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범우문고 239
이순신 지음, 이민수 옮김 / 범우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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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한문 종군실기로 전세계적으로도 전쟁 중 지휘관이 직접 기록물을 남긴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그중요성이 크다

원래는 제목이 없었으나 훗날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하면서 “난중일기”로 명명한 이후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다

1592년 1.1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하루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충무공에 대하여는 3자의 입장에서 사실을 근거로 또는 일부 각색된 많은 책과 드라마 영화에서 조명하고 있으나 직접 작성한 진중일기를 통하여 좀더 사실적인 접근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충무공과 관련된 이해관계자간의 역학관계에 대하여 당사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이해관계자로는 유성룡, 이율곡, 원균, 선조, 권율, 배설, 히데요시, 고니시, 가토, 와키자키 등이 있으나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지원하고 천거한 유성룡이며 갈등관계에 있던 원균이라 할 수 있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5살 연상으로 일찍이 급제하여 벼슬길에 먼저나가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32살에 급제한 이순신은 주위의 시기와 모함이 끊이지 않아 미관말직으로 전전하였다
소시적부터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유성룡의 천거로 몇단계씩 진급기회가 있었으나 번번히 반대파의 반대로 무산되고 백의종군하기 까지 이른다

임진난 1년여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고 전란을 대비한다
(일부 학계에선 유성룡의 많은 공적중 이순신을 발탁하고 그를 지켜준 공이 가장크다라는 평가됨)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동인(남인)이었던 유성룡으로 부터 천거되었으므로 동인으로 분류된다

동내 선배이며 상급자였던 원균은 이순신보다 늦은 임난 3개월전에 경상좌수사로 임명되나 전쟁발발 후 주력을 잃고 이순신과의 연합작전에서 지원하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두사람이 편치않은 관계와 전략에 대한 상이한 스타일이 갈등을 키우는 동인이었던 것 같다

원균측의 주장을 보면 전쟁발발 후 전투에 나간 원균은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묵살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합동작전을 했던 이순신의 1차 출정인 옥포해전의 승리로 공동으로 상소하자라는 원균의 의견에 전과가 미미하니 추후에 보고하자 라고하고 이순신이 단독으로 전공을 보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왜구방비가 목적인 조선 수군의 경우 경상도가 주력으로 좌우수사에 각각 판옥선이 75척씩 편제되어 있고 전라도에는 좌우수사에 각각 25척이 편제되어 있는 상황을 비추어 볼 때 주력이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선단을 운영하고 있는 전라 좌수사에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모두 죽으라는 것이며 왜군이 부산 동래로 진격 했을 때 경상도 수군이 방어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에서 원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두사람의 갈등을 묘사하는 내용이 난중일기에 많이 나와 있는데 한 사람만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없고 인간 이순신 또한 어느 정도의 전공에 대한 욕심이나 미운놈에 대한 감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난중일기가 보통의 비밀일기가 아닌 어느정도는 후세 사람들에게 읽힐 것이라는 가정하에 주관적인 내용보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실록의 성격이 강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 원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다

21일(계유) 맑음~ 원수사가 하는 말이 몹시 흉측하고 거짓스럽다.  사람됨이 이와 같은데 같이 일을 하자니 어찌 뒷근심이 없겠는가
28일(경진) 맑음 ~ 그러나 원 수사의 흉칙함은 볼 수가 없다
2일(계미) 맑음~ 원 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여 나에게도 무도한 일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망령된 일이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6일(정해) 맑음. ~ 저녁에 원 수사가 오고, 이 억기, 정 수사가 와서 일을 의논하는 동안, 원 수사의 말은 걸핏하면 모순이 생겼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
7일(무자) ~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 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래 헛소리를 잘하는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8일(기축) 맑음. ~ 우수사가 유포로 가서 원 수사와 만난다니 우스운 일이다.
9일(경인) 맑음. ~경상 수사는 군사를 일제히 내어 복병시키기로 해놓고 슬며시 혼자서만 먼저 보냈다고 하니 해괴한 일이다.
19일(경자) 맑음. ~ 말 가운데 원 수사의 음흉하고 고약한 것이 많으니, 그 허무맹랑한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원씨 형제가 옮아 간 후에 천천히 노를 저어 진으로 돌아와, 우수사, 정 수사와 함께 자세히 이야기했다.
28일(기유) 맑음. 원 수사가 와서 음흉하고 간휼한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30일(신해) 맑음.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보내고 다만 7, 8척만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씨와 일하는 것이 모두 이런 따위다.
6일(정사) 맑음. ~거기서 원 수사의 음흉한 말을 듣고, 또 정 담수가 근거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는 말을 들으니 우스웠다. 파선된 배의 재목을 여러 배가 끌어왔다.
12일(경신) 맑음. 순무 어사 서 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 충청 수사도 함께 와서 술 세 순배를 마셨다. 원 수사는 짐짓 취한 채 광증을 부리며 무리한 말을 함부로 뇌까리니 순무 어사도 괴이함을 금치 못한다. 하는 짓이 이렇게 몹시 흉악하다.
4일(신해) 맑음. ~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 속에 말하기를, ˝수군 여러 장수들과 경주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 하니 금후로는 전의 습관을 모두 고치도록 하라.˝ 했다. 통탄함을 금할 수가 없다. 이것은 곧 원 균이 술취해서 망녕된 짓을 한 때문이다.
20일(계해) 맑음. 우수사, 장흥, 신 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의 고약한 짓을 많이 전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24일(무자) 부사와 함께 가리포로 갔더니 우우후이 정충이 먼저 와 있다. 함께 남쪽 망대에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알 수가 있다. 참으로 한 도의 요충지다.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공의 흉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30일(을해) 맑고 바람도 없음. ~ 영의정의 편지와 심 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분개한 뜻이 많다.

원 수사의 일은 몹시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고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니, 이것은 천고에 두고 두고 탄식할 일이다. 곤양이 병으로 돌아 갔는데, 보지도 못하고 보냈으니 더욱 한스러운 일이다. 밤 2시경이 지나도 심사가 산란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
17일(신유) 맑음. 아침에 어사에게 사람을 보냈더니 어사는 식사 후에 오겠다고 한다. 늦게 우수사가 왔고
어사도 역시 왔다.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거짓말한 것을 많이 말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원 수사도 또 왔는데, 그 흉악하고 거짓스런 꼴이란 말할 수가 없다.

 [조정에서는 바다상황을 잘몰라 부산으로의 출격강요를 고집하지 못하고있던차에 “지금 우리 수군은 강합니다. 당연히 부산 앞바다로 수시로 출격하여야 합니다. 그럼 적군은 두려워져 바다를 건너오는 일을 감히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원균의 표문이 올라왔으며 가토군이 바다를 건너온다는 정보에 따라 출동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정보가 의심스럽고 복병이 있을 것임을 이유로 출격하지 않아 서울로 압송된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된 원균도 부산공격이 불가함을 알고 주춤대자 도원수 권율이 곤장을 치고 출격을 독촉한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출격하나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200척가까운 전함이 침몰되어 조선수군이 괴멸하게 된다 (이때 무단으로 이탈한 배설의 전함 12척이 명량해전때 쓰인다)

 21일(경자) 맑음.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도 고을에 있고, 백성들로 많이 제 고장에 있어 혹은 올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밀보리밭을 갈기도 한다. 점심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원 안 위와 영등 조 계종 등 10여인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는데, 경상 수사 배 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는다. 우후 이 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하던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육지로 달아나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고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한다.

 2월 22일 [양력 3월 24일]<정미>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것을 경상도 우수사에게 파 물었다. 한심스럽다. 오늘의 통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 모두 경상우수사 (원균)의 탓이다.

 원균은 용맹한 장군임에는 틀림 없으나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균은 성질이 몹시 억세어 윗사람이 공문을 보내어 지휘하면 반드시 다투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쟁에 임해서는 쓸만한 장수입니다. 그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지 말고 전쟁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진케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의정 이원익. 선조 29년 10월 5일)

선조실록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세운공으로 특진한바 있으나 그의 근무평정은 최하위였다고 하며 임란초기에 경상우수사로서 군령을 내렸으나 각진의 책임자들이 도망하여 100여척의 전선이 와해된 것은 리더십의 부재였으며 삼도수군통제사로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여 수군이 괴멸하게 된 것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선조와 도원수 권율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순신은 지는 싸움은 절대하지 않는 매우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자주 충돌했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순신이 훈련원 봉사(종8품)시절 이조판서(종1품)인 이율곡의 면담요청에 같은 가문의 사람으로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라는 유성룡 징비록의 기록에도 있듯이 철저한 원칙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몸이 자주 아팠으며 모친이나 자손들을 걱정하는 가장으로서의 고충과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여 과감하게 참수하거나 곤장을 때렸던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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