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상대가 충분한 돌봄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자본이 숨통을 조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풍요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 P11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를 고립시키고, 그의 생활 세계를 사유화하고, 그의 거주지와 계급과 법적 정체성을 임의로 지정하고, 친밀하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의 영역을 철저히 제한하는 사회적 기술을 승인하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 P11
결국 모두가 패자다. 가족은 자본축적을 제외한 다른 모든 목적에는 비참할 정도로 부합하지 못하므로.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닐 때가 많다. 그냥 별것도 아닌 데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으로 가족은 이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강간과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다. 당신에게 날강도짓을하고, 당신을 괴롭히고, 갈취하고, 조종하고, 구타하고, 원치 않는 접촉을 할 가능성은 그 누구보다 가족이 더 크다. 논리적으로, "당신을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많은 항공사, 레스토랑, 은행, 소매점, 직장에서 그러하듯이)은 소름 끼치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대신 누군가에게 은유적으로 "가족"이 된다는 건 그사람에게 상당히 가족답지 않은 무언가 말하자면 수용, 연대, 기꺼이 돕겠다는 약속, 환대, 돌봄이 있다는걸 믿게 만드는 일이다. - P22
르 귄은 사실 톨스토이의 말을 뒤집은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가정에서" 성장한 르 귄은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어떤 가족이 행복하다고 묘사하는 건 현실을 얕보는 참을 수 없는 잘못"임을 지적한다. 르 귄에게 "행복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바로 행복의 본질, 즉 (특히 자본주의하에서는) 무지막지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무관심함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한가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가족이 누리는 행복의 토대에 "희생과 억압, 억제, 무언가를 포기하고 내린 선택, 잃거나 잡은 기회, 크고 작은 해악의 균형 잡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부구조"가 존재함을 망각한 것이다. "눈물, 두려움, 편두통, 부정의, 검열, 말다툼, 거짓말, 분노, 잔인함"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가족은 행복할 수 있다고 르 귄은 말한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농담 같은 걸 던질 때는 말이다. 그게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러니까 한 주, 한 달, 뭐 그보다 더 길게"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P26
하지만 모든 유토피아가 그렇듯이 그 세상 역시 이미 현재에 깃들어있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해방적이고 (사유재산에 반한다는 의미로서) 퀴어적인 돌봄 양식을 개발하고자 애쓰는 모든 구석구석에서 성긴 움을 틔우고 있다. (‘퀴어‘라는 단어에서 공산주의적인 의미는 상당 부분 지워졌지만, 여기저기서, 또 내 마음속에서 분명 ‘퀴어‘는 여전히 가족 폐지론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재생산 제도-결혼, 사유재산, 가부장제, 경찰, 학교-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퀴어적이게도, 최고의 돌봄 제공자들은 이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아이들, 연로한 친척,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재산 사랑"이라고 부른 소유적 사랑 pos-sessive love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동지적인 어머니 역할 수행자들은 민간에 내맡겨진 돌봄에 반기를 든다. 따라서, 어쩌면,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행복의 생산은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가망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직 재산 사랑이 폐지된 뒤에야 우리는 새로운 사랑, 혁명적인 사랑, 붉은 사랑을 창조하기 시작할 수 있다." - P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