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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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신부가 가장 총애하였을 정도로 모범적이었던 소년이 독일 나찌 SS대원이 된다. 그는 중상을 입고 죽기전에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유대인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 한다. 시몬은 인간적인 공감을 하기는 했으나 끝내 침묵함으로써 용서하지 않는다.

소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념에 충실한 노예일뿐이었다. 종교든, 이념이든 무조건적인 믿음은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자기를 조종하는 누군가의 로봇으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 할 수 있는 양심이 잘못된 믿음하에서는 어떻게 무용지물이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나찌의 SS가 잘못된 믿음 때문에 유태인을 인간이 아닌 해충으로 생각하며 박멸하는데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집단최면에 사로잡혔던 광신도와 다름이 없는 듯 싶다.
본인이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 조직이 추구하는 목표나 행위가 반 인륜적행위임에도 모른채 했다면 이는 찬성하고 동조한 것이며,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죽일 것이라는 자기위안은 비겁한 거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된 상태도 아니고 수용소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움에 있는 사람에게 용서를 해달라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지만, 단지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자신의 잘못을 솔찍하게 시인하고 사과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으로 다른 나찌와 다르게 양심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용서는 그가 죽인사람을 대신해서 해줄수 없으나 마음 깊이 반성하고 있음을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힘없는 수용자 조차에게 라도 용서를 받으려는 절실함은 그가 가지고 있는 사라지지 않은 인간의 마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세를 믿는 일신교 신자이기 때문일 수고 있겠다.
˝카르마조프가의 형제˝에서 파뿌리 하나를 거지에게 준 선행으로 낙원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못 된 노파처럼.... 유대인 아무에게 라도 용서를 받으려는 마음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려한 개인의 비율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줄 안다.잘못을 자각하게 되었더라도 차마 밝힐 수 없었기에 비겁하게 속이고 살아간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국가차원에서 스스로 잘못했음을 지속적으로 밝히고 사과하고 있고 나찌를 찬양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의 과오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반면에, 일본은 감추고 왜곡하며 오히려 군국주의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육일기를 내세우고 정부차원에서 전범자들에 대한 신사참배를 함으로써 반성 할 줄 모르는 무도함을 보이고 있다. 자민당은 이웃을 자극하는 혐한을 조장하고 이를 애국이라는 포플리즘으로 이용하는 정치를 위한 이슈로 활용하는 것은 참으로 개탄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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