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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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는 수수께끼를 보여줄 뿐,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저자의 말이 묵직하다. 이 말은 뉴스가 무의미한 매체라는 뜻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끝까지 추적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뉴스의 제작자와 소비자 모두의 몫이라는이야기일 것이다. 뉴스는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넘어 ‘그다음‘을 이야기하길 바란다.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 P5

왜 우리가 ‘타자의 고통‘에 섣불리 공감하기보다 고통을 겪는 타자의 공간에 침범하는 걸 더 조심해야 하는지, 왜 우리의 얄팍한 이해력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할 때‘가 아니라 ‘다 아는 척할 때‘ 더 나빠지는지. - P6

어떤 고통을 보여줄 수 없는지에 대한 논쟁 밑으로는, 고통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뿌리 깊게 흐르고 있다. 그 어둑한 욕망은 뉴스 산업 전반에 지하수처럼 깔려있다. 사건 당시의 화면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논리는, 기술이 발달해 얻을 수 있는 화면이 많아질수록 논의 없는 당위로서 단단해진다. - P14

한 가지 확실한 건 고통의 중개인이 미디어든 개인이든, 남의 고통을 궁금해하고 알아내는 일은 도움을 주고 해결해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정당화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했다는 죄의식은 대개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다. - P32

대상화를 무작정 멈추라는 말은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 말하기가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도울 기회를 알지도 못한 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이 구경이 될 수 있다는 걱정에 빠져서 고통을 보는 일 자체를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인간성 실패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의 눈은 움직일 수 있다. 자랑스럽지 않은 이유로 머물렀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곳으로 분명히 이동할 수 있다. 본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전달과 전달, 중개와 중개를 통해 유예되어 버린 행동의 가능성이 당신에게 있으니까.
그러므로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여력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움직이기를. 행동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시급한 진단의 효용과 오용을 잊지않은 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기를. 때로 대중이 활용하는 기술은 부당할 정도로 쉽게 공격받는다. 인터넷에서 간단히 볼수 있는 큰 단위의 숫자만으로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경험하고 행동했다는 효능감을 느끼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좋아요‘와 ‘리트윗‘ 같은 대중화된 기술의 효과를 괄시하거나 폄하할 필요 역시없다.
인터넷에서 펼쳐지는 말의 향연은 당연히 충분치 않다. 그걸 알고 있으면 된다. 비평가 존 버거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 - P36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 - P94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 - P120

앞서 말했듯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 P136

전쟁 보도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보도에비유와 대조의 공식이 적용된다. 지난해, 지난달, 지난 분기와 비교하거나 다른 세대, 다른 성별, 다른 국가, 다른 지역, 다른 계급과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 가늠한다. 패턴을 찾아 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보도의 대상이 고통일 경우에는 특히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기 위해 거의 필수적이다 싶게 이러한 과정이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자주 불려나오는 기준은 역시 ‘나‘다. 뉴스의 수신자가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다. 고통의 당사자, 폭력의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는 구호는 매우 원초적인 불안을 건드리는면이 있다. 한동안 유행했던 내러티브 기사 쓰기 역시, 사건이 아닌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작성해 더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법이었다. 독자가 인물에 자신을 태운 채로 대리 체험을 해 결국 1인칭으로 마음을 포개도록 설계된 쓰기다.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나를 틀로 쓰자는 뉴스의 제안은, 얼마만큼 유효한 기획일까? 실제로 ‘나‘의 고통은 뼈저리게 생생하다.
남의 고통보다 훨씬 더. 이따금 끔찍한 사건을 취재하고 난 뒤에나나 가족이 피해자가 되어 같은 사건을 겪는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럴 때면 식은땀이 범벅이 된 채로 깨어나 몸서리를 쳤다. 취재를 하며 피해자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던 순간보다 꿈에서 스스로 피해자가 된 순간이 훨씬 고통스럽게 여겨졌다는 점이 끔찍했다. 가짜 고통, 가짜 겪음일지라도 내 몸을 통과하니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여겨진다는 게 괴물 같았다. - P146

그러나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한 연민은, 자꾸만 나에게로, 나라는 좁은 둘레로, 가족으로, 우리 민족으로, 우리 인종으로, 우리 계층으로, 우리나라라는 비좁은 단위로 파고들어 그 바깥을 바라볼수 없도록 우리의 이성을 빨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생산하는 뉴스, 그리고 우리에게 도달하는 뉴스는 나/우리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일 수 있을까?
나와 닮은 것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발휘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세상에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닮은 것에 대한 반응은 나쁜가? 그게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져 무리 생활을 해나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히 낫지 않은가? 무엇에서 촉발되었건 불완전한 사회가 대중적 감정이 뿜어내는 힘을 기반으로 무거운 몸을 조금씩 들썩이며 어디론가 가게 된다면 어쨌든 괜찮은 걸까? 약간 비뚤어진 듯하면서도 타인에게 공명하는 감정이기에 이타적인 구석이 있는, 각자와 닮은 것에 한정된 연민을 연료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재어본다. - P153

저항을 무효화하는 효과적인 방식은 억압된 자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 저항이야말로 갈등의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뒤집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교묘하게 맥락을 지우는 일이다. 언론은 갈등 상황을 ‘화해‘가 필요하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며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쪽도 힘들고 저쪽도 힘들다고 나열하며 사안의 무게를 재려하지 않고 등가로 기록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의 효용은 매우 분명하다. 구조적인 오류를 수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다. 억압의 맥락을 자른 보도는 억압을 재생산하고 기존 질서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곤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맥락을 제거한 채 화해를 강요하는 일이아니라, 지워진 맥락을 복구하는 작업이다. 또한 김지수 기자가말했듯 "갈등의 맥락을 재배치해 더 나은 언어를 설계"하는 일이다. 갈등이 있다고 외치기보다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묻고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젠더 갈등‘을 유일한 문제로 지목하지 않고, 현실에서 살아가는청년들이 피부로 겪고 있는 진짜 문제가 지워지지 않도록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그들의 문제를 그들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줘야 한다. - P206

"진정으로 어려운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을 만큼 인간성에 대한 충분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결국 목숨까지 잃은 종군기자 마리 콜빈Marie Colvin의 말이다. 그 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짤막한 소식의 파편들을 들고 한계가 분명히 보이는데도 이걸 왜 만들어내고있는 걸까 곰곰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보다 오히려 더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건 ‘반응의 자유‘ 쪽이다.
한 고통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크게 흔드는 이미지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크게 감응할 수도 있고,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민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타인의 고통에 질려 눈을 돌릴 수도 있다. 분노한 나머지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낼 수도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무엇이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질 수도 있다. 행동은 절대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행동이라고 해일상을 살아가며 연민을 잊지 않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균형과 전환 사이에서 기이한 파열음이 나는 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라는 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반응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 자유를 지켜볼 수 있을지를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
각자의 시선이란 잔인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우리의 망막에 고인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한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던져 놓은 신문뭉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건을 만들듯이, 시야 어딘가에 머무르다 펼쳐보게 될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되도록 조금 더 천천히, 더 담담한 뉴스를 만드는 건 어떤가. 빨리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반드시 변화를 약속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한 지 오래이니, 오래 걸리더라도 있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알려야 할 것을 균형 있게 생산해 내는 매체로 머무는 건 어떤가.
그러고 보면 역사가 늘 전진하고 진보한다는 세계관을 더 이상믿을 수 없게 된 세상 아닌가. 연민이라는 감정 하나로는 세상이바뀌지 않는다는 걸, 행동을 촉발한다고 해도 완벽할 수 없다는걸 떠올리다 보면 생산자는 최대한 감정을 자극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고, 소비자는 마음을 온전히 포개는 데 또 실패했다는 패배감을 덜 느낀 채로 뉴스를 생산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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