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가족은 상이한 생활조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왔다. 한국에서도 가족이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가령 지금의 한국은 과거보다 결혼을 적게 하고 이혼을 많이 한다. 이 사실을 두고 가족의 ‘위기‘나 ‘해체‘라고 묘사하는 것과, 가족의 ‘변화‘나 ‘다양성‘의 증가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위기‘와 ‘해체‘ 담론은 특정 가족 형태를 ‘옳다‘고 전제한 진단이다. 이에 대해 윤홍식은 이렇게 비판한다. "가족의 특정 형태의 변화를 가족의 해체로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변화했다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두 접근은 국가 정책적으로 중대한 차이를 낳는다. ‘위기’와 ‘해체’의 담론은 공포를 조장하고 과거로 회귀하게 만든다. 반면 ‘변화‘와 ‘다양성‘의 담론은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여 새로운 제도를 만들게 한다. 전자는 기존의 가족질서에 맞추어 살도록 개인을 통제하고 압박하지만, 후자는 모든 사람의 가족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대안적 제도를 고안하도록 한다. - P188
2장에서 나눈 혼외출생자 이야기나 3장에서 나눈 ‘혼혈인‘, 한센인, 장애인 등의 이야기는, 부도덕하거나 열등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불행이 아니라, 가족각본이 만들어낸 불평등의 결과였다. 한부모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이주배경가족, 조손가족, 비혼가족, 동성커플가족, 트랜스젠더가족 등 모든 가족은 가족의 ‘위기‘나 ‘해체‘, 혹은 ‘붕괴‘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양식이다. 그런데 가족각본이 이러한 삶을 열등하고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하여 낙인을 새기고 차별을 정당화한다. 국가가 특정가족 형태를 ‘건강가정‘이라고 명명하며 ‘만들어내는‘ 이 불평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2022년의 대법원이 가족각본에 흠집을 내며 만들어낸균열이 특히 의미가 있다. 앞에 발췌한 결정문에서 보듯, 대법원은 헌법 제36조 제1항이 보장하는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의 권리임을 확인했다. 설령 가족관계에 변화가 있더라도 "이렇게 형성되는 부모자녀 관계와 가족질서 또한 전체 법질서 내에서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존엄하고 평등한 가족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모든 개인에게 인정되는 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불평등한 가족질서는 타당하지 않다. 누구나 다양한 모습으로 가족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하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 P191
장경섭은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 수준은 낮은 편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문 지출의 비중은 프랑스 31.6퍼센트, 독일 26.7퍼센트, 일본 24.9퍼센트, 스웨덴 23.7퍼센트, 영국 22.1퍼센트 등이고, OECD 평균이 21.1퍼센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은 GDP의 14.8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렇게 기업 역시 오랜 시간 돌봄의 책임을 피하며 이익을 누렸다. 돌봄을 ‘사적인‘ 가족의 문제로 분리시키고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의지한 결과, 기업은 돌봄에 관해 신경쓰지 않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껏 사용할 수 있었다. 기업은 돌봄의 책임과무관하다는 생각에서, 여성을 결혼과 육아를 이유로 차별하고남성에게 과도한 노동시간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가족정책‘은 여전히 가족이 공동생활을 위한 시간을 갖도록 제도를마련하는 일보다, 아동을 돌봄 기관에 맡김으로써 국가와 기업이 노동력을 확보하게 만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돌봄을 국가와 기업을 포함한 모두의 책임이자 개인의 권리로 인식하고 함께 연대하게 될 때, 비로소 불평등한 돌봄의 시간도 재배치될 수있을 것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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