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안도감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안도감은 결국 지불한 금액만큼만 손에 쥐는 등가교환의 상품권이다. 멋지고 화려한 팸플릿에 쓰여 있는 희망에 찬 문구는 진정한 희망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멋지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맡길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 P77
어쨌든 눈독을 들였던 땅은 손에 넣었다. 특별 노인요양시설을 건축하는 데 얼마나 큰 돈이 들어갈지는 현재로서는전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액수가 얼마이건 우리는 해낼수 있다. 우리 손으로 우리 길을 개척할 수 있다. 근거 따위는 없다. 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결의가 있을 뿐이다. 무모하다면 무모할 수도 있다. 계획이 없다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전례가 없다거나 성공이 보장돼 있지 않기 때문에, 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면 새로운 일은 절대 시작할 수 없다. 새로운 일은 언제나 무모하고 계획조차 없는 상태에서, 전례가 없고 미래가 약속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탄생한다. 우리가 당시에 느끼던 ‘고양되는 느낌‘이나 ‘설렘‘은 바로 그런 데서 연유했을 것이다. - P86
‘자기 책임‘이라는 말이 ‘늙음‘이라는 불가항력의 영역에까지 미치게 된 이후, 사람들은 두려움에 젖어 노화 예방과 치매 예방에 모든 신경을 쏟게 되었다. 특별한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늙어서 서서히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사치라고 불러야 할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어쨌든 국가는 생존권에 귀속되는 간병 문제를 서비스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민간에 위탁하여 해결하는 길을 선택했다. 결국 간병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부동산 회사나 건축 회사, 이자카야 체인점까지 간병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옵션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진행될테고 향후 간병 업계에서는 그런 방식을 기준으로 삼게 될 것이다. 즉 모든 수고를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서비스 제공 시스템인 것이다. - P207
시설로서 어떤 형식을 갖추어야 하느냐, 이런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건축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시설다운 시설‘이 아니라 ‘아무리 보아도 시설로 보이지 않는 시설‘을 만들고 싶었다. 관리와 감독에서 자유로우며 지배나 속박과는 거리가 먼 시설. - P217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참견이겠지만) 말하고 싶다. 유토피아를 찾아봐야 의미가 없다고.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없으면 다른 데에도 없다. 여기저기 들락거리며 웃물만 맛보고 세상이 넓어졌다거나 깊어졌다거나 혹은 실망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얕은 바다에 떠서 돌아다니기만 하는 행위와 같다. 늘 자기 마음에 드는 경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일종의 자기 찾기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바다에는 심해어가 있는 세계도 있다. 그것을 알려면 하나의 바다 속으로 깊이 더 깊이 잠수해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세상은 깊이가 있어 재미있는 법이다. - P235
‘요리아이‘는 간병을 지역사회의 몫으로 돌리려 하고 있다. 늙어서도 익숙한 장소에서 살려면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연결하고 낯익은 사람을 늘림으로써 ‘어려울 때는 서로 돕는‘ 안전망을 만들어두려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 번 무너져버린 ‘이웃 간 교제‘는 원래 형태로 되돌릴 수 없고 비슷하게나마 되살리려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반대로,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을 어딘가로 몰아내기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전화 한 통, 상담 한 번으로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 움직여서 처리해준다. 그야말로 인스턴트, 그야말로 편의적 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을 동원해 안도감을 얻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안도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이 반대 입장에 놓이는 순간 불안해지는 ’잠정적인 안도감‘에 지나지 않는다. 인과응보다. 다른 사람에게 한 짓은 반드시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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