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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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이 해체되면, 그래서 비혼가족이 많아지고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간단한 몇마디로 예측하긴 어렵다. 다만 해외의 상황을 보면 그변화의 결과가 "붕괴"나 "사회적 재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더구나 합계출산율을 비교하자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들의 상황은 한국보다 훨씬 낫다. 가령 2001년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인정해 이미 20년이 지난 네덜란드의 경우, 오늘날 합계출산율은 1.62명이다(2021년 기준). 프랑스는 1999년 동성·이성 비혼커플을 위한 대안적 결합제도로서 연대계약 PacteCivil de Solidarité, PACS을 도입하고 2013년부터 동성결혼을 인정했다. 2021년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1.80명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혼외출생률도 높다. 태어나는 아동의 절반 이상이 결혼 밖에서 출생한다. 네덜란드의 혼외출생률은 53.5퍼센트, 프랑스의 혼외출생률은 62.2퍼센트이다(2020년 기준). 2020년 기준 OECD 회원국 평균을 보면 혼외출생률 41.9퍼센트, 합계출산율 1.56명이다.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이 허물어진 나라에서 출생률이 높은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 나라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든 평등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왔다는 뜻은 아닐까? 결혼으로 쌓아올린 담벼락을 내리고 다양한 출생을 포용하려 애쓴 변화를 두고, 불경하고 문란하다고 치부하는 오류를 우리 사회가 범해온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 P65

재생산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임신·출산에 관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여 출생하는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차별을 용인하고 묵인할 때에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는 일이 아동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처럼 보였겠지만, 차별과 맞서기로 결정한다면 양육자의 권리가 곧 아동의 권리이고 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모든 사람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가 출산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성별이라는 오래된 구획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일 수 있다. - P94

스웨덴의 성교육은 성을 죄악시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감정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을 둘러싼 긴장을 없애야 상대방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을 피해야 할 위험한 것아니라 긍정적인 삶의 요소로 보고 접근했다. 모든 개인에게 성은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성을 결혼과 결부시키지 않은 스웨덴 모델을 두고 누군가는 비도덕적이고 문란하다고 했다. 하지만 스웨덴 모델에서 생각하는 ‘도덕‘은 달랐다. 스웨덴 모델은 결혼 전 성관계에 낙인찍지 않는 것, 성적 행동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 성을 개인의 권리로서 보장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 P129

이런 제도가 가족 간 불평등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까? 가족부양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보장제도 안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은, 마치 가족의 실패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는 것과같다.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끊임없이 증명해
야 국가의 지원을 받을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가족의 실패’가사회보장의 전제요건이 되면서, 사회복지제도는 마치 가족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낙오된 세계인 것처럼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후의 ‘고아‘와 ‘미망인‘부터 오늘날의 장애인, 노숙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시설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한다. 이들은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시설에 오고, 또 시설에 있기에 자유로이 가족을 형성할 수 없는 덫에 빠진다. - P164

분명 성소수자의 출현은 가족질서에 큰 혼란을 가져온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의 가족체제가 성소수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보았듯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성별에 따라 세밀하게 구조화된 체제다. 모든 사람을‘남‘과 ‘여‘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고 성별에 따라 달리 기대되는 역할이 있음을 대전제로 한다. 남녀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법적으로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하는 일련의 가족각본을 충실히 따르기를 기대하고 때때로 압박한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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