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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짧은 그림책이구나 싶어서 손에 들었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낮은 저음같은 이야기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또, '요시토모 나라'라는 유명한 그림작가(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도 추천한 책이기도 하구요.
열여덟 살에 엄마를 잃은 미쓰코는 그때의 충격을 '커다란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를 본 대가로.
엄마의 몸에서 엄마의 혼이 떠났을 때, 나는 그 싸늘한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아, 엄마는 이걸 타고 여행을 했던 거야.'
그래서 나 역시 내 몸을, 자동차를 꼼꼼히 정비하듯 소중히 다루게 되었다.
기름이 하이옥탄인지 레귤러인지, 산길에 강한지, 눈이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페인트로 도장을 하면 좋은지, 연비가 떨어지는 음식은 무엇이고 어떤 부담을 주는지 내 몸을 자동차라고 생각하자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나는 예전보다 오히려 건강해졌다. (11-12쪽)
미쓰코는 아버지가 동네 어귀에 사는 아줌마, '아르헨티나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의 변화를 알게 됩니다. 석공이었던 아빠는 끝내 조각가가 됩니다.
이 인생을 선택하면서 내던져야 했던 수많은 요소들이 지금 아빠의 내면에서 거대한 힘으로 뭉쳐 그 싹을 틔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49쪽)
"돌에 깃든 신이 툭하면 내게 돌을 파란다."
아빠는 언젠가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단다. 하지만 예술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가게나 공원, 무덤, 마당 같은 곳에서 동네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일해 왔지만, 그것은 살아 무덤을 찾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고. 그래도 죽은 사람이 안심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었다고.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할 만큼 했으니까. 앞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마음으 기댈 자그마한 것들을 만들고 싶다고.(74쪽)
그리고 자신도 아르헨티나 할머니, 유리와 그곳을 좋아하게 되지요.
유리는 아이를 낳고 육년후 죽게 되고, 배다른 남동생을 갖게 된 미쓰코는
유리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녀에게 꼬여 든 것은 애당초 우리 가족이 아닌가. 엄마를 잃고 고아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한 가족을 이루지 않았는가. 그 모든 것으로 보아 오히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빠와 내가 아닌가.(78쪽)
소설은 '유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합니다.
이 인생에서, 나는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83쪽)
처음 갔을 때, 나는 저 낡은 건물이 비석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랜 꿈을 품고 지금도 살아 있는 저것은 유적이다. (72쪽)
한없이 먼 이국을 여행하는 것이나 자기만의 유적을 만드는 것이나 그 시도의 근원은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대로 여행을 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영원 속에서 소박한 저항을 새기는 것. 그뿐이다. (84쪽)
"사람이 왜 유적을 만드는지 알아?"
옛날에 둘이 옥상에서 내가 사 온 참깨 과자를 먹을 때, 유리 씨가 내게 물었다.
......
"모르겠는데요,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설까요?"
젊은 날의 나는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 아빠가 모자이크를 만드는 이유하고 같을 거야."
유리 씨는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오늘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러게 생각해서일 거야."
그건 인간이 영원토록 지니는 허망한 바람인 거야. 그리고 위에서 보면 목걸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신마저 부러워 매혹당하는 아름다운 빛의 알갱이지, 라고 유리 씨는 말했다. (86-87쪽)
유적이란 뭘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는 작가의 말은 아마도 '자신'을 만들라는 것이 아닐까?
상처를 이겨내고 자신에게 아름다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를 사랑하는, 꿈을 만들라는 말이 아닐까?
주억거리게 됩니다.
참, 아빠가 말해주는 '사랑'의 의미도 재미있습니다.
아빠가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보고 또 봐도 어떤 얼굴인지 기억할 수 없는 법이지."
"유리 씨를 말하는 거야?"
"그래."
"야 참...... 멋진 일이네."
나는 놀리는 마음으로 말했는데, 아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매일 보는데도 도통 종잡을 수가 없고, 어떤 얼굴인지 잘 모르겠다. 얼굴 주위에 뭐랄까......"
아빠는 얼굴깨에서 두 손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른아른한, 예쁜 천 같은 것이 살랑살랑거리고, 그 너머는 확실하게 보이지가 않아."
"음......"
"그게 뭘까? 여자의 수수께끼다."
아빠는 답담하게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엄마도 그랬어?"
글쎄, 처음에는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짜증스럽도록 또렷하게 보이는 거야. 그게 부부란 거겠지."
"그런데 유리 씨는 그렇지 않다는 거야?"
"지금은 얼굴이 안 보이는 단계야. 아직은 좋은 때지."
탱고를 추고, 고기를 꼬치에 끼워 굽고, 아주 매운 소시지를 만들고....... 유리 씨는 어느 모로 보나 외국인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그녀 안에서, 그리운 어떤 것을 보았으리라. 그립고, 또 영원한 것을.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엄마에게서 똑같은 것을 느꼈다. 어른이 되어서는 확실하게 한 여자로 보였지만, 어렸을 적에 엄마는 늘 부드러운 막 저 너머에 있었다. (75-76쪽)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킨 유리 씨,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은 역시, '가족'인 것일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2007.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