가 벌어진다. 양적이고 측정 가능한 성과는 과도하게 장려되고, 질적이고 비생산적인 성과는 지나치게 위축된 채 버려진다. 우리가 담론을 시작하면서 소개한 좋은 삶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하지만, 경제적으로 측정될 수 없는 미덕의 파괴는 가속화된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 했던 경험을 기업과 경제 분야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학문적 성과는 손쉽게 점수로 정량화되고 측정되었다. 이 평가의 결과로 전문가로서 직업적 출세의 윤곽이 드러나고 그들 사이에서 매우 편차가 심한 봉급과 사회적 평가의 프로필이 확정된다. 삶과 사회에서 학문적 성취는 성과로 변질되고 말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지만 다른 형태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을 딛고 올라서서, 오래된 성과주의의 이름으로 모든 권력의 구조를 구축하였다. 모든 측정과 성과주의는 권력을 관리하는 도구이다.
그리스도교 인본주의의 탁월한 업적은 패자들을 죄인처럼 여기는 고대 세계를 지배한 인과응보의 문화로부터 우리의 사고를 해방시킨 것이다. 성과의 불콩죽한 그릇에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는 운명을 달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이다. - P141

창업기에는 노동자와 경영자가 젊고, 기업과 노동자간의 약속, 기대, 상호적 인식과 배려가 선순환되면서 책임감과 열의, 인센티브도 나선형으로 상승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정서적이고 관계적인 투하 자본이 누적되고 어느 날 청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되면 이것은 자본이 아니라 감정적 부채로 변질되고 만다. 맨 처음 지녔던 이른바 "자기도취적인 계약"이 위기에 봉착하고, 초기의 희열은 환멸과 좌절로 바뀐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덧없으며 스스로 "패자"라고 느끼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때까지 이룩했던 "이상적인노동자"라는 이미지는 붕괴되고 뒤를 이어 번아웃, 탈진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수시로 지치고 약해지며, 시간이 흐를수록 쇠잔해가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게임은 삶의 등불로서의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게임은 머지않아 새롭게 교체될 다른 젊은이들이 계속하여 뒤를 잇게 될 것이다. 마치 군대나 사이비 종교집단과 같이 이 조직들이 젊음을 "소비"하는 방식은 놀라울 뿐이다.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 P86

그녀는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늘 남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거나 우월감에 취한 게 아니라 단지 남에게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안에는 우연히 들어온 바람으로 가득 채워졌다가 그것이 빠져나가 텅 비워지곤 하는 허공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은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에게 번번이 끌려다니는 꼴이 되고 말지만 말이다. - P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존을 배우다 - 어느 철학자가 인지장애를 가진 딸을 보살피며 배운 것
에바 페더 키테이 지음, 김준혁 옮김 / 반비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돌봄윤리(care ethics)와 ‘의존노동(dependencywork)‘에 관한 에바의 이전 작업을 확장하고 심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는 무엇인지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타인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에 관항 인식론적 질문을, 무엇이 삶을 좋고 풍성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지에 관한(그리스적 의미에서) 윤리적 질문을, 우리 삶에서 감정, 그리고 기쁨, 감사, 호기심과 같은 태도의 역할에 관해 질문한다. 에바가 딸에게서 배운 것, 이 책을 통해 우리와 나누고자 하는 것은 철학, 페미니즘 이론, 현대 정치학에 관심 있는 모두에게, 아니 그저 충만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변혁의 가르침을 준다. - P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치 있는 삶 - 무엇을 선택하고 이룰 것인가
미로슬라브 볼프.마태 크러스믄.라이언 매컬널리린츠 지음, 김한슬기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싯다르타, 베드로, 웰스는 지나치게 근본적이기에 명확하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의문을 품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표현하는질문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 무엇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가? 인간다운 가치를 품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한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진실하고, 선한가? - P21

기독교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는 단순한 동료와 진정한 친구를 구별해서 생각했다. 동료는 종교, 직장이든, 학업이든, 취미든 같은 활동을 공유하는 사이를 뜻한다. 긍정적이고 호의적이지만 루이스의 기준에서 우정에는 못 미치는 관계에 해당한다. 루이스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란 질문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친구가 될 수 있다. 대답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다." - P24

우리 인생은 포커와 워 중 어디에 가까운가? 인생의 ‘규칙‘은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허용하는가? 쉽지 않은 질문인 만큼 논쟁의 여지도 많다. 하지만 인생이 포커와 워 사이 어디에 자리하든 다음의 두 가지는 꼭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인생의 형태에 어느 정도 책임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인생의 형태는 승패와 게임에 임하는 자세를 모두 포함한다. 둘째,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 주변 환경은 거대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며, 우리에게는 결과를 결정할 힘이 없다.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는 위험한 허상이다.
현재 우리의 모습조차 우리의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피할 수 있었다면 피했을 만한 사건을 경험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순간을 마주하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지전능한 독재자가 아니다. 잘 알고있겠지만, 모든 상황을 내 입맛에 맞게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삶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누군가 마음대로 들어 올려서 적당히 깎아낸 후 정원의 길을 까는데 사용해도 돌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돌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에 미약하게나마 분명히 반응하며 살아간다. 손에카드를 쥐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햄스터도 아니다. 누군가 햄스터를 집어 올리면 틀림없이 뭔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어쩌면 햄스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반응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햄스터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뿐 아니라 이 책에도 제약이 존재한다. 삶의 고통을 둘러싼 깨달음, 예수 추종, 인종차별 해결은 고대 마야인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추구할 만한 가치가 되지 못했다. 애초에 고민거리조차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가 걷는 길에 책임이 있는 삶을 사는 중이다.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평범한 길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어떤 길을 걸을지는 우리의 책임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관점을 취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우리의 책임이다.
이는 우리 삶을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제한적인 책임이다. 우리에게는 추구할 가치가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 삶에 어떤 ‘의문‘이 주어졌고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최선을 다해 고민할 책임이 있다. - P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이 책에서 알리고자 하는 삶의 기술은 무아지경과 절제력의 조화를 요구한다. 이 책이 상반된 두 관점을 제시하며 문제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적 페르소나의 속박하에서 우리가 가진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방출해 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며 출발해, 무아지경과 절제력의 불안정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며 끝을 맺고 있다. 두 가지 주제를 설명할 때 모두 기질이란 우리 안에서 가장 사회화가 덜 된 모습과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한 모습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사회성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기고만장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장기적인) 이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지 체계라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다른 형태의 기술에서 요구하는 신중한 인내심을 지닌 채, 자신의 삶의 기술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를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하루를 무사히 버티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페르소나가 무너지는 순간 나타나며 이성적인 의식의 포기를 의미하는 자아 상실은 애초에 잃어버릴 자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애초에 우리가 자아를 지니게 하고,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갈수 있게 하는 여러 모습의 사회성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 무아지경을 논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와 함께,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은 우리가 자아 상실의 상태에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지만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 아닌) 혁신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자아 상실을 잘 해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통제된 페르소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당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사회화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이 장에서 설명한 무아지경에 이르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본래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약간은 두려워한다. 우리는 무아지경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줄 아는 일관성 있는 개인으로서의 자아감을 위협한다고 느끼고, 특히나 이성적 의식이랄 게 없는 날것의 (사회가 억제하고자 하는) 동물적 본성을 일깨우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아지경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큰사물의 메아리를 가장 충실히 담고 있는 것)에 몰두하기를 거부한다. 앞서 연인 관계 (또는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거부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줬다. 하지만 다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한 것에, 특정한 종류의 대상과 활동에 특별히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그것에 "정복"되고 싶지는 않아 마음을 접으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음을 열심히도 부추기는 대상과 활동에서 뒷걸음치면, 우리는 주어진 하루를 이디엄이 표현되는 공간으로 바꿔 내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대상과 활동을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동적 도구나 자원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법 같은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법 같은 일이 주는 혼란스러운 생소함을 억누른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느낌으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셈이 된다.
여기서 내가 강조한 에로스적 삶은 우리가 이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 존재안의 가장 사회화되지 않은 단계, 즉 무아지경에 잘 빠질 수 있는 단계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 반항심이 주입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더라도 규범을 답습하기만 하는 현상에 사로잡히지는 않게 된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사회화"되고 사회 속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더라도,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로 우리를 남게 한다. 사회가 획일적인 모습을 보일수록 우리가 가진 기질을 지키기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의 사회생활에 균열이 생길지라도 기질을 형성하는 에너지와 지속적으로 교감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기질을 사회적 모습 속에 잘 통합시켜 낼 수 있는 개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실존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흔히 누군가를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 분위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하고 다부진 내면을 갖게 하는 기질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흥미를 느끼며, 종종 겉보기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끌리지만, 사실은 그들이 용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질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 짜릿하기도 하지만, 정말 두렵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 P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