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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당신, 그 사람 맞죠? (총3권/완결)
정여름 / 누보로망 / 2017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14년 전, 수희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을 다 못 갚아 빚 대신 잡혀 팔려가는 길에 도망쳤다. 우연히 만난 남자가 그녀를 도와주고 숨어 살라 말해 주었고, 수희는 자신의 이름을 버린 채 살아가다 식당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딸의 이름을 받아 이가영으로서 살게 된다. 이가영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살아간 지 9년, 로펌 변호사가 된 수희는 14년 전 그 남자―정확히는 그와 같은 듯한 반지를 낀 남자에게 전해달라며 명함을 내미는데……
※ 스포일러 주의
세 권의 소설이지만 첫 번째 권은 맛보기 형식으로 짧아서, 그리 분량이 길지는 않습니다. 작가님 필력이 좋아서 이야기 자체는 술술 읽히는 편이네요. 두 사람, 수희와 요한이 스치듯 만나고, 다시금 재회하여, 수희가 끊임없이 자신과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 그 사람 맞죠?> 요한이 수희를 마주보기까지, 수희가 요한에게 고백(?)하고 그 후에도, 질문은 계속됩니다.
은인을 찾고 싶다는 일념으로 행동하는 수희는 뭔가 변호사라기에는 많이 어리버리한 인상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을 잃고, 갑작스럽게 사채업자에게 팔려갈 뻔하고, 신분을 숨기며 살아가다, 새로운 이름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다사다난하다보니 감정적으로 자라기에는 메마른 환경이라고 할까... 목표만 보고 한 길로 달려온 느낌이라서, 저렇지 않을까 납득이 됩니다.
어딘가 어린 느낌도, 가영은 자라났지만 가영 속의 진짜 수희는 숨은 채 성장할 기회가 없었다고 할까요. 당장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있다는 약점도 영향이 없지 않았을 테고요. 이가영으로서의 인생을 정성들여 쌓아올려도, 그 아래 있는 근본이 거짓이라, 어느 날이건 우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작중에서 그런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었고요.
한편으로 요한 역시 수희와 만났을 당시, 수희에게 선의를 베풀었지만 본질적으로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어느 쪽인가 하면 악의에 가까웠습니다. 수희가 떳떳한 일을 선택한 반면, 그는 정 반대의 일을 선택했고요. 둘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일각을 이루었다(?)는 점을 보면 노력한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역시 요한이 왜 하필 저런 일을 선택해야만 했는가 씁쓸함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수희가 저리 순수하게 남을 수 있었던 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더욱. 요한이 도망치는 수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식당 아주머니가 죽은 딸의 사망보험금 대신 수희를 죽은 딸로 생존신고를 해 주어 살아가라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수희는 없었겠지요. 수희의 인생에는 은인이 있지만, 요한의 인생에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두 사람은 극과 극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법조인이 된 수희가 요한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요. 이 부분을 기대했다면 아쉽게도, 수희는 요한의 직업을 끝까지 모릅니다. 두 사람 연애의 본격적인 시작(...)이 엔딩이라서요. 엔딩 자체는 좋지만, 역시 이 둘의 관계가 너무 위태롭게 느껴져서 불안하기도 한 완결입니다. 다 읽고 나니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 두 사람이 새로운 비극을 만나게 될 것 같아서 작가님이 여기서 끝맺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어쨌든 끝까지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수희 중심 본편에서 궁금했던 요한 시점의 외전까지, 깔끔하게 끝나서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