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책에서 알리고자 하는 삶의 기술은 무아지경과 절제력의 조화를 요구한다. 이 책이 상반된 두 관점을 제시하며 문제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적 페르소나의 속박하에서 우리가 가진 통제되지 않은 에너지를 방출해 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며 출발해, 무아지경과 절제력의 불안정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며 끝을 맺고 있다. 두 가지 주제를 설명할 때 모두 기질이란 우리 안에서 가장 사회화가 덜 된 모습과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한 모습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사회성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기고만장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장기적인) 이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지 체계라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다른 형태의 기술에서 요구하는 신중한 인내심을 지닌 채, 자신의 삶의 기술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를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하루를 무사히 버티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페르소나가 무너지는 순간 나타나며 이성적인 의식의 포기를 의미하는 자아 상실은 애초에 잃어버릴 자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애초에 우리가 자아를 지니게 하고,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갈수 있게 하는 여러 모습의 사회성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 무아지경을 논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와 함께,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은 우리가 자아 상실의 상태에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지만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 아닌) 혁신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자아 상실을 잘 해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통제된 페르소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당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사회화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이 장에서 설명한 무아지경에 이르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본래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약간은 두려워한다. 우리는 무아지경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줄 아는 일관성 있는 개인으로서의 자아감을 위협한다고 느끼고, 특히나 이성적 의식이랄 게 없는 날것의 (사회가 억제하고자 하는) 동물적 본성을 일깨우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아지경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큰사물의 메아리를 가장 충실히 담고 있는 것)에 몰두하기를 거부한다. 앞서 연인 관계 (또는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거부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줬다. 하지만 다른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한 것에, 특정한 종류의 대상과 활동에 특별히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그것에 "정복"되고 싶지는 않아 마음을 접으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음을 열심히도 부추기는 대상과 활동에서 뒷걸음치면, 우리는 주어진 하루를 이디엄이 표현되는 공간으로 바꿔 내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다양한 대상과 활동을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동적 도구나 자원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법 같은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마법 같은 일이 주는 혼란스러운 생소함을 억누른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느낌으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셈이 된다.
여기서 내가 강조한 에로스적 삶은 우리가 이 초대를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 존재안의 가장 사회화되지 않은 단계, 즉 무아지경에 잘 빠질 수 있는 단계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 반항심이 주입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더라도 규범을 답습하기만 하는 현상에 사로잡히지는 않게 된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사회화"되고 사회 속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더라도,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로 우리를 남게 한다. 사회가 획일적인 모습을 보일수록 우리가 가진 기질을 지키기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상에는 여전히 자신의 사회생활에 균열이 생길지라도 기질을 형성하는 에너지와 지속적으로 교감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기질을 사회적 모습 속에 잘 통합시켜 낼 수 있는 개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실존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흔히 누군가를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 분위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하고 다부진 내면을 갖게 하는 기질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흥미를 느끼며, 종종 겉보기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끌리지만, 사실은 그들이 용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질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 짜릿하기도 하지만, 정말 두렵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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