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평전
간호윤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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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를 포기한 아니 거부했던 양반은 백수에 불과했기에 한평생 어려운 생활을 한듯하다. 명문가 할아버지의 뜻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던, 그래서 16살 장가간 이후 장인과 처숙으로 부터 글공부를 하였다니 검정고시 출신의 천재인듯 하다. 특출한 재능에도 과거보기를 포기한 연암을 이해해준 장인이나 부인의 도량이 참으로 크다. 생업을 위한 직업이 관리라는 것에 한정되어 있던 시대기에 물려받은 재산도 없어 찢어지게 가난한 양반가의 가장으로서 그런 결심을 지금의 시점으로는 이해 할 수 없을 것 같다. 항산항심이라 했음에도 역시 연암은 군자라 안빈낙도가 가능했나보다.

논설, 소설, 기행문 그리고 세상살이 방법이나 비평가로 대단한 문장가임에도 돈이 되지 않는 필생의 작업을 보면, 평생 유화를 한점밖에 팔지 못해 동생 태오에게 재료비며 생활비를 받아 생활했던 고호와 유사하다.
고호 사후 그의 작품은 수조원의 가치로 평가 받고 있는 것 처럼 연암의 글 또한 귀하기가 이를데 없다. 연암은 고호와 같이 사적 욕심이 아닌 이 사회를 위한 자기 희생을 각오한 글이지 싶다. 연암은 동시대인으로 다산과 비견되곤 한다. 모두 이용후생에 관심을 가진 천재이며 저술가이나, 다산은 범같은 연암과 다른 범생이로 출세를 통해 가문과 사회를 잘되게 하겠다는 정치 지향의 선비 였다면, 연암은 프리랜서를 지향하는 재야의 실용주의자 였다. 시대의 프레임 속에 갖히지 않겠다는 강한 집념은 독불장군 이기 보다는 독야청정한 일송정과 같다.

양반으로서 양반을 희화하고 조롱했기에 내로남불의 비방이 아닌 자기를 포함된 양반으로서의 자기반성이머 기득권층이 스스로 계몽되기를 주문한 것으로 은근한 표현의 넛지라 본다.

가진것이 많은자는 지키기 어려우니 항상 노심초사하며 연암의 오지랍에 비난하고 음해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속좁은 자격지심으로 평생를 괴롭혔던 유한준 같은 자들을 적으로 만든 것은 꼬투리를 제공한 책임은 연암에게도 있다.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면 즉 불통으로 생긴 오해라면 시시비비를 설명하고 풀어 내어지 못한 게 아쉽다.

과거를 거부하니 생계가 어려웠고 적들의 모함 등으로 평생 우울증을 가지고 살았기에 힘들었으나 더 고민하고 더 심오한 철학적 사고에 큰 진보가 있었을 것이란 점이
니체의 삶과도 많이 비슷하다.
자신들을 품어주고 이해해 줄 만큼 성숙하지 않은 세대에 태어난 것이 그들 에게는 큰 불행 이었지만 그들 덕분에 세상은 그만큼은 나아졌을 것이다.

자유로운 생각은 자유로운 표현에서 나타난다. 중국의 고문체만을 고집하여 수필형식의 자유로운 연암체를 금지하고 반성문까지 제출을 강요했던 정조의 문체반정은 그만큼 창의적이고 개혁 할 수 있는 생각을 제한했던 암울한 세대였던 거다. 공맹과 주희가 말하지 않은 새로운 주장 하는 자는 사문난적으로 찍힐 수 있던 시절이기에 자유로운 영혼인 연암이라 더 어려웠을 것 같다.

신분이 아닌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고 사랑했던 연암 이야말로 진정으로 인의를 실천한 자랑스러운 조선의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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渼沙_常水 2022-06-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생각으로 각색된 내용이 아닌 당시를 살아낸 사람들의 생각을 알수 있아 좋았던것 같습니다. 노론의 벽파와 시파 그리고 남인 등 서로 다른 당파간 반목을하며 당리당략으로 반대만 일삼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나, 상것들 에게도 마음을 내주었던 양반이 있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오는건 그간 너무도 획일적으로 각색된 사실만을 진실이라 믿었던 게지요. 조선이란 나라를 냉전시대에 북한에 대해 배웠 듯이 ㄹ아 숨쉬었던 삶의 역사가 아닌 죽은 역사만을 가르친 교육의 책임이 큽니다. 정권차원에서 만들어낸 국정교과서의 폐해일 수 있습니다.
우리역사지만 제 3자의 객관적 시점의 평가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