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서곡>에서 천사들은 우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쓰인 것이 까마득한 오래전인데,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는 시각입니다!), 튀어나온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온갖 "거름더미에 코를 처박고" 천상의 빛인 이성을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데나 쓰는 인간의 가엾은 꼴을 한없이 비아냥거립니다. 듣다 못한 주님이 "너 파우스트를 아느냐?"라고 물으시니 메피스토펠레스는 "아 그 박사요?!" 하고 냉큼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런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주님은 "내 종이니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좀 더 부연하시는 말씀이 바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해보라 하시며 메피스토의 손에 파우스트를 맡깁니다. 이로써 방황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그런 큰 그림이 주제로서 제시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주문이나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는 설명문이나 잘 살펴보면 둘 다 비문입니다. 지향이 있다는 것은 갈 곳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있는 한 방황한다니. 갈 곳이 있기에 길을 잃는다니. 그러나 이 비문의 함의가 참 큽니다. 뒤집어보면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곧 갈 곳이, 목표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황이 바로, 목표가 있고 지향이 있기 때문이라니!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방황해도 괜찮아. 다 가고싶은 마음이 있으니 언젠가 어디인가에 닿아. 그런 쉬운 말보다, 말이 될 듯 말 듯한 이 위로가 주는 여운이 큽니다. 참으로 정교한 비문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이 부연의 문장에서는 비문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저 나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선함이 있을 수 있고,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혀 있어도 그 선의 알맹이가 있기에 그에게는 바른 길의 의식도 선연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해하라, 용서하자가 아닙니다. 이 비문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참으로 큰 포용의 메시지입니다. 이 얼마나 잊히지 않는 커다란 껴안음인지요. - P15
자신을 빚어나가는 일을 할 사람은, 자기밖에는 세상에 그 누구도 달리 없습니다. - P26
내가 받은 유산 얼마나 찬란하고 얼마나 넓디넓은지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 - P43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초조, 더더욱 쓸모없는 건 후회 초조는 있는 죄를 늘이고 후회는 새 죄를 만들어낸다 - P47
뒤처진 새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가로지를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 P58
라바터를 만나서 그 곁에서 행복합니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치유예요. 사랑 안에 깃들어 살고 지향이 있는 사람, 활동하면서 그 가운데서 즐기기도 하는 사람이기 위해서요.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의를 기울여 친구들을 감당하고, 먹이고, 인도하고,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요. 한 석 달만 이분 곁에서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 P67
괴테는 그만한 열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림‘이 쉬웠겠습니까. 청년 괴테는, 그의 ‘열림‘이 어떠했는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조개들이 살을 껍질 밖으로 펼쳐낼 때 물에 뜨듯이, 그렇게 나는 사는 걸 배웁니다.
조개가 연한 살을 내미는 곳은 짠 바닷물입니다. 우리의 세상과의 만남은 연한 살이 소금물에 닿을 때처럼 아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하면서,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사고를 유연하게 열고 옮길 수 있는 힘, 그런 힘이 진정 큰 힘인 것 같습니다. - P71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 P101
수천 권의 책 속에서 진실로 혹은 우화로 그대에게 나타나는 것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바벨탑에 불과하다 사랑이 결합시켜주지 않으면 - P104
꿈의 실현같이 좋은 일에도 조금씩 쌓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어렵고 문제 많은 일들에서야 더욱더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조금씩 고쳐가고 쌓아가는 일에 우리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듯합니다. 뭐든 확 바꾸고 와장창 뜯어고칩니다. 확 바꾸면 있던 그 문제야 사라지지만, 대신 다른 문제가 무더기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도 문제 해결 방식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이즈음은, 그사이 쌓인 문제가 워낙 많은 터라 그렇지만, 마치 드디어 꿈을 실현할 때라는 듯 여기저기에서 때로는 무리해 보이는 청사진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집이야말로 조금씩, 최소한 몇십 년은 내다보며, 올바른 생각과 수단을 통해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꿈도, 집도 금방 폐가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 P114
세상의 문제가 회피해서 해결될 리 없습니다. 정면으로 대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답이 찾아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문제에 원천적으로 답은 없습니다. 답이 있고 해결책이 쉬이 있으면 그게 문제이겠습니까. 얼른 답을 내려고 답을 내어 그것을 벗어나려고 모두 노력하지만, 때로는 발버둥을 치지만, 쉽게 찾아진 답은 장기적으로 계속 답이 되기 어렵고 그래서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의 전모를 바르게 파악하면, 기이하게도 생겨나는, 문제를 감당해가는 힘. 그 힘이, 답은 없지만 그중 답의 근사치일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모색이 이루어지며, 그 길에서 쌓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슬기가 생기기도 하고, 문제 쪽에서 슬그머니 알아서 풀리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 P117
『서·동 시집』은 참 사연이 많은 책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38년간 도서관 감독을 하며 온갖 책을 많이 읽던 괴테의 손에, 1814년 여름 막 출간된14세기 페르시아 시인 하피스의 방대한 번역본이 들어왔습니다. 그 여름 괴테는 오래전에 떠났던 고향 프랑크푸르트를 찾아가는데, 고향의 지인이자 열렬한 독자인 은행가 빌레머 씨 댁에 묵게 됩니다. 빌레머 씨는 딸의 이름의 스펠링을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등장인물과 같게 고칠 만큼 괴테의 열성 독자인 동시에 오랜 지인이었지요. 마침 65세 생일을 그 집에서 보냈고, 다음해에 한번 더 잠깐 찾아갔습니다. 빌레머 씨에게는, 자기 딸과 함께 친구도 하며 교육도 받게 한 양녀 마리아네가 있었습니다. 유랑극단에서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데려온 여배우의 딸이었는데,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 괴테가 그 집에 머물 때 이 영리한 아가씨는 괴테가 읽는 두꺼운 하피스 시집을 속속들이 함께 읽어,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급기야는 하피스 시집의 쪽수, 행수만을 적은 쪽지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게 되지요. 시인이 아니던 마리아네도 자기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시구를 찾아 두꺼운 책을 읽고 또 읽다보니 자꾸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 괴테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를 찾았을 때는, 양녀인 마리아네가 이미 빌레머 씨의 아내가 되어 있었지요. 괴테와 마리아네가 함께한 독서는 노년의 괴테에게서 다시 시인의 감성을 활짝 열었고 마리아네에게서는 없던 시인이 깨어났습니다. 이때 쏟아져나온 시들이으로 묶이게 되는데, 그 중심이 <라이카의 서>이고 줄라이카라는 이름 뒤에는 마리아네가 있습니다. 사실 <서·동시집> 안에는 마리아네의 시도 몇 편 들어가 있습니다. 별도의 표시가 없는 이 시들 중 두 편을 괴테의 충직한 비서 에커만이, 그 많은 시들 중에서 가장 좋은 시로 꼽기도 했지요. 바로 그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들이 <동풍시>와 <서풍시>입니다. 앞서 인용한 구절이 바로 제목이 없는, 속칭 <서풍시>의 일부지요. 즉, 괴테의 시가 아니라 마리아네의 시입니다. 감성적, 시적 교류가 있었으나 사회적 거리와 정중함을 두 사람은, 특히 괴테는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그집을 떠나고 나서는(그가 그 집을 떠날 때 하이델베르크까지 전송을 온 내외를 잠깐 만나고는, 죽을 때까지 마리아네를 다시 만난 적이 없습니다. 「동풍시」는 마리아네가 그렇게 마지막으로 괴테를 만나러 하이델베르크로 갈 때 쓴 것이고, 「서풍시」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돌아오며, 또 돌아와서 쓴 것입니다. 괴테는 편지조차도, 빌레머 씨나 그 딸에게 보내어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했을 뿐 직접 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건만 마리아네가 괴테에게 보낸 편지들은, 긴 세월을 고이 간직했다가 임종을 1년 앞두고 정성스레 묶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묶음에는 이런 쪽지가 덧붙여졌습니다.
사랑스럽던 이의 눈 앞으로 이걸 썼던 손길에게로- 언젠가 뜨거운 갈망으로 기다리고 받던 것 그것들이 솟구쳤던 가슴에 이 종이들은 돌아가거라. 늘 사랑에 가득차 거기 있던 것,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의 증인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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