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 괴테와 마주앉는 시간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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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서곡>에서 천사들은 우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쓰인 것이 까마득한 오래전인데,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시각입니다!), 튀어나온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온갖 "거름더미에 코를 처박고" 천상의 빛인 이성을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데나 쓰는 인간의 가엾은 꼴을 한없이 비아냥거립니다. 듣다 못한 주님이 "너 파우스트를 아느냐?"라고 물으시니 메피스토펠레스는 "아 그 박사요?!" 하고 냉큼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런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주님은 "내 종이니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좀 더 부연하시는 말씀이 바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해보라 하시며 메피스토의 손에 파우스트를 맡깁니다. 이로써 방황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그런 큰 그림이 주제로서 제시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주문이나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설명문이나 잘 살펴보면 둘 다 비문입니다. 지향이 있다는 것은 갈 곳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있는 한 방황한다니. 갈 곳이 있기에 길을 잃는다니. 그러나 이 비문의 함의가 참 큽니다. 뒤집어보면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곧 갈 곳이, 목표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황이 바로, 목표가 있고 지향이 있기 때문이라니!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방황해도 괜찮아. 다 가고싶은 마음이 있으니 언젠가 어디인가에 닿아. 그런 쉬운 말보다, 말이 될 듯 말 듯한 이 위로가 주는 여운이 큽니다. 참으로 정교한 비문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이 부연의 문장에서는 비문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저 나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선함이 있을 수 있고,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어도 그 선의 알맹이가 있기에 그에게는 바른 길의 의식도 선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해하라, 용서하자가 아닙니다. 이 비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참으로 큰 포용의 메시지입니다. 이 얼마나 잊히지 않는 커다란 껴안음인지요. - P15

자신을 빚어나가는 일을 할 사람은, 자기밖에는 세상에 그 누구도 달리 없습니다. - P26

내가 받은 유산 얼마나
찬란하고 얼마나 넓디넓은지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 - P43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초조,
더더욱 쓸모없는 건 후회
초조는 있는 죄를 늘이고
후회는 새 죄를 만들어낸다 - P47

뒤처진 새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가로지를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 P58

라바터를 만나서 그 곁에서 행복합니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치유예요. 사랑 안에 깃들어 살고 지향이 있는 사람, 활동하면서 그 가운데서 즐기기도 하는 사람이기 위해서요.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의를 기울여 친구들을 감당하고, 먹이고, 인도하고,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요. 한 석 달만 이분 곁에서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 P67

괴테는 그만한 열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림‘이 쉬웠겠습니까. 청년 괴테는, 그의 ‘열림‘이 어떠했는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조개들이 살을 껍질 밖으로 펼쳐낼 때 물에 뜨듯이, 그렇게 나는 사는 걸 배웁니다.

조개가 연한 살을 내미는 곳은 짠 바닷물입니다. 우리의 세상과의 만남은 연한 살이 소금물에 닿을 때처럼 아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면서,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사고를 유연하게 열고 옮길 수 있는 힘, 그런 힘이 진정 큰 힘인 것 같습니다. - P71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 P101

수천 권의 책 속에서 진실로
혹은 우화로 그대에게 나타나는 것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바벨탑에 불과하다
사랑이 결합시켜주지 않으면 - P104

꿈의 실현같이 좋은 일에도 조금씩 쌓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어렵고 문제 많은 일들에서야 더욱더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조금씩 고쳐가고 쌓아가는 일에 우리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듯합니다. 뭐든 확 바꾸고 와장창 뜯어고칩니다. 확 바꾸면 있던 그 문제야 사라지지만, 대신 다른 문제가 무더기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도 문제 해결 방식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이즈음은, 그사이 쌓인 문제가 워낙 많은 터라 그렇지만, 마치 드디어 꿈을 실현할 때라는 듯 여기저기에서 때로는 무리해 보이는 청사진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집이야말로 조금씩, 최소한 몇십 년은 내다보며, 올바른 생각과 수단을 통해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꿈도, 집도 금방 폐가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 P114

세상의 문제가 회피해서 해결될 리 없습니다. 정면으로 대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답이 찾아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문제에 원천적으로 답은 없습니다. 답이 있고 해결책이 쉬이 있으면 그게 문제이겠습니까. 얼른 답을 내려고 답을 내어 그것을 벗어나려고 모두 노력하지만, 때로는 발버둥을 치지만, 쉽게 찾아진 답은 장기적으로 계속 답이 되기 어렵고 그래서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의 전모를 바르게 파악하면, 기이하게도 생겨나는, 문제를 감당해가는 힘. 그 힘이, 답은 없지만 그중 답의 근사치일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모색이 이루어지며, 그 길에서 쌓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슬기가 생기기도 하고, 문제 쪽에서 슬그머니 알아서 풀리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 P117

『서·동 시집』은 참 사연이 많은 책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38년간 도서관 감독을 하며 온갖 책을 많이 읽던 괴테의 손에, 1814년 여름 막 출간된14세기 페르시아 시인 하피스의 방대한 번역본이 들어왔습니다. 그 여름 괴테는 오래전에 떠났던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찾아가는데, 고향의 지인이자 열렬한 독자인 은행가 빌레머 씨 댁에 묵게 됩니다. 빌레머 씨는 딸의 이름의 스펠링을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등장인물과 같게 고칠 만큼 괴테의 열성 독자인 동시에 오랜 지인이었지요. 마침 65세 생일을 그 집에서 보냈고, 다음해에 한번 더 잠깐 찾아갔습니다.
빌레머 씨에게는, 자기 딸과 함께 친구도 하며 교육도 받게 한 양녀 마리아네가 있었습니다. 유랑극단에서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데려온 여배우의 딸이었는데,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 괴테가 그 집에 머물 때 이 영리한 아가씨는 괴테가 읽는 두꺼운 하피스 시집을 속속들이 함께 읽어,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급기야는 하피스 시집의 쪽수, 행수만을 적은 쪽지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게 되지요. 시인이 아니던 마리아네도 자기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시구를 찾아 두꺼운 책을 읽고 또 읽다보니 자꾸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 괴테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를 찾았을 때는, 양녀인 마리아네가 이미 빌레머 씨의 아내가 되어 있었지요.
괴테와 마리아네가 함께한 독서는 노년의 괴테에게서 다시 시인의 감성을 활짝 열었고 마리아네에게서는 없던 시인이 깨어났습니다. 이때 쏟아져나온 시들이으로 묶이게 되는데, 그 중심이 <라이카의 서>이고 줄라이카라는 이름 뒤에는 마리아네가 있습니다.
사실 <서·동시집> 안에는 마리아네의 시도 몇 편 들어가 있습니다. 별도의 표시가 없는 이 시들 중 두 편을 괴테의 충직한 비서 에커만이, 그 많은 시들 중에서 가장 좋은 시로 꼽기도 했지요. 바로 그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들이 <동풍시>와 <서풍시>입니다. 앞서 인용한 구절이 바로 제목이 없는, 속칭 <서풍시>의 일부지요. 즉, 괴테의 시가 아니라 마리아네의 시입니다. 감성적, 시적 교류가 있었으나 사회적 거리와 정중함을 두 사람은, 특히 괴테는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그집을 떠나고 나서는(그가 그 집을 떠날 때 하이델베르크까지 전송을 온 내외를 잠깐 만나고는, 죽을 때까지 마리아네를 다시 만난 적이 없습니다.
「동풍시」는 마리아네가 그렇게 마지막으로 괴테를 만나러 하이델베르크로 갈 때 쓴 것이고, 「서풍시」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돌아오며, 또 돌아와서 쓴 것입니다. 괴테는 편지조차도, 빌레머 씨나 그 딸에게 보내어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했을 뿐 직접 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건만 마리아네가 괴테에게 보낸 편지들은, 긴 세월을 고이 간직했다가 임종을 1년 앞두고 정성스레 묶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묶음에는 이런 쪽지가 덧붙여졌습니다.

사랑스럽던 이의 눈 앞으로
이걸 썼던 손길에게로-
언젠가 뜨거운 갈망으로
기다리고 받던 것
그것들이 솟구쳤던 가슴에
이 종이들은 돌아가거라.
늘 사랑에 가득차 거기 있던 것,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의 증인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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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속의 자아들 - 누가 내 삶을 몰래 살아가고 있는가
할 스톤 & 시드라 스톤 지음, 안진희 옮김 / 정신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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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가슴 깊이 진실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을 듣거나 읽을 때면 온몸에 강렬하고 얼얼한 전율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이 느낌을 ‘진실의 종‘(truth bell)이라고 부르는데… - P7

우리가 다양한 자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론이 인격을 파편화한다고 주장하면서 반기를 든다. 하지만 우리는 인격은 ‘이미‘ 파편화되어 있다고 느끼고, 우리의 과제는 이 자아들의 파편성 혹은 다수성을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삶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파편화된 모순적 감정을 한 번쯤은 확연히느낀다. 감정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일수록 다양한 감정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 P29

사실 우리의 인격에서 가장 일찍 발달하는 측면 중의 하나는 보디가드와도 비슷한, 우리를 ‘보호하는 자아‘이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늘 살피고, 어떻게 하면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잘 보호할 수 있을지를 판단한다. 그것은 우리의 안전을 확보해주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이게끔 해주리라고 느껴지는 일련의 규칙을 정함으로써 부모와 사회가 금지하거나 권고하는 조항들을 만들어내어 우리의 행동을 광범위하게 통제한다.
이 자아가 우리가 얼마나 감정적이어도 되는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보처럼 행동하거나 스스로를 난감해지게 만드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이 자아를 ‘보호자/통제자‘라고 부른다.
보호자/통제자는 많은 다른 자아들의 배후에 있는 원초적 에너지 패턴이다. 보호자/통제자는 이성적 자아의 에너지와 책임감 강한 부모 자아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한다. 사실 사람들이 ‘나‘라고 말할 때, 대부분은 자신의 보호자/통제자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호자/통제자 에너지는 인격의 감독관이다. 많은 사람들이 ‘에고ego‘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이것이다. - P32

외면당한 자아들에 대해 더 깊이 탐사해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중요한 점을 미리 구분해놓을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의식되지 않는 자아를 가리키는 용어는 ‘무의식적(unconscious)‘ 자아이다. 하지만 모든 무의식적 자아가 반드시 ‘외면당한‘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 자아는 단지 ‘의식되지 않을‘ 뿐이다. 어떤 에너지도 그것을 억압하거나 그것을 무의식 속에 붙들어두고 있지 않다. 하지만 모든 외면당한 자아는 에고와 보호자/통제자가 동일시하고 있는 에너지와 정반대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무절제한 성욕과 관련된 외면당한 자아를 묻어두고 있는 여성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규율을 잘 따르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이 정반대의 에너지, 즉 도덕적으로 올바른 에너지는 보호자/통제자와 손을 잡고 외면당한 자아를 끊임없이 억압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자아를 발견해내기 전까지는 그 자아가 외면당했는지 어떤지를 알 방법이 없다. - P50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외면당한 자라들을 반영하는 무수한 인간관계의 무력한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이런 인간관계들을 도전과제로 받아들이며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나의 내면의 지성에게) 스승님, 이 사람/상황은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식이 크게 전환된다. 삶 속의 많은 스트레스는 우리가 외면했던 자아들을 대인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무의식적 경향으로 인해서 야기되고, 똑같은 패턴이 삶에서 반복되는 만큼 우리는 계속 고통에 시달린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과정이 담고 있는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외면당한 자아들의 에너지는 점점 더 강해지고 더 왜곡되어간다.
생존욕, 성욕, 공격 욕구와 같은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들이 오랫동안 외면당하면 그것은 무의식 속으로 다시 돌아들어가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에너지는 사라질 수 없다. 그래서 외면당한 본능들은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자기 쪽으로 부가적인 에너지를 끌어당긴다. 곧 이 에너지들은 본래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악의적으로 변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에너지들에게 ‘악마적 에너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외면당한 자아의 에너지가 악마적으로 변하면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공격성은 생명을 위협하는 분노로 전환되고, 질투는 통제할 수 없는 울화로 변하고, 본능적인 성적 충동은 끔찍한 경험들로 변한다. 이런 악마적 에너지들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 양쪽에서 모두 파괴적이고 포악한 행동으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들어올 수 있다. - P56

에너지 패턴은 통합될 준비가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꿈속에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입장료, 곧 항복을 요구한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 우리 뒤를 쫓는 사람들이나 집안으로 침입하려는 사람들… 이런 꿈들은 모두 우리와 접촉하려고 애쓰은 다양한 종류의 에너지 패턴들이다. - P64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외면당한 자아들을 포용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
첫째로, 외면당한 자아가 작용하고 있는 것부터 알아차려야 한다. 누군가에게 짜증이 날 때를 주목하라. 그 느낌이 좋은가? 자기만이 옳다고 느껴지는가? 상대방이 ‘너무‘ 끔찍하지는 않은가? 유감이지만, 이제 당신은 외면당한 자아들에 대해 알았으니 더 이상 도덕적 우월감ㅇ 햇살을 만끽하고만 있을 수가 없다. 당신은 이제 당신이 상대방을 바꿔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신이 과도하게 동일시한 성품들(당신이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성품들)을 직시하고 그 성품들이 당신을 어떻게 한정하는지를 알아차려야 할 때이다.
아마 당신은 지나치게 깔끔하거나, 지독하게 열심히 일하거나,
강박적일 정도로 친절하게 남을 배려하거나, 항상 남을 돌보고 베풀거나, 항상 올바른 일만 하거나, 절대 불평하거나 화를 내지 않을지 모른다. 이런 성품들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해서, 우리는 그것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성품들이 어떻게 우리를 한정할 수 있고, 편협하고 완고해지게 만들 수 있고, 자신과 타인들을 복합적이고도 온전한 인간으로서 느긋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완벽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것이 곧,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새로운 것은 결코 시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어떤가?
이제부터가 재미있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질 테지만, 외면당한 자아에게 말을 걸어보라. 외면당한 자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살펴보라. 그것이 통제권을 얻는다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물어보라. 외면당한 자아의 새로운 에너지를 느껴보라.
그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우리의 외면당한 자아는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영감, 풀리지 않는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을 공급해주는 원천이다. 무엇보다 외면당한 자아들은 우리가 지금껏 접하지 못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그 새로운 에너지에 깜짝 놀랄 것이다. 당신에게 ‘외면당한 자아가 되라‘고 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말라. 그저 외면당한 자아의 에너지가 ‘말하도록‘ 허용하라. - P66

이런 딜레마에 대한 답은 깨어서 의식하는 것, 즉 이런 에너지 패턴들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자각은 어떤 것도 제거하거나 심판하려 하지 않는다. 샐리의 사례에서 의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각과 경험이었고, 그것이 선택의 가능성을 가져다줬다. 샐리는 그녀의 밀어붙이는 자아와 히피의 이야기를 들었다. 목소리와의 대화 상담에서, 우리는 그녀의 존재방식을 지배해온 생각, 태도, 감정의 시스템으로부터 그녀의 자각의식이 떨어져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생애 최초로 ‘자신의 차를 직접 운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이후에도 계속 밀어붙이는 자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밀어붙이는 자아는 더 이상 그녀를 지배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더 이상 밀어붙이는 자아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무턱대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깨어 있는 에고를 발달시켜가고 있었다. - P161

최강급의 비판적 자아는 어느 각도에서도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 오직 지속적으로 경계하면서 명치 속의 철렁하는 느낌을 예민하게 감지할 때만 우리는 정신을 차려 비판적 자아의 목표를 잘 겨눈 교활한 공격을 피해낼 수 있다. 세심히 살펴보기만 하면 우리가 어떠하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비판적인 자아의 성에는 결코 차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비판적인 자아는 정확히 어디에 비수를 꽂아야 하는지를 잘 안다. 그곳은 항상 예민한 지점이며, 일단 비수가 꽂히고 나면 우리는 우리에게 꽂혀 있는 비수보다 비판적 자아의 불평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비판적인 자아는 뛰어난 칼잡이이다. 비판적인 자아의 능력을 자각할 수 있고, 비판의 내용 너머를 볼 수 있고, 비판적인 자아의 파괴적인 힘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자각의식과 높은 수준의 의식이 필요하다. 이런 자각의식을 진화시켜낼 때까지 우리는 늘 비판적인 자아의 제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P170

비판적인 자아의 에너지는 변화되어(의식된 후에) 자각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깨어 있는 에고로부터 명확히 구별될 때에만 진정한 협력자 역할을 할 수 있다. 비판적인 자아는 우리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우리가 어떤 분야의 일을 하든지 기량을 향상시키도록 도와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무의식의 영역에 대해 방심하지 않게 하여 외면당한 자아들을 알아차리게 하고, 우리가 관계의 덫에 걸려 있을 때 알려줄 수 있다. 비판적인 자아의 비난이 부정적 힘을 잃으면 비판적인 자아는 매우 효과적이고 분별력 있고 이성적인 친구가 될수 있다. - P176

우리의 삶에서 우리 안에 그토록 많은 분노를 야기하는 압정은무엇인가? 그것은 승낙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는 능력 혹은 무능력이다. 우리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적당히 승낙하고 적당히 거절하면서 살아간다면 분노가 치밀 일은 줄어들 것이다. - P193

우리 안의 사자는 포효하고 싶어하는데 그 대신 염소가 매에~ 하고 운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전도된 상황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대가는 다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대가는 우울증, 에너지와 열정의 상실, 커지는 무의식으로 경험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대가는 통제할 수 없고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될 수 있다. 이 동안에 재산과 직업과 결혼생활, 혹은 인생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대가는 질병이나 심지어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육체적 파산이다. - P197

젊었을 때 낸은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실 때마다 그녀의 외향적이고 질탕한 에너지가 표출되었다. 이는 음주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흔한 일이다. 외향적인 에너지가 차단되면 음주는 이 에너지를 배출하거나, 이 에너지가 외면될 때 쌓이는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주된 방법의 하나가 된다.
안타깝게도 낸은 술을 끊고 나자 모든 면에서 차분하고 냉정해져버렸다. 그녀의 표현적이고 관능적인 여러 에너지 패턴들과 함께 외향성도 외면되어버렸다. 본능은 그녀의 적이 되어 돌아섰다. 그 본능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한 가지 통로는 그녀의 비판적인 자아였다. 걷잡을 수 없이 파괴력을 키워가는 종양처럼 힘을 키워가는 자아 말이다. - P206

우리의 외면당한 악마적 패턴들을 대면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자아들의 에너지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나병환자들이 일반사회에서 배척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가능한 한 그들을 피하려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가 무시한 자아들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얼마나 쉽고도 어려운 일인가. 만약 우리가 그들을 대면하고 귀 기울일 준비를 하여 그들을 우리 삶 속으로 안아 들일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을 찾아 나서기만 한다면, 황금 같은 기회들이 사뭇 규칙적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 P211

수잔느의 다음 연애는 상처입기 쉬운 아이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됐다. 그녀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관계였다. 수잔느는 자신의 감정과 반응을 즉각적으로 이야기하고 새로운 파트너와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주 ‘작은‘ 상처와 두려움도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말로 표현했고, 남자도 그렇게 했다. 두 사람 모두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속 깊은 나눔을 경험했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수잔느는 배움이 빠른 단호한 여성이었고 그녀의 용기는 그녀의 파트너에게도 동등한 친밀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들은 위험을 감수할 때마다 서로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복잡한 인간성을 함께 탐사하는 일에 대해 점점 덜 두려워하게 되고 갈수록 점점 더 용감해졌다. 그것은 늘 쉽거나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처입기 쉬운 아이들이 준 정보를 가지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고, 달콤한 에너지의 교환(서로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신뢰할 때 두사람 사이에서 진동하는 따뜻하고 활기 넘치는 에너지)을 지켜갈 수 있었다.
한 가지 경고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영원히 완벽할 수는 없다.
깨어 있는 에고의 통제를 넘어서는 상황들은 때때로 상처입기 쉬운 아이가 관계에서 물러서게 만든다. 하지만 일단 이 따뜻함을 경험하고 나면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게 되고, 그것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 위해 불가피한 불편은 기꺼이 감수한다. - P223

로라는 전능한 목소리와 동일시하기를 멈추고(더 이상 전능한 목소리가 달콤한 말로 그녀를 유혹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겁먹은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아이의 걱정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깨어 있는 에고는 겁먹은 아이에게 부모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숙제를 했다. 자신이 알아야 할 사실들을 배워서 겁먹은 아이가 더 이상 그녀의 준비부족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취약성과 두려움을 삶과 일 속에 품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전능한 목소리에 의존하기를 그만뒀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전능한 목소리가 자신을 지지하고 인정할 때는 기분이 매우 좋지만, 그런 힘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진정한 힘은 그녀가 자신의 취약성을 품어 안은 이후에, 그녀의 자각의식과 깨어 있는 에고로부터 나왔다. 상품을 파는 그녀의 능력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감탄시키고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욕구보다는 자신의 일에 대한 그녀의 헌신과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이런 변화를 느낄 수 있고, 그에 따라 그녀를 더욱 지지해주고 현실적인 격려를 해줄 것이다. 로라는 마침내 자만심과 자기의심의 양극단으로부터 해방되었다. - P232

지금까지 논의된 많은 자아들을 되살펴보면, 그들이 대체로 권력과 취약성의 연속체상에서 반대극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권력의 극은 우리의 부모 측면이고 취약성의 극은 우리의 아이 측면이다. 우리의 에너지들은 이 양쪽 사이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 에너지의 전형적 움직임은 다음 그림과 같이 개념화할 수 있다.
이런 에너지 흐름은 대개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이것은 원형적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멈출 수는 없다. 이것이 균형 잡힌 에너지 시스템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통제력 부족과 취약성을 상징하는 아들/딸 측면은, 모든 면에서, 권력과 통제력을 상징하는 아버지/어머니 측면만큼이나 크다. 우리는 이 균형을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가 이 힘의 연속체의 한쪽 끝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다른 한쪽 끝은 외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각수준이 높아져가면 에너지의 원형적 운동과 이 균형을 더욱 확연히 자각하게 된다. 깨어 있는 에고는 이런 에너지들이 우리 내면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통제하고 선택할 수단을 갖추기 시작한다. - P266

이 책의 초판을 쓴 이래로, 우리는 비인격적 자아와의 작업을 갈수록 더 강조해왔다. 우리는 외면당한 비인격적 에너지를 되찾으면 힘이 커지고 자신을 보호하는 자연스러운 능력이 크게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 여성들에게 특히 그러했다. 비인격적 에너지를 표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심리적 경계를 정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승인이 있든 없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고, 적대적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수 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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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클리닝은 한마디로 세상을 떠날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남기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치울 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 치워줬으면 좋겠는가? 기억하라. 사랑하는 이들은 당신이 남길 물건 중 몇 가지는 물려받고 싶겠지만 전부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선택을 쉽게 만들어 주자는 말이다. - P11

"빈손으로 가지 마세요 Gá inte tomhánt!"
벽에 걸린 작품을 떼어 가져가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낮이 저물고 밤도 되어가니 다들 테이블 정리에 조금씩 손을 보태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어디로든 움직일 거라면 무엇이든 들고 갈 수 있지 않은가. 비르짓타의 부탁은 간결하면서도 다정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녀는 자기 인턴들과 예술가들은 물론 볼보 Volvo의 최고경영자나 예테보리 예술 박물관 관장에게까지 가리지 않고 그 말을 했다. 누구나 그 부탁을 받았고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다. 모두 조금씩 손을 보탰다.
비르짓타의 다정한 한마디가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 본 나는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이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곧 그 규칙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이는 당연히 저녁을 먹고 식탁을 치울 때에만 적용되지는 않았다.
빈손으로 떠나지 않기 규칙은 어떤 상황에도 적용될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침실 바닥에 빨랫감이 떨어져 있는데 빈손으로 세탁 바구니를 지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빨랫감은 계속 불어날 것이다. 그러니 빈손으로 움직이지 말라.
외출할 때는 쓰레기를 가지고 나가라. 빈손으로 움직이지 말라. 집에 돌아올 때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우편물을 꺼내라! 빈손으로 움직이지 말라.
또 다른 친구 마리아에게는 집 안 물건들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바로 집에 새 물건이 하나 들어오면 헌 물건 하나를 내보내는 것이다. 나눔이든 기부든 판매든 재활용이든. 타협은 없다. 처음 시작은 단순히 책뿐이었다. 책 한 권을 사면 한 권을 처분했다. 그런데 효과가 좋은 것 같아서 옷과 신발, 화장품, 보디로션, 스카프, 샴푸, 아스피린에도 이를 적용했다. 심지어 음식에도!
그래서 요즘 마리아의 부엌은 옷장이나 책장, 화장실만큼 잘 정돈되어 있다. 어디에도 분류하고 정리해야 할 물건들이 쌓여 있지 않았다. 자리만 차지하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물건은 없었다. 가끔은 새 물건을 들이지 않고 있던 걸 처분하기도 했다. 우리 모두 본받아야 할 점이다.
생각해 보면 볼수록 비르짓타의 한마디는 삶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구를 떠날 때 다른 사람이 대신 치워야 할 쓰레기 더미를 그냥두고 가지 말자. - P62

남편이 떠난 후 내 삶은 무척 공허하고 쓸쓸해졌다. 그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50년 가까이 부부로 지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일을 함께 헤쳐 왔고 수없이 함께 울고 웃었다. 서로의 경험을 공유했고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었다. 나는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남편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그가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지 잘 알고 있다.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라스라면 어떻게했을까? 그가 너무 그립지만 한편으로 그가 늘 나와 함께 있다고 느낀다. 심지어 가끔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나는 두 사람 몫을 한꺼번에 살고 있다. 우리가 했던 생각들, 우리가 누렸던 즐거움, 우리가 해결했던 모든 문제들응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나만의 보물이다. - P75

당신은 주변의 젊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바로 당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말인데 정말 맞는 말이다.
무릎이 아프다고 또 징징대지 말라. 자주 전화하지 않는다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 마라.
그저 질문하라. 그리고 들어라. 관심이 없더라도 있는 척 해라.
배부르게 먹이고, 가서 삶을 즐기라고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계속 전화하고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당신이 있는 곳을 좋은 곳으로 여길 것이다. 당신이 그들의 부모보다 내어줄 시간이 많다면 특히 더. - P121

나이가 들어갈수록 ‘노‘라고 말하기 직전에 과감히 ‘예스‘라고 대답했던 모든 순간을 더 확실히 기억하게 된다. 물론 나도 늘 열린 마음이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마음을 좀 더 열 걸 그랬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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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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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는 수수께끼를 보여줄 뿐,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저자의 말이 묵직하다. 이 말은 뉴스가 무의미한 매체라는 뜻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끝까지 추적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뉴스의 제작자와 소비자 모두의 몫이라는이야기일 것이다. 뉴스는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넘어 ‘그다음‘을 이야기하길 바란다.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 P5

왜 우리가 ‘타자의 고통‘에 섣불리 공감하기보다 고통을 겪는 타자의 공간에 침범하는 걸 더 조심해야 하는지, 왜 우리의 얄팍한 이해력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할 때‘가 아니라 ‘다 아는 척할 때‘ 더 나빠지는지. - P6

어떤 고통을 보여줄 수 없는지에 대한 논쟁 밑으로는, 고통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뿌리 깊게 흐르고 있다. 그 어둑한 욕망은 뉴스 산업 전반에 지하수처럼 깔려있다. 사건 당시의 화면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논리는, 기술이 발달해 얻을 수 있는 화면이 많아질수록 논의 없는 당위로서 단단해진다. - P14

한 가지 확실한 건 고통의 중개인이 미디어든 개인이든, 남의 고통을 궁금해하고 알아내는 일은 도움을 주고 해결해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정당화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했다는 죄의식은 대개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다. - P32

대상화를 무작정 멈추라는 말은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 말하기가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도울 기회를 알지도 못한 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이 구경이 될 수 있다는 걱정에 빠져서 고통을 보는 일 자체를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인간성 실패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의 눈은 움직일 수 있다. 자랑스럽지 않은 이유로 머물렀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곳으로 분명히 이동할 수 있다. 본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전달과 전달, 중개와 중개를 통해 유예되어 버린 행동의 가능성이 당신에게 있으니까.
그러므로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여력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움직이기를. 행동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시급한 진단의 효용과 오용을 잊지않은 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기를. 때로 대중이 활용하는 기술은 부당할 정도로 쉽게 공격받는다. 인터넷에서 간단히 볼수 있는 큰 단위의 숫자만으로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행동했다는 효능감을 느끼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좋아요‘와 ‘리트윗‘ 같은 대중화된 기술의 효과를 괄시하거나 폄하할 필요 역시없다.
인터넷에서 펼쳐지는 말의 향연은 당연히 충분치 않다. 그걸 알고 있으면 된다. 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 - P36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 P94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 P120

앞서 말했듯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 P136

전쟁 보도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보도에비유와 대조의 공식이 적용된다. 지난해, 지난달, 지난 분기와 비교하거나 다른 세대, 다른 성별, 다른 국가, 다른 지역, 다른 계급과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 가늠한다. 패턴을 찾아 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보도의 대상이 고통일 경우에는 특히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기 위해 거의 필수적이다 싶게 이러한 과정이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자주 불려나오는 기준은 역시 ‘나‘다. 뉴스의 수신자가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다. 고통의 당사자, 폭력의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는 구호는 매우 원초적인 불안을 건드리는면이 있다. 한동안 유행했던 내러티브 기사 쓰기 역시, 사건이 아닌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작성해 더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법이었다. 독자가 인물에 자신을 태운 채로 대리 체험을 해 결국 1인칭으로 마음을 포개도록 설계된 쓰기다.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나를 틀로 쓰자는 뉴스의 제안은, 얼마만큼 유효한 기획일까? 실제로 ‘나‘의 고통은 뼈저리게 생생하다.
남의 고통보다 훨씬 더. 이따금 끔찍한 사건을 취재하고 난 뒤에나나 가족이 피해자가 되어 같은 사건을 겪는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럴 때면 식은땀이 범벅이 된 채로 깨어나 몸서리를 쳤다. 취재를 하며 피해자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던 순간보다 꿈에서 스스로 피해자가 된 순간이 훨씬 고통스럽게 여겨졌다는 점이 끔찍했다. 가짜 고통, 가짜 겪음일지라도 내 몸을 통과하니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여겨진다는 게 괴물 같았다. - P146

그러나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한 연민은, 자꾸만 나에게로, 나라는 좁은 둘레로, 가족으로, 우리 민족으로, 우리 인종으로, 우리 계층으로, 우리나라라는 비좁은 단위로 파고들어 그 바깥을 바라볼수 없도록 우리의 이성을 빨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생산하는 뉴스, 그리고 우리에게 도달하는 뉴스는 나/우리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일 수 있을까?
나와 닮은 것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발휘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세상에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닮은 것에 대한 반응은 나쁜가? 그게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져 무리 생활을 해나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낫지 않은가? 무엇에서 촉발되었건 불완전한 사회가 대중적 감정이 뿜어내는 힘을 기반으로 무거운 몸을 조금씩 들썩이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어쨌든 괜찮은 걸까? 약간 비뚤어진 듯하면서도 타인에게 공명하는 감정이기에 이타적인 구석이 있는, 각자와 닮은 것에 한정된 연민을 연료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재어본다. - P153

저항을 무효화하는 효과적인 방식은 억압된 자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저항이야말로 갈등의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교묘하게 맥락을 지우는 일이다. 언론은 갈등 상황을 ‘화해‘가 필요하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며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쪽도 힘들고 저쪽도 힘들다고 나열하며 사안의 무게를 재려하지 않고 등가로 기록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의 효용은 매우 분명하다. 구조적인 오류를 수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다. 억압의 맥락을 자른 보도는 억압을 재생산하고 기존 질서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곤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맥락을 제거한 채 화해를 강요하는 일이아니라, 지워진 맥락을 복구하는 작업이다. 또한 김지수 기자가말했듯 "갈등의 맥락을 재배치해 더 나은 언어를 설계"하는 일이다. 갈등이 있다고 외치기보다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묻고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젠더 갈등‘을 유일한 문제로 지목하지 않고, 현실에서 살아가는청년들이 피부로 겪고 있는 진짜 문제가 지워지지 않도록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그들의 문제를 그들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줘야 한다. - P206

"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은 종군기자 마리 콜빈Marie Colvin의 말이다. 그 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짤막한 소식의 파편들을 들고 한계가 분명히 보이는데도 이걸 왜 만들어내고있는 걸까 곰곰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보다 오히려 더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건 ‘반응의 자유‘ 쪽이다.
한 고통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크게 흔드는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크게 감응할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민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타인의 고통에 질려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분노한 나머지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무엇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행동은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행동이라고 해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
각자의 시선이란 잔인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우리의 망막에 고인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한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던져 놓은 신문뭉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건을 만들듯이, 시야 어딘가에 머무르다 펼쳐보게 될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되도록 조금 더 천천히, 더 담담한 뉴스를 만드는 건 어떤가. 빨리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반드시 변화를 약속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한 지 오래이니, 오래 걸리더라도 있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알려야 할 것을 균형 있게 생산해 내는 매체로 머무는 건 어떤가.
그러고 보면 역사가 늘 전진하고 진보한다는 세계관을 더 이상믿을 수 없게 된 세상 아닌가. 연민이라는 감정 하나로는 세상이바뀌지 않는다는 걸, 행동을 촉발한다고 해도 완벽할 수 없다는걸 떠올리다 보면 생산자는 최대한 감정을 자극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고, 소비자는 마음을 온전히 포개는 데 또 실패했다는 패배감을 덜 느낀 채로 뉴스를 생산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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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 - 살면서 늙는 곳, 요리아이 노인홈 이야기
가노코 히로후미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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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는 한가할 틈이 없다. - P62

진정한 안도감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안도감은 결국 지불한 금액만큼만 손에 쥐는 등가교환의 상품권이다. 멋지고 화려한 팸플릿에 쓰여 있는 희망에 찬 문구는 진정한 희망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멋지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맡길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 P77

어쨌든 눈독을 들였던 땅은 손에 넣었다. 특별 노인요양시설을 건축하는 데 얼마나 큰 돈이 들어갈지는 현재로서는전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액수가 얼마이건 우리는 해낼수 있다. 우리 손으로 우리 길을 개척할 수 있다. 근거 따위는 없다. 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결의가 있을 뿐이다. 무모하다면 무모할 수도 있다. 계획이 없다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전례가 없다거나 성공이 보장돼 있지 않기 때문에, 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새로운 일은 절대 시작할 수 없다. 새로운 일은 언제나 무모하고 계획조차 없는 상태에서, 전례가 없고 미래가 약속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탄생한다. 우리가 당시에 느끼던 ‘고양되는 느낌‘이나 ‘설렘‘은 바로 그런 데서 연유했을 것이다. - P86

‘자기 책임‘이라는 말이 ‘늙음‘이라는 불가항력의 영역에까지 미치게 된 이후, 사람들은 두려움에 젖어 노화 예방과 치매 예방에 모든 신경을 쏟게 되었다. 특별한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늙어서 서서히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사치라고 불러야 할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어쨌든 국가는 생존권에 귀속되는 간병 문제를 서비스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민간에 위탁하여 해결하는 길을 선택했다. 결국 간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부동산 회사나 건축 회사, 이자카야 체인점까지 간병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옵션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진행될테고 향후 간병 업계에서는 그런 방식을 기준으로 삼게 될 것이다. 즉 모든 수고를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서비스 제공 시스템인 것이다. - P207

시설로서 어떤 형식을 갖추어야 하느냐, 이런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건축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시설다운 시설‘이 아니라 ‘아무리 보아도 시설로 보이지 않는 시설‘을 만들고 싶었다. 관리와 감독에서 자유로우며 지배나 속박과는 거리가 먼 시설. - P217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참견이겠지만) 말하고 싶다.
유토피아를 찾아봐야 의미가 없다고.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없으면 다른 데에도 없다. 여기저기 들락거리며 웃물만 맛보고 세상이 넓어졌다거나 깊어졌다거나 혹은 실망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얕은 바다에 떠서 돌아다니기만 하는 행위와 같다. 늘 자기 마음에 드는 경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일종의 자기 찾기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바다에는 심해어가 있는 세계도 있다. 그것을 알려면 하나의 바다 속으로 깊이 더 깊이 잠수해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세상은 깊이가 있어 재미있는 법이다. - P235

‘요리아이‘는 간병을 지역사회의 몫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 늙어서도 익숙한 장소에서 살려면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연결하고 낯익은 사람을 늘림으로써 ‘어려울 때는 서로 돕는‘ 안전망을 만들어두려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 번 무너져버린 ‘이웃 간 교제‘는 원래 형태로 되돌릴 수 없고 비슷하게나마 되살리려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반대로,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을 어딘가로 몰아내기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전화 한 통, 상담 한 번으로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 움직여서 처리해준다. 그야말로 인스턴트, 그야말로 편의적 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동원해 안도감을 얻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안도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이 반대 입장에 놓이는 순간 불안해지는 ’잠정적인 안도감‘에 지나지 않는다. 인과응보다. 다른 사람에게 한 짓은 반드시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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