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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합본] 불청객 (전2권/완결)
임윤혜 지음 / 퀸즈셀렉션 / 2017년 11월
평점 :
빙의물은 낯선 주제가 아닙니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낯선 얼굴이 거울 속에, 하는 투의 소설은 참 많죠. 단 <불청객>은 빙의물이지만, '빙의한'이 아니라 '빙의당한', 정확히는 '빙의당했던'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 스포일러 주의
1924년을 살고 있던 글로리아 민튼은 눈을 떠 보니 1930년의 글로리아 임페라토르 부인―심지어 임산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더듬더듬 알아낸 현실은 자신은 전혀 하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의 몸이 한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글로리아 임페라토르는 남편을 협박하여 결혼하고, 사치를 부리다 못해 바람을 피우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글로리아'는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은 그 사람이 글로리아가 아니라 이사벨라였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야말로 진짜 글로리아이지만, 그간 글로리아로 살아온 게 이사벨라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신뢰받을 수 있을까요. 그야말로 두렵고 막막한 초반부였습니다.
그리고 남주, 에드윈 임페라토르는 당연하게도, 아내 글로리아 임페라토르를 미워합니다. 여동생 엘레나가 일으킨 교통사고의 피해자였던 그녀는 사랑이 아니라 협박으로 에드윈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다른 남자와 연애(?)하던 끝에 이혼하는가 했더니, 그에겐 의미 깊은 와인에 약을 타서 억지로 그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내가 되었을 때 그러했듯이, 어머니가 된 것도 오로지 재산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글로리아가 변했습니다. 그는 그 변화를 믿지 않고, 글로리아의 꿍꿍이를 의심하지만, 결국 마음을 열게 됩니다. (글로리아가 이전과는, 정확히는 이사벨라와 다른 것을 보는 부분이며 둘 사이의 오해(?)가 늘어지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사실 에드윈이 당한 일을 감안하면 전개가 느린 것 같진 않아요)
물론 두 사람의 마음이 통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글로리아와 에드윈이 만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셈이 되지만(...) 글로리아를 끔찍해하는 에드윈의 여동생 엘레나, 이전에 글로리아를 글로리아 밀러에서 글로리아 임페라토르로 만들었던 이사벨라―지금은 또 다른 죽은 사람의 몸에 깃든 여자가 있으니까요.
글로리아는 이사벨라와 만나 그녀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임신한 몸으로 힘들어하면서도 차마 에드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어 고통스러워하고, 에드윈은 글로리아가 아파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여동생 엘레나가 자신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고 계속 엇나가는 것에 힘들어합니다. 이윽고 아들 프란시스가 태어나고, 글로리아는 그녀를 찾고 있던 사촌 언니의 집으로 가며 에드윈과 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쌓여있는 일들(악조들)을 해결한 에드윈은 글로리아―그리고 프란시스를 찾아가게 됩니다. 읽다보니 몇몇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빗속 장면부터 이별 장면, 재회 장면이 정말 좋았어요.
<불청객>은 장편이니만큼 주연들 뿐만 아니라 악조를 비롯한 조연들 캐릭터도 꽤 눈에 띄는데, 악역 두 명을 제외한다면(이 둘은 워낙 파격적이라) 역시 기억에 남는 건 외전에서 맺어지게 되는 글로리아의 친구와 남동생 커플입니다. 늘 허전해하며 이혼을 거듭해온 부유한 상속녀와 양을 돌보느라 정신 없는 시골 청년. 외전이다 보니 짧아서 좀 급전개긴 한데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며 분위기 등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분량이며 캐릭터적으로도 주인공들 버금가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두 악역. 다행히 권선징악의 '징악'적 면에서 이 소설은 철저합니다. 글로리아 민튼의 몸을 차지해 글로리아 밀러로 행세하며 에드윈 임페라토르를 협박해서 결혼하고, 자신을 위해 에드윈을 강간하여 아이를 가진 이사벨라. 그녀는 첫 번째로 아이로 인해 글로리아 임페라토르의 몸에서 쫓겨났고, 두 번째로 그레타의 몸을 차지했으나 그 육신이 썩어간 끝에 정신병원에 감금당하고, 세 번째로 자살했던 이사벨라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서 지었던 죗값 역시 치르게 됩니다. 1930년대 정신병원이 참혹하게 느껴지는데도 지은 죄에 대한 벌이다 싶을 정도로 대단한 악역이었습니다.
한편 글로리아 민튼을 죽일 뻔하면서 사과나 자신의 죄를 돌아보기는 커녕, 계속되는 패악으로 약혼자와 헤어지고 그녀를 필사적으로 감싼 오빠 에드윈이 결국 등 돌리게 한 엘레나는……진짜 가족을 곁에 두고 그들이 주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부정해 온 만큼 정말로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가족'을 만나 고통당하고 적잖은 유산을 모두 빼앗기게 되는, 그러나 자신이 싫어하던 친척에게 도움을 받아 남편과 헤어지는 결말이 됩니다. 결혼 후 자유와 재산을 빼앗기고 가정폭력 피해자가 되어버린 엘레나의 모습은, 결혼 자체는 본인의 선택이이니 자업자득인 걸 감안해도 결혼하자마자 순식간에 약자가 되어버리고 그녀가 정당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는 전혀 없다는 게…… 시대적 배경 탓이겠지만 살짝 씁쓸했습니다.
빙의라는 요소가 들어가긴 하지만, 배경은 1930년대 미국이고 악역의 존재 외에 판타지적 요소는 없습니다. (악역이 2000년대 사람인데, 여주의 몸에 빙의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슨 다른 차원에서 온 악마라고 해도 될 정도로 판타지한 악행을 하긴 합니다;) 배경이 그리 낯익은 시대는 아니어서 신선했어요. 본편 내내 밝다기보다 무거운 분위기였고 주인공들이 많이 힘들어했지만, 그런데도 잘 읽혔고 끝은 해피엔딩이라 만족스러운 장편이었습니다.