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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ㅣ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평점 :

모범생이지만, 머리색이 붉다는 이유로 시선을 모으는 소녀-요코.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금발의 남자-케이키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어전에서 떠나지 않고, 충성을 맹세할 것을 서약한다."
――그리고 요코는 일상으로부터 끌려나와 비일상을 마주하게 된다. 검을 쥐어야 했고, 이형의 침입자, 요마 무리들이 그녀를 쫓았다.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다른 세상, 변해버린 몸, 그녀를 이 곳으로 끌어온 원흉이랄 수 있는 케이키는 곁에 없고, 그야말로 사고무친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린다. 요마와 사람이라는 이름의 악의가 그녀를 수없이 덮치고, 기묘한 환상이 정신을 나락으로 잡아끈다. 직접적으로 그녀를 공격해오는 요마는 분명 위협이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무조건 적대한다면 차라리 낫다. 달콤한 배려로 다가와 손바닥 뒤집듯이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고, 그것에 심지어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이세계 이동(혹은 소환/빙의 등)에는 흔히 조력자 캐릭터가 등장하곤 하지만(이 소설에도 안 나오지는...않는다;), 그런 친절함은 없다. 반가워하며 방심했다가는, 배신당하고 마니까.
그리고 요코는,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계는 열 두 나라― 십이국十二國으로 이루어진 세계. 그 나라들의 지배자는 왕이며, 왕을 선택하는 것은 민의나 혈통 같은 것이 아닌 기린이라는 생물이며, 왕은 도를 잃지 않는 한 영원히 살아가며 나라를 다스린다. 케이키는 경국의 기린, 케이키가 서약한 자는 경왕, 그러므로 케이키가 서약한 요코는 경왕이 되는 것이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빨간 머리 때문에 주눅들며, 어쨌거나 평범한 학생이었던 요코가 -지금까지 살아온 나라와는 전혀 다른 세계. 선인들이 존재하고, 왕이 없으면 나라가 황폐해지며, 기린이 왕을 선택하며, 아이가 나무에서 열리는 나라의 왕이 된다. 왕은 선정을 펼치는 한 영원을 약속받지만, 길을 어긋나면 천의에 의해 죽게 된다. 잘못하면 죽음, 이라니 살벌한 이야기다. 보통 권력자가 누리는 부귀는 그런 불안요소에 비하면 퍽 얄팍해 보인다. 다모클레스의 검이 좀 더 현실적이며 날카롭다 하면 될까. 이래서는 덥썩 '예, 왕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요코는 고뇌하고, 이윽고 선택한다.
"허락한다."
이것으로 요코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오래 기다려왔던 이야기, <십이국기>를 엘릭시르에서 나온 개정판의 가제본으로 만났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게이키'라는 이름에 경악했다. 외래어 표기법은 이미 반쯤 포기해왔다고는 하지만(빙과의 '지탄다'가 떠오른다..;) 타이호도 '태보'로 한 마당에, '게이키'로 하느니 차라리 '경기' 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타이키가 아니라면 다이키든 대기든...비슷해 보이면서 뉘앙스 차가 절망적인 다이키보다야, 아예 다른 대기를 받아들이는 게 쉬울 것 같다..ㅠㅠ 작가와의 협의도 끝난 상태라고 하니 일개 독자로서 이제 와서 뭐라 말할 수야 없겠지만... 재발간과 뒷권이 나와주는 것만 해도 어딘가, 하면서도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십이국기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인명 등의 고유명사에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구판에서 번역자가 바뀌면서 고유명사의 악몽을 겪었으니, 그것보다는 이 쪽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랐을 뿐이라 낫다 해야 하나. 뒷권을 읽다보면 코마츠 나오타카를 쇼류라고 호칭하듯이, 나카지마 요코도 요우시라고 불리던데, 경사적서에 나카지마 요코라고 실려 있는 게, 호칭은 계속 요코로 가는 걸까? 그런 것치고는 (아마)4권에서 쇼우케이, 스즈와 대화할 때 분명 요코가 자신이 요코라고 말하던 대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일본어 번역에서는 언제나 인명 문제가 고민거리인 것 같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장대한 십이국 이야기에서 이제 막 서장일 뿐이며, 요코의 이야기도 시작되었을 뿐이다. 사실 주인공들이 이렇게 배신당하고 구르고 하는 걸 잘 못 봤는데, 과연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렇잖으면 내용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그럭저럭 읽어낼 수 있었다. 다음 권은 1권과는 분위기가 달라질, 타이키의 귀환과 대주종이 맺어지기까지의 이야기다. 발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