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것은 느려지는 것이고, 포기할 것이 차차 늘어나는 것이다. 포기는 자유의 이면이며, 느려지면 고속이 놓쳤던 다른 것들을 얻는다. 늙음으로 인해 신체와 정신 능력이 차차 하강하는 것을 수긍하면서, 필요에 따라 전략적 대응을 한다. 떨어지는 기능에 연연하지 않고, 필요와 욕망과 일상의 폭을 좁히며 산다. 지식과 정보가 철철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나이로 인해 이해력과 기억력은 점점 떨어지니, 집중할 것과 대강 흐름만이라도 파악할 것을 취사선택하고 나머지는 이번 생에서는 포기한다. 필요와 욕망과 일상의 폭을 좁히고 갈 곳과 만날 사람을 줄이는 일은 왜 사는가?‘ ’무엇으로 인해 행복한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더 밀착하며 사는 것이다. 자급하며 소신과 실천을 나누는 단출한 삶이 예나 지금이나 나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한다. 살아가다보면 나이와 늙음이 제 나름의 속도로 올 테고, 질병과 장애가 나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그 끝에서 죽음을 만날 테고, 그 이후는 내 일이 아니다. 죽음 이후는 차치하고, 이승의 남은 삶도 궁금하지 않다. 오는 대로 살 작정만 한다. 늙음을 불호를 넘어 두려워하고들 있다. 두려움의 뒷면은 혐오다. 대체로 혐오의 이유는 낯섦이지만, 늙음은 널려 있으니 낯설 것도 없다. 늙음에 대한 두려움은 실체앖이 흉흉하게 떠도는 소문일 뿐이다. - P259
나보다 상당히 나이가 적은 사람들의 글이 현재의 내게 깨달음이나 사고의 전환을 만들어줄 때가 잦다. 혹은 새롭기는 하지만 내 사고나 삶이 전환되지는 않는, 말하자면 몸이나 사고의 익숙함을 깨뜨리지는 못하는 경우들도 있다. 시대와 문화와 습이 모두 관계하는 문제다. 이럴 경우 우선은 상대의 문제인지 내 문제인지 그 사이 무엇 때문인지를 판단하지 않고, 지금 그와 나는 다르다 정도로만 정리해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다시 들여다보려 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글을 통해서는 깨달음이나 사고의 전환보다는 경륜과 나와 다른 여지 혹은 내게 미지/미경험인 것들에 대한 그들의 느낌이나 생각을 알아두고 최대한 열린 태도를 만들어두려 한다. 그러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는 시선의 풍부함을 얻고,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에게서는 관점의 전환을 자극받는 편이다. 당장 배운다기보다는 그냥 알아두고 열어두는 거다. 배움이란 내가 직접 접촉하거나 겪어내지 않고는 얻기 어렵다. ‘접’이 중요하지만 ‘촉‘이 있어야 오래 함께한다. ‘촉‘은 문득 오는 설렘에서 시작은 하지만, 대체로 불확실하다. 그 불확실함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모호한 무언가가 계속 나를 붙든다. 그래서 하염없이 하게 한다. 필요하다면 희망도 없이. ‘몸소는 나의 한계일 수 있지만, 나의 방식이다. - P267
애도의 진정한 의미은 죽은 이의 삶과 죽음의 긍과 주가 후대에게 기억되고 재해석되고 논란되어, 후대가 그 죽음을 제대로 밟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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