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폐지하라 -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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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타이는 여기서 말한 "일하는 여성들"에게 장엄한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는 "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협소하고 배타적인 애정은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가정의 모든 아이에게 확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요컨대 붉은 사랑, "사회적 사랑: 숱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다수의 사랑"이라는 지구적 차원의 반란을 미래 비전으로 제시한 것이다. - P93

전설적인 출판물 《성적으로 해방된 한 여성공산주의자의 전기 Autobiography of a Sexually Emancipat-ed Communist Woman》(1926)에서 밝히듯 섹스를 출산에서 독립시키고, 여성과 남성의 임금을 동일하게 만들고, 무료 탁아소를 세우고, 가족을 폐지하자는 콜론타이의 의제에 대한 당의 지원은 대단히 형편없었다. 특히 "모성과 육아를 국가가 전담하게 하려는 나의 노력은 … 광적인 공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론타이는 프롤레타리아트 재생산 해방정치-이네사 아르망과 클라라 체트킨 같은 인물들 역시 지지한—를 레닌의 책상 위에 잠시나마 올리는 데 성공했다. 어쨌든 콜론타이는 핀란드를 백군에게 양도하기로 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비준한 데 대해 동지들이 좌익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항의하는 의미로 물러나기 전까지, 잠깐 동안은 첫 소비에트 정부의 인민사회복지 정치위원이었다. 콜론타이의 가장 이름난 업적은 1918년 아르망과 함께 제노텔Zhenotdel, 즉 당 여성부를 만들고 임신중단을 합법화한 것이었다. - P96

스스로를 미국여성해방운동의 개척자이자 이론가로 지칭했던 파이어스톤은 "인공두뇌 기반의 사회주의하에서 노동력 자체를 폐지"하고 "출산과 양육의 역할을 남녀를 아우르는 사회 전체에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계 포궁을 이용한 체외발생은 이 사변적인 그림의 일부로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파이어스톤은 여성이 아이들과 자기 자신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로부터 해방시켜, 기술을 장악하고, 일터의 폭압을 일소하고, 노동(심지어는 가능한 선에서 재생산노동까지도)을 자동화하고, 근친상간의 금기를 떨치고, 놀이와 사랑과 섹슈얼리티가 아무런 구애 없이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102

파이어스톤은 자신보다 먼저 살았던 콜론타이보다도 훨씬 용감하게 "사랑을 타도하자" ㅡ그러니까 현존하는 사랑을ㅡ고 말하면서도, 이성애와 동성애를 넘어선 "건강한 트랜스 섹슈얼리티"가 오기를 열망했다. 그에 따르면 이 트랜스 섹슈얼리티는 사회 전반에 에로티시즘을 확산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탈바꿈할 것이다. 콜론타이처럼 파이어스톤은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한 더 나은 사랑, 붉은 사랑을 목표로 삼았다. - P109

슬로건은 이렇게 촉구했다. 전 연령의 여성이여, 당신의 임금을 걷으라! 가사노동을 위한 임금은 "모든 정부"에 "통보"했다. 이들은 여성이 만들어내는 모든 돈을 "완전히 그리고 소급해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가사노동을 위한 임금은 숱한 여성들이 자기 집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관점을 담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표현을 제시했다. "그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급노동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무급 육아, 노인 돌봄, 가사노동, 섹스, 감정노동, 아내 노릇이 사랑의 표현일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투사들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관계와 활동이 노동으로 전환되는 것만큼 우리 삶을 효과적으로 질식시키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서 문제는 자본주의하에서 사적인 가정을 돌보는 일은 종종 사랑하려는 욕구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숨통을 조이는 노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성 상사나 남편, 아빠 같은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은 돌봄노동자들이 가족 형태 속에서 맞닥뜨리는(그리고 그들이 가하는) 폭력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시사한다. 유급이든 무급이든 가정부와 어머니가 여전히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이 착취를 끝내기 위한 사전 단계이자, 나아가 콜론타이가 생각했던 새롭고 다른 형태의 사랑, 가족을 넘어선 사랑을 알아가기 위한 사전단계인 이유다. - P121

오브라이언에게 있어서 "샤를 푸리에는 유쾌하게 변태적인 공상과학 작가였고, 퀴어친화적인 미래의 코뮨을 상상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했다." 그는 푸리에에 대한 짤막한 글에서 1600명 규모의 팔랑스테르를, 런던 중심의 모임 ‘세상의 성난 노동자들‘이 2016년에 내놓은 "200~250명으로 이루어진 가정의 단위"에 대한 제안과 비교한다. 오브라이언은 성난 노동자들이 제안한 200명 정도의 규모가 "합리적이고 어쩌면 더 바람직하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200명은 작지 않은 크기의 아파트 건물 하나, 또는 학교나 다른 센터 하나를 중심에 놓고 모인 단독주택 여러 채, 또는 작은 아파트 건물로 이루어진 한 구역일 수 있다. 규모 있는 집단을 위한 조리의 흐름을 감안했을 때 공유 주방은 자연스러운 초기 크기를 결정할 것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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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폐지하라 -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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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가장 근원적인 특징은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 가둔다는 것이다. 이 인클로저 과정에는 모든 종류의 가족이 의도치 않게 참여한다. - P60

케이시 윅스가 말하듯 "핵가족 모델은 피억압 집단을 국가와 사회, 자본으로부터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가와 사회와 자본이 과거의 노예, 선주민, 밀려 들어오는 이민자, 그 빈약한 보호막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유산과 처방 때문에 주변화된 모든 사람에게 강요한 바로 그 백인, 식민 정착자,
부르주아, 이성애, 가부장적 제도이기도 하다." 가족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퍽 당연하게 부여잡는 방패막이다. 우리가 그 방패막이를 내려놓는 데 동의하지 못한다면, 아마 이 전쟁이 영원히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 P62

프랑스의 비단상이었던 샤를 푸리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가 종종 레모네이드 바다와 연결되는 이유를 제공한 인물이다(초기적인 기후생태학자이자 지구공학자였던 푸리에는 정말로 이런 예측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푸리에가 단일 가족 주거는 전 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가로막는 핵심 장애물 중 하나라고 지목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근본적인 통찰력은 유토피아적인 토지프로젝트 같은 국제운동에 영감을 주었는데, 여기에는 이른바 "주방 없는" 도시 - 개방된 공유 주방과 훌륭한 무료 식당이 갖춰진 근린 -를 지지하여 사적 주방이라는 여성 억압적인 규범을 폐지하고자 했던 이들이 포함된다. - P72

푸리에는 정확히 뭐라고 처방했을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는 보편기본소득, 시장에서 벗어나기, 비일처일부제, 훌륭한 음식, 모든 세대를 위한 다채로운 오락 같은 것이 있다. 모든 생활은 "팔랑지" 또는 "팔랑스테르"라고 하는 거대한 건물(1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 날씨가 안 좋을 때를 대비해 지붕 덮인 보행로가 있고, 최저선의 성적 쾌락이 보장된다. 모든 노동에서 사적인 성격은 완전히 사라진다(일은 모든 아동과 성인이 골고루 나눠 하며, 인간 성격에 확립된 "열정의 끌림 법칙"에 따라 조직된다). 이에 따라 노동은 리비도적인 예술 또는 흥겨운 놀이로 탈바꿈한다. 세심한 안목으로 조직된 정기적인 섹스 파티는 특별한 "요정들"이 주재한다. - P75

식민화 이전까지만해도(때로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선주민 부족들 대부분은 가부장제 형식을 거의 또는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을 공동으로 양육했고, 두 가지 이상의 젠더를 존중했으며, 성적 쾌락에 대해서는 느슨한 사회적 제한만을 두었고, 때로는 (수유 같은) 모성수행을 모든 젠더를 포괄하는 외교적으로 중요한 행위로 개념화했다.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투스피릿two-spirit* 젠더 주체성과 철학적 전통, 성적 자유에 대한 문화는 이원적인 젠더 구분에 반감을 가진 정착민들에게 4세기동안 영감과 배움을 제공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게이해방운동 공동체 전체가 선주민들의 "퀴어성"을 모방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스스로 남성 정체성과 여성 정체성 모두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을 말한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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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폐지하라 -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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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상대가 충분한 돌봄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자본이 숨통을 조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풍요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 P11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를 고립시키고, 그의 생활 세계를 사유화하고, 그의 거주지와 계급과 법적 정체성을 임의로 지정하고, 친밀하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의 영역을 철저히 제한하는 사회적 기술을 승인하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다. - P11

결국 모두가 패자다. 가족은 자본축적을 제외한 다른 모든 목적에는 비참할 정도로 부합하지 못하므로.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닐 때가 많다. 그냥 별것도 아닌 데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것일 뿐이다. 한편으로 가족은 이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강간과 가장 많은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다. 당신에게 날강도짓을하고, 당신을 괴롭히고, 갈취하고, 조종하고, 구타하고, 원치 않는 접촉을 할 가능성은 그 누구보다 가족이 더 크다. 논리적으로, "당신을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많은 항공사, 레스토랑, 은행, 소매점, 직장에서 그러하듯이)은 소름 끼치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대신 누군가에게 은유적으로 "가족"이 된다는 건 그사람에게 상당히 가족답지 않은 무언가 말하자면 수용, 연대, 기꺼이 돕겠다는 약속, 환대, 돌봄이 있다는걸 믿게 만드는 일이다. - P22

르 귄은 사실 톨스토이의 말을 뒤집은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가정에서" 성장한 르 귄은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어떤 가족이 행복하다고 묘사하는 건 현실을 얕보는 참을 수 없는 잘못"임을 지적한다. 르 귄에게 "행복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바로 행복의 본질, 즉 (특히 자본주의하에서는) 무지막지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무관심함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한가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은 가족이 누리는 행복의 토대에 "희생과 억압, 억제, 무언가를 포기하고 내린 선택, 잃거나 잡은 기회, 크고 작은 해악의 균형 잡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부구조"가 존재함을 망각한 것이다. "눈물, 두려움, 편두통, 부정의, 검열, 말다툼, 거짓말, 분노, 잔인함"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가족은 행복할 수 있다고 르 귄은 말한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농담 같은 걸 던질 때는 말이다. 그게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러니까 한 주, 한 달, 뭐 그보다 더 길게"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P26

하지만 모든 유토피아가 그렇듯이 그 세상 역시 이미 현재에 깃들어있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해방적이고 (사유재산에 반한다는 의미로서) 퀴어적인 돌봄 양식을 개발하고자 애쓰는 모든 구석구석에서 성긴 움을 틔우고 있다. (‘퀴어‘라는 단어에서 공산주의적인 의미는 상당 부분 지워졌지만, 여기저기서, 또 내 마음속에서 분명 ‘퀴어‘는 여전히 가족 폐지론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재생산 제도-결혼, 사유재산, 가부장제, 경찰, 학교-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퀴어적이게도, 최고의 돌봄 제공자들은 이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아이들, 연로한 친척,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재산 사랑"이라고 부른 소유적 사랑 pos-sessive love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동지적인 어머니 역할 수행자들은 민간에 내맡겨진 돌봄에 반기를 든다. 따라서, 어쩌면,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행복의 생산은 지금 같은 조건에서는 가망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직 재산 사랑이 폐지된 뒤에야 우리는 새로운 사랑, 혁명적인 사랑, 붉은 사랑을 창조하기 시작할 수 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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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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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가족은 상이한 생활조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왔다. 한국에서도 가족이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가령 지금의 한국은 과거보다 결혼을 적게 하고 이혼을 많이 한다. 이 사실을 두고 가족의 ‘위기‘나 ‘해체‘라고 묘사하는 것과, 가족의 ‘변화‘나 ‘다양성‘의 증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위기‘와 ‘해체‘ 담론은 특정 가족 형태를 ‘옳다‘고 전제한 진단이다. 이에 대해 윤홍식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족의 특정 형태의 변화를 가족의 해체로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변화했다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두 접근은 국가 정책적으로 중대한 차이를 낳는다. ‘위기’와 ‘해체’의 담론은 공포를 조장하고 과거로 회귀하게 만든다. 반면 ‘변화‘와 ‘다양성‘의 담론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여 새로운 제도를 만들게 한다. 전자는 기존의 가족질서에 맞추어 살도록 개인을 통제하고 압박하지만, 후자는 모든 사람의 가족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대안적 제도를 고안하도록 한다. - P188

2장에서 나눈 혼외출생자 이야기나 3장에서 나눈 ‘혼혈인‘, 한센인, 장애인 등의 이야기는, 부도덕하거나 열등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불행이 아니라, 가족각본이 만들어낸 불평등의 결과였다. 한부모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이주배경가족, 조손가족, 비혼가족, 동성커플가족, 트랜스젠더가족 등 모든 가족은 가족의 ‘위기‘나 ‘해체‘, 혹은 ‘붕괴‘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양식이다. 그런데 가족각본이 이러한 삶을 열등하고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하여 낙인을 새기고 차별을 정당화한다. 국가가 특정가족 형태를 ‘건강가정‘이라고 명명하며 ‘만들어내는‘ 이 불평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2022년의 대법원이 가족각본에 흠집을 내며 만들어낸균열이 특히 의미가 있다. 앞에 발췌한 결정문에서 보듯, 대법원은 헌법 제36조 제1항이 보장하는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의 권리임을 확인했다. 설령 가족관계에 변화가 있더라도 "이렇게 형성되는 부모자녀 관계와 가족질서 또한 전체 법질서 내에서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존엄하고 평등한 가족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모든 개인에게 인정되는 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불평등한 가족질서는 타당하지 않다. 누구나 다양한 모습으로 가족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하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 P191

장경섭은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 수준은 낮은 편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문 지출의 비중은 프랑스 31.6퍼센트, 독일 26.7퍼센트, 일본 24.9퍼센트, 스웨덴 23.7퍼센트, 영국 22.1퍼센트 등이고, OECD 평균이 21.1퍼센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은 GDP의 14.8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렇게 기업 역시 오랜 시간 돌봄의 책임을 피하며 이익을 누렸다. 돌봄을 ‘사적인‘ 가족의 문제로 분리시키고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의지한 결과, 기업은 돌봄에 관해 신경쓰지 않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껏 사용할 수 있었다. 기업은 돌봄의 책임과무관하다는 생각에서, 여성을 결혼과 육아를 이유로 차별하고남성에게 과도한 노동시간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가족정책‘은 여전히 가족이 공동생활을 위한 시간을 갖도록 제도를마련하는 일보다, 아동을 돌봄 기관에 맡김으로써 국가와 기업이 노동력을 확보하게 만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돌봄을 국가와 기업을 포함한 모두의 책임이자 개인의 권리로 인식하고 함께 연대하게 될 때, 비로소 불평등한 돌봄의 시간도 재배치될 수있을 것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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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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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이 해체되면, 그래서 비혼가족이 많아지고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간단한 몇마디로 예측하긴 어렵다. 다만 해외의 상황을 보면 그변화의 결과가 "붕괴"나 "사회적 재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더구나 합계출산율을 비교하자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들의 상황은 한국보다 훨씬 낫다. 가령 2001년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인정해 이미 20년이 지난 네덜란드의 경우, 오늘날 합계출산율은 1.62명이다(2021년 기준). 프랑스는 1999년 동성·이성 비혼커플을 위한 대안적 결합제도로서 연대계약 PacteCivil de Solidarité, PACS을 도입하고 2013년부터 동성결혼을 인정했다. 2021년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1.80명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혼외출생률도 높다. 태어나는 아동의 절반 이상이 결혼 밖에서 출생한다. 네덜란드의 혼외출생률은 53.5퍼센트, 프랑스의 혼외출생률은 62.2퍼센트이다(2020년 기준). 2020년 기준 OECD 회원국 평균을 보면 혼외출생률 41.9퍼센트, 합계출산율 1.56명이다.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이 허물어진 나라에서 출생률이 높은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 나라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든 평등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왔다는 뜻은 아닐까? 결혼으로 쌓아올린 담벼락을 내리고 다양한 출생을 포용하려 애쓴 변화를 두고, 불경하고 문란하다고 치부하는 오류를 우리 사회가 범해온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 P65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에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가 출산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성별이라는 오래된 구획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일 수 있다. - P94

스웨덴의 성교육은 성을 죄악시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감정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을 둘러싼 긴장을 없애야 상대방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을 피해야 할 위험한 것아니라 긍정적인 삶의 요소로 보고 접근했다. 모든 개인에게 성은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성을 결혼과 결부시키지 않은 스웨덴 모델을 두고 누군가는 비도덕적이고 문란하다고 했다. 하지만 스웨덴 모델에서 생각하는 ‘도덕‘은 달랐다. 스웨덴 모델은 결혼 전 성관계에 낙인찍지 않는 것, 성적 행동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 성을 개인의 권리로서 보장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 P129

이런 제도가 가족 간 불평등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까? 가족부양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보장제도 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마치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는 것과같다.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끊임없이 증명해
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가족의 실패’가사회보장의 전제요건이 되면서, 사회복지제도는 마치 가족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낙오된 세계인 것처럼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후의 ‘고아‘와 ‘미망인‘부터 오늘날의 장애인, 노숙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시설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한다. 이들은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시설에 오고, 또 시설에 있기에 자유로이 가족을 형성할 수 없는 덫에 빠진다. - P164

분명 성소수자의 출현은 가족질서에 큰 혼란을 가져온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의 가족체제가 성소수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보았듯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성별에 따라 세밀하게 구조화된 체제다. 모든 사람을‘남‘과 ‘여‘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고 성별에 따라 달리 기대되는 역할이 있음을 대전제로 한다. 남녀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법적으로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하는 일련의 가족각본을 충실히 따르기를 기대하고 때때로 압박한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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